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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영웅 강승우 육군중위
□ 두산봉 정기 받은 영특한 소년
호국영웅 강승우는 1930.11.23.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에서 강치원씨와 부남근여사 사이에 태어났다.
1938년 성산서공립심상소학교(현 동남초등학교)에 입학, 1944년 봄에 졸업하였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강의록을 구입하여 주경야독을 하였다.
야학을 열어 글을 모르는 분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농민회를 결성하면서 그는 어린나이에 지역사회지도자가 되었고, 농촌계몽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48년 4.3사건이 터지면서 야학당이나 농민회 활동을 중단하던 때 김춘일과 결혼하였다.
□ 포탄이 터지는 전선으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무수한 인명이 살상당하며 국토는 초토화되기 시작할 때 제주의 청소년들은 8월 5일과 30일에 3천여명이 해병대로, 9월 1일과 10월 1일에는 1만 여명이 육군으로 입대하였다.
만 20세인 강승우는 9월 1일 육군 제 5훈련소에 자원입대, 초보적인 기초훈련을 이수하고 9월 하순 전선에 투입되어 전투에 돌입하였다. 10월 19일 아군은 평양을 탈환하는 날 중공군 대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에 개입하였고 12월 1일에 아군은 전 전선에서 후퇴를 해야 했다.
이 때 강일병은 지난 10월 27일 아들(응봉)이 태어났다는 서신을 받았다.
아군은 1951년 1.4 후퇴로 남하하다 오산~원주선에서 적군을 일단 저지하고 다시 북진을 거듭하여 삼팔선부근에서 오르락내리락하였다.
그 때 일선에서 소대장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자 6월에 육군간부후보생 모집이 있었다.
□ 갑종간부 제 7기로 육군소위 임관
그 당시 간부후보생이 된 그룹들은 학도병 출신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 전투경험을 많이 쌓은 고참병, 월남 중 현지 입대한 사병, 1.4후퇴 때 조급히 편성됐던 국민방위군 장교 등으로 구성되었다.
강승우 상병도 이에 응모하여 1951년 6월 24일 당시 부산 동래에 소재한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 제 7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 갑종간부 제 7기에는 보병 117명, 포병 9명, 병기 13명, 기타병과 30명등 도합 169명이 입교하였다.
당시 학교장은 이한림 준장이었고 연대장은 김희준 대령이었다. 그 밑에 대대, 중대와 4개 구대로 편성되었다. 야전교정에서 A고지 B고지 공격훈련과 연병장에서는 총검술훈련을 배웠다. 화기학과 일반 학 등 총 1,056시간 혹독한 교육훈련을 받았다.
보병과에 속한 117명은 11월 10일경 20주간 교육훈련을 마치고 광주상무대에서 나머지 교육훈련을 이수하고 12월 8일 수료와 동시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강 소위 등 29명은 당시 철원 주둔 제 9사단으로 명령을 받는다.
□ 첨병 소대장이 되어 백마고지로
강 소위는 제 1중대 3소대를 이끌고 백마고지에서 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 지리적요충지백마고지
백마고지는(△395)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에 소재하며 평양에서 200Km서울에서는 87Km이고 철원의 북서쪽 12Km지점에 놓여있는 38선 북쪽지역이다
현재 휴전선의 설정을 보면 백마고지 바로 뒤로 군사분계선이고 그로부터 북쪽 2Km까지 북방한계선이고 남쪽 2Km까지는 남방한계선이다. 그리고 봉래호에서 발원한 역곡 천이 동북쪽에서 흘러와 백마고지 앞을 감돌아 서쪽으로 흘러가고 그 부근에는 프랑스군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 군사분계선 북쪽에는 고암산(△780 김일성의 별장이 있으며 김일성은 여기서 작전을 지휘). 봉래산(△460)과 봉래호가 자리 잡고, 백마고지 동쪽에는 산명리가 전개된다.
