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끼의 말뚝
전 정 우
<7회>
돈 바닥이 긁히고 본업도 이어갈 수 없게 된 판에 손에 들어온 몇 푼은 가뭄에 단비 같은 것이었다. 요즘 들어 삐끼들 사이에 조금 씩 주고받는 돈도 신통찮고, 귀국해서 송금해 주겠다던 돈도 소식이 없었다.
일층으로 내려와서 슬롯머신 앞에 앉았다. 지금 베팅하는 돈은 피를 짜낸 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곧은 낚시 물에 넣고 버티는 심정이었다
~ 오늘도 슬롯머신이다마넌, 정처 없는 이 바알길~
유행가 가사를 입에 담고 흥얼거리며 푼돈을 흔들었다. 선창가 고동 소리 아내가 그리워도 나그네 슬롯 게임에 잭팟이 안 붙어라. 소액 베팅으로 운이나 따르길 기다리면서 몇 푼 잃고 몇 푼 따는 식이었다.
옆자리 사람이 바뀌고 화장품 냄새가 진하게 코를 쏘았다. 새로 온 사람 얼굴 한번 쳐다볼 틈도 없었다. 내 일에 몰두하기도 바빴다.
"강준호! 이거, 질러서 끝내고 빨랑 일어서!"
갑자기 옆에서 우리말 소리가 들리고 미국 돈 10달러 지폐 한 장이 내 코밑에 툭 떨어졌다.
고개를 들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런! 낭패였다. 빚쟁이, 김 여사였다. 헉! 용코로 걸린 것. 눈에 들어오는 사물이 누렇게 변해 보였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어떻게 알고? 흥, 될 대로 되라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김 여사! 무슨 일이오? 여길 다 오시고?"
뱃장을 보이듯 내가 웃고 인사했다.
"오면 안 될 델, 내가 왔는가?"
나보다 나이가 적은 김연희가 반말로 시비를 텄다. 시작부터 명령조가 아니었던가. 옛날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패였다. 엘리스한테 낭심을 채이던 밤 상황이 번쩍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여자들은 모두 남자 낭심을 겨누고 태어나는 것이나 아닌지 사뭇 혼란스러웠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에 아이들을 데리고 여러 해 살아오고 있는 여자. 이 여자를 안아줄 수 있다면?
남편 보험금을 타서 차곡차곡 쌓아두고도 억측으로 밤낮 가리지 않고 일만 하는 여자가 빚 받는다는 핑계로 찾아온 것. 빚도 받고 임도 보자는 속내는 아닌지?
당장 빚은 못 갚아도 수고 정도는. 크게 당황하거나 서두를 일은 아니었다. 주문 대로 따라서 일어섰다. 어르고 구슬리다 안 되면 줄행랑이라도 놓기 위해서 조용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녀와 인연은 한인단체에서 함께 재정을 맡고부터 싹텄다. 두 사람 모두 사심 없이 일을 매끈하게 잘 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던 관계. 여자 화장실 쪽으로 나를 몰고 간 김연희가 손에 들고 있던 백을 쭉 밀어서 열었다.
"이거 보여? 내 돈 내놓겠어, 못 내놓겠어?"
장난감처럼 보이는 피스톨을 손에 든 김연희가 말했다. 총을 쳐다보던 내 입에서 말이 느리게 빠져나갔다.
"김 여사! 진정해요. 빚쟁이 죽여 놓고 돈 받는 방법은 없소. 내가 살아 있어야, 돈도 갚을 게 아니오."
사실이 그랬다. 죽은 사람이 빚 갚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몇 마디 말이 더 오고 갔다. 처음에 보였던 살기는 그녀 얼굴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백에 총을 밀어 넣는 손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보고 내심 웃었다. 저 버거운 짓을 왜 사서 하는가. 깨끗이 포기하면 될 것을. 카페로 가서 마주 보고 앉았다.
"돈 생기면 누구보다 김 여사 돈부터 갚을 생각이오. 마침 송금해 올 돈이 좀 있어요. 며칠만 더 참으시면 꼭 송금하리다. 댁의 귀여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오."
다행히 누가 어디서 송금해 주는 돈인가 묻지 않았다. 윤한수를 빼고 있을 수 없는 돈이지만 결과는 빤했다. 그 돈이 고스란히 손에 들어와 봤자 내 몫은 천 달러에도 못 미치는 푼돈일 수밖에 없었다. 삐끼들과 공동으로 나누게 되면 며칠 베팅할 돈도 부족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증권 투자했다는 돈을 어떻게 됐죠?"
김연희가 물었다. 비싼 이자를 붙여서라도 그녀가 돈을 빌려주게 된 꼬투리는 내가 증권투자를 해둔 게 많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만큼 나를 신용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몇 푼어치 안 됐던 증권도 만기가 되기 전에 팔아 조졌던 것, 다 옛말이었다. 많든 적든 김연희 돈부터 갚을 생각도 해보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송금해 올 돈 전부를 내 몫으로 쳐도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사정해서 김연희를 돌려보내고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못 갚는 돈이 김연희 뿐 아니었다.
슬롯머신을 상대로 미니멈 베팅을 하고 있을 때 나타난 PR담당 매니저, 제이콥이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내 동정을 살피면서 장난처럼 몇 번 베팅하고 일어선 제이콥이 차나 한 잔 하자고 말했다. 웬일인가 싶어서 따라서 일어섰다.
첫댓글 갈수록 흥미진진하네요. 잘 모르는 세계를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구요.
땅 위에 나라가 생기고 국경이 그어지면부터 고질적인 3대 사획악은 도둑과 매음 도박이라지요. 그러나 요즘은 마약이 3대악에 지지 않을 만큼 문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훨훨 날던 사람도 이와 같은 사회악에 매료되는 순간 화살 맞은 새처럼 추락하고 말겠지요. 화자 강준호 역시 그런 부류의 보잘 것 없는 사람, 전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가면 송금해주겠다는 돈이 함흥차사네요.
저까지 맥이 빠집니다.
갑자기 김여사는 또 왜 등장하셔서...
저 같은 초짜 생각으로는 김여사의 등장은 조금 뜬금없네요.
미리 복선을 깔았으면 좋았을텐데...싶군요.
잘 읽고 갑니다.
강준호로부터 체면 구기고 자존심 상한 피해자가 윤한수라면 김 여사야 말로 금전적 손해를 크게 본
피해자인 것, 틀림없습니다. 오죽했으면 혼자 사는 여자가 총까지 구해 들고 그를 찾아왔을까.
그러나 아직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는 뻔뻔함, 빚 밭으러 온 여자 안아줄 생각이나 하는 몰염치.
그가 그런 식으로 태어낳다기보다 도박에 미친 사람들 속성 혹은 최후가
그렇고 그렇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