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팔이
나는 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사내가 껌을 질겅거리는 건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극장에서 영화가 한 차례 끝나면 껌, 은단, 캐러멜 등을 파는 사람이 통로를 누볐다. 동행한 옆 사람에게 껌 하나쯤 권하는 것이 관람 예의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껌은 미군 부대에서 뒷거래로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등록금 마련은 공부보다 힘들었다. 등록금 면제 수준의 장학금은 숨이 가빴다. 저녁에는 중3 알바를 했다. 우유가 건강식품으로 각광 받기 시작하던 때라 새벽에는 우유배달을 했다. 신문 배달보다는 괜찮았다. 배달로 끝나지 않고 빈 병을 수거하여 보급소로 반품하는 일이 시간 소모가 많고 힘에 부쳤다.
배달과 빈 병 수거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다방 납품을 시도했다. 기존 거래처들이 터를 잡고 있어서 뚫고 들어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 군데 거래가 성사되었다. 거기서 소개받아 또 한 군데, 또 소개로 한 군데씩 거래를 성사시켜 나갔다. 양적 팽창은 성공했으나 단가경쟁이라는 현실 앞에 소득은 양에 비례하지 않았다.
통금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우유 보급소로 달려갔다. 가정집과 달리 다방 대여섯 군데만 돌아도 300여병을 단시간에 배달할 수 있어 시간이 절약되었다. 문제는 수금이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손님과 이야기 중일 때면 구석 자리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이 만만찮게 오래 걸렸고 그래야 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삶이 힘들지는 않았으나 자존감이 구겨지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껌팔이 소년이 눈에 띄었다. 우유를 한 잔 사면서 이야기를 시켰다. 국산 껌도 미제처럼 납작하게 나오고 맛도 미제 못지않아 잘 팔린다는 귀띔이었다. 녀석은 사업정보가 샌다는 생각도 없이 우유 한 잔에 껌팔이 정보를 낱낱이 까발렸다. 문제는 주먹쟁이 들이었다. 상납을 해야 남포동 광복동에서 껌을 팔 수 있다고 했다.
자장면 한 그릇에 200원 하던 시절, 하루 소득이 1만 원에 가깝다는 것은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하였다. 주먹쟁이들이 자리다툼을 벌일 만 한 일이었다. 밑천이랄 것도 별다른 장비도 필요 없었다. 거래처 확보를 위한 영업도 필요치 않았다. 결심만 굳히면 못할 일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먹쟁이 쯤은 광복동 일대를 관할하는 파출소 소장이 머잖은 친척이라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보급소 소장에게 학업에 지장이 있어 못 하겠다 하니 서너 달 소득 정도를 권리금으로 건네주었다. 두목급 주먹쟁이도 소개를 받았다. 학비를 마련한다는 말에 그도 십분 수긍하면서 협력하기로 약조하였다. 남포동, 광복동, 부평동을 활동영역으로 장사를 해보라 하였다. 방해꾼은 언제든 파출소 소장에게 보고하면 된다 하였다. 그렇게 나의 껌팔이가 시작되었다.
껌팔이도 약간의 요령이 필요했다. 반드시 껌을 사고야 마는 손님의 부류를 파악 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아베크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껌을 갖지도 않고 그냥 천 원짜리 지폐를 껌 통 위에 으스대듯 폼을 잡으며 던져 주었다. 혼자인 남자 손님은 자꾸만 말을 시켜 시간을 빼앗겼다.
화장이 짙은 아주머니 둘이 있을 때는 대학 배지가 돋보이도록 허리를 약간 숙여 눈높이에 맞춘다. 배지를 힐끔 쳐다보면서 D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군 하면서 껌을 집어 든다. 배지를 보고 대학을 알아맞히는 것으로 우쭐 해하는 눈치다. 나이 들어 보이는 커플은 여성이 껌을 집어 들어야 남자가 돈을 치른다.
남자들끼리 모인 테이블에는 접근을 안 하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다. 여학생 혼자 앉아 있는 경우는 판매율이 90%, 둘이 앉아있는 경우는 50%, 셋이 앉은 자리는 접근금지다. 부산의 다운타운이라 할 수 있는 중심가를 서너 시간 정도 돌면 1만원 가까운 순소득이 생겼다. 등록금을 위시한 생활비를 충당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만큼 쏠쏠하였다.
동급생이나 선배들과 마주치면 가차 없이 강매에 돌입하였다. 한 사람당 한 통씩 안겼다. 수익금이 동아리 활동비로 쓰이는 줄 알았기에 아무도 주저하지 않고 사주었다. 주크박스에 앉은 디스크자키가 분위기를 잡는 음악다방이면 신청곡을 넣고 나도 잠시 껌팔이를 쉬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그 시절 나에게 크나큰 힐링과 위안을 안겨 주었다. 내 처지를 오페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나에게 껌팔이 정보를 나누어준 꼬마와 마주치기도 하였다. 눈인사를 나누곤 가까운 중국집으로 데려가 자장면을 사 주곤 했다. 주먹쟁이 에게 상납하는 건 여전하지만 매상이 적다고 주먹다짐을 하지는 않는다고 일러바친다. 만약 껌팔이 외 나쁜 일을 시키면 찾아오라며 학교 앞 빵집을 연락처로 일러주기도 했다.
주먹쟁이의 역할은 나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 일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상권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다방 마담도 자료상도 꼬맹이 주먹들도 모종의 배후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전혀 방해를 하려 들지 못했다. 파출소 소장의 체면도 살려 드릴 겸 주먹쟁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쪽에서 완강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성사되지는 못했다.
국문과 동아리 친구가 자작 콩트를 낭독하면서 “여자는 껌이다. 껌!”하고 외치는 바람에 크게 웃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 다 씹은 껌은 뱉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사랑은 추억이라는 미련이 남을테다. 요즘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껌 광고를 보지 못했다. 보도블록에 짓 붙은 껌 딱지를 긁어내는 모습을 본지도 오래됐다. 나의껌팔이 역사는 첫사랑만큼이나 진하고 아련하게 생존과 생활을 동시에 만족시켜준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