1. 세대를 아우르는 인간군상과 공평한 허기를 봤다. - 나를 키운 팔 할은
2. 어쩌면 1년 내내 크리스마스이브를 맞고 있을 어떤 이들이. 기념 세일, 감사 세일, 마지막 세일, 특별 세일, 세상은 언제나 축제 중이고 즐거워할 명분투성이인데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눌 곳 없이 그 축제의 변두리에서, 하늘을 어깨로 받친 채 벌 받는 아틀라스처럼 맨속으로 그 축제를 받치고 있을, 누군가의 즐거움을 떠받치고 있을 많은 이들이, 도시의 안녕이, 떠올랐다. - 한 여름 밤의 라디오
3. 말과 글의 힘 중 하나는 뭔가 '그럴' 때, 다만 '그렇다'라고만 말해도 마음이 괜찮아지는 신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 당신과 조우
4. 헌책방, 언어학사, 게르하르트 헬비히, 장춘식, 박선미, 수강신청서 90학번 황진구 92학번 박선미, 현대미술의 이해 - 여름의 풍속
5. 부사는 동사처럼 활기차지도 명사처럼 명료하지도 않다. 그것은 실천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만날 큰소리만 치고 툭하면 집을 나가는 막내 삼촌과 닮았다. 부사는 과장한다. 부사는 무능하다. 부사는 명사나 동사처럼 제 이름에 받침이 없다. 그래서 가볍게 날아오르고, 허공에 큰 선을 그린 뒤 '그게 뭔지 알 수 없지만 바로 그거'라고 시치미를 땐다 부사 안에는 뭐든 쉽게 설명해버리는 안이함과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 - 부사와 인사
6. 서른, 기쁘게 한껏 부풀어 오르고 보니 곁에 선 부모가 바싹 쪼그라든 채 따라 웃고 있다. - 몸과 바람
7. 다만 내가 확실하게 알아챌 수 있는 건 그렇게 바깥에서 들어온 뭔가가 내 안에 마련해주는 '빈 공간'이다. 들어와 자리를 '채우거나', '차지하는' 게 아닌 '자리 자체'를 만들어주는. 고요하고, 고유한 상태를 독려해주는 무엇. 그 기분이 익숙해 내가 이걸 언제 느껴봤더라 고민했더니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문장들. 좋은 문장들을 읽었을 때. - 여름의 속셈
8. 그녀(편혜영)와 만나는 동안 그녀에게 자주 듣지 못한 말 중 하나는 옛날이야기였다. 나는 그게 서운하다기보다 그녀가 자기 속에 어떤 '아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짐작했다. 어느 선생이 인간의 심연을 '신도 들여다볼 수 없는 골짜기'라 표현하셨던 것처럼. 드러내지 않는 것, 아낄 것이 있는 작가는 그만큼 다른 것도 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지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oG83v4-sa2s - 그녀에게 휘파람
9. 지난 달 16일, 언제 침몰할 지 모르는 배 안에서 한 여고생은 불안을 떨쳐내려는 듯 친구에게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울기는 어떻게 구하더라?" 그러곤 그 농담을 끝으로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 요즘 나는 자꾸 저 말이 어린 학생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건네고 간 질문이자 숙제처럼 느껴진다. 이 경사를 어찌하나. 모든 가치와 신뢰를 미끌어뜨리는 이 절벽을, 이윤은 위로 올리고 위험과 책임은 자꾸 아래로만 보내는 이 가파르고 위험한 기울기를 어떻게 푸나. -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10.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 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런데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면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 역시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