그리고 남방한계선 남쪽에는 비옥한 철원평야가 펼쳐지며 그 중간 중간에 상토고지(△175)
공작새 능(△266). 300고지(김종오 사단장이 직접 작전 지휘 하던곳 ), 삼자매봉이 있었으며 그 남쪽은 경원선철로와 더불어 구 철원과 동송 지방에 이른다.
이 백마고지 주변에는 역사적으로 옛 궁예시대의 도성지와 남대문지 그리고 석탑지가 있다. 그 중 도성지만은 군사분계선 북쪽에 위치하며, 그 나머지는 분계선 남쪽이지만 민간인은 출입을 할 수가 없는 통제지역이다.
전쟁 중에는 철원. 평강. 김화를 잇는 지역을 철의 삼각지대라 하여 서로 차지하려고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그 중에서도 백마고지는 인근 일대를 한 눈에 내려다 볼수 있는 전략상 요충지였다.
그 남쪽에 있는 17,000ha나 되는 철원 평야를 완전히 감제할 수가 있어 철원과 김화를 제압하는데 매우 유리하다.
반면에 적에게 빼앗긴다면 역곡 천을 넘어 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다리 한 개뿐이라 진격이 매우 어렵게 된다. 따라서 철의 삼각지대 방어에 치명적이 되므로 전선을 남으로 후퇴시켜야하는 그야말로 엄청난 기로에 놓여있었다.
* 백마고지를 둘러싼 군사력
원래 이 고지는 이름이 없어 395고지라 부르다, 어느 날 작전회의 때부터 백마고지로 칭하였고 1952년 10월 15일부터 제 9사단을 백마부대로 호칭하였다.
1952년 10월에 서부전선은 한강하구에서 장단과 판문점을 거쳐 중부전선은 철원부근에 이르렀고, 동부전선은 고성에서 남북이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편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한 휴전회담은 판문점으로 옮겨 진행 중에 있었고,
10월에 공산군은 현 전선을 기준으로 군사 분계선을 긋자는 유엔군 측 제의에 동의하였다.
이에 따라 피차 휴전을 의식하여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집념을 양쪽이 모두 다 강렬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52년 7월에 소강상태에 있는 휴전회담을 다시 속개시키기 위하여 유엔군은 B-29편대로 압록강의 수풍댐과 평양대폭격을 감행하였다.
그러자 공산군은 지상전으로 이를 보복하려고 1952년 9월부터 유엔군과 맞먹거나 어떤 때는 더 우세한 포화력으로 철의 삼각지대에 대 공세를 가해왔다.
바로 백마고지는 이 범주에 포함되고 있었다.
점점 위기가 고조되는 당시 백마고지 남쪽에는 한국군 보병 제 9사단(사단장 김종오)산하 제 28연대(연대장 대령 이주일),
제 29연대(연대장 대령 김봉철),제30연대(연대장 대령 任益淳)가 방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의 좌측 방에는 프랑스군 대대가, 우측 방에는 미 육군 보병 제 2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적은 중공군으로 제 38군 휘하의 제 112 제 114사단으로 한국군의 배나 되는 대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 피의 백마고지 쟁탈전
1952년 10월 초 중공군 통신장교 곡중교(중령)가 귀순하여 중공군이 10월 4일 대 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아군은 경계 강화 지시를 내리고 진지를 보강하였다.
그리고 공군에 요청하여 10월 3일 오후부터 백마고지 북방에 있는 적을 향해 맹폭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 폭격에도 굴하지 않고 중공군은 제 38군의 전 주력을 동원하여 10월 6일 오후 7시에 대대적으로 백마고지를 공격해 왔다.
그들은 철의 삼각지대를 제압하여 주저항선을 철원 이남으로 밀어내려하였다.
이 때 아군은 제 30연대 제 1대대와 제 2대대가 백마고지에 나가 있었는데 제일 먼저 중공군과 격돌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명중률이 양호한 야포를 비 오듯이 작렬시켰고 그와 동시에 아군의 산병호와 교통호는 삽시에 무너져 내려 앉았다. 그로 인해 395고지앞 전초진지(화랑능선)에 배치된 제 3대대 제 11중대가 돌파 당하고 후퇴를 하게 되었다.
이 때 중공군은 제 1대대 제 1중대 방어선으로 징을 치고 피리를 불며 새까맣게 줄을 지어 올라왔다.
아군은 총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적을 무수히 쓰러뜨렸으나 중공군은 그 시체를 밟고 꾸역꾸역 고지로 올라오고 있었다.
어찌보면 생사를 초월한 사람들처럼 우직스럽고 허무한 죽음을 택하고 있었다.
아군의 총열은 달아올라 더 이상 발사도 안 되고 수류탄 보유량도 바닥이 났다.
그렇게 중공군을 120여명이나 사상시켰으나 파도처럼 다시 들어오자 이번에는 대검으로 찌르고 주먹으로 치고받는 백병전을 처절히 전개했으나 적은 계속 더 증강되어 왔다.
이러한 혈투 속에 제 1대대 200여 병력은 거의 전사 상을 당하여 15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이 인해 전술로 인해 아군은 백마고지에서 할 수 없이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아군은 10월 7일 아침 아군의 야포지원에 힘입어 다시 백마고지를 탈환하였고
밤에는 다시 중공군이 역습해와 아군은 후퇴하고 낮에 아군은 항공기와 야포의 지원으로 다시 백마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전투개시 5일 동안에 고지의 주인은 10여회나 교체 되었고 피아간의 엄청난 전사자의 발생으로 교통호는 시신으로 가득히 메워져 적군인지 아군인지 분간 못할 정도였다.
이 때 제 1대대 제 1중대는 병력의 손실 때문에 재정비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백마고지 후방 1Km지점으로 후퇴하여 대기 중에 마침 제주도의 제 1훈련소에서 훈련을 끝낸 200여명의 신병을 보충 받아 재편성을 하였다.
□ 살신성인한 육탄 삼용사
드디어 10월 12일 새벽에 제 1중대는 다시 백마고지를 향해 전진을 개시하였고, 고지 전방 50m까지 전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제 1중대가 재편성하는 3일간 어간에 중공군은 견고한 벙커를 3개나 구축해 놓았고 그 속에서 기관총을 쉴새 없이 난사해 아군은 4시간동안 꼼짝 달싹 못하고 진퇴양난에 처해 있었다.
제1중대 200여 병력은 소대장이 3명이나 부상을 당해 장교는 구분원 제 1중대장과 강승우 제3 소대장만 남았고 사병도 숱하게 희생되어 3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그야말로 아군은 전멸에 가까웠다.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제 3소대장 강승우 소위는 옆에 있는 전우를 붙잡고 누가 살아날지 모르지만 내가 죽거든 내 호주머니를 뒤져 우리가족에게 유서를 전해달라며 분연히 결사대로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자 평소 다정히 지내던 안영권(1924.11.10. 전북 김제 시)일병과 오규봉(1928.10.4. 충남 천안시)일병도 함께 손을 붙잡고 수류탄을 배낭 속에 짊어졌다.
이 세 용사들은 토치카 1개씩을 맡기로 하고 자기가 맡은 토치카에 육탄으로 돌진하여 휴대한 술탄을 폭발시켰다.
3개의 토치카에서 적의 기관총좌 3개가 산산이 부서져 공중으로 비산하면서 침묵을 고했다.
그와 동시에 삼용사도 나라위해 자기를 초개같이 버리고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이렇게 백마고지는 24번째로 아군이 차지하여 정상에 이르러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 전투에서 육탄 삼 용사뿐 아니라 대대장 2명, 중대장 5명 그리고 여러 명의 소대장을 잃었고 수많은 병사들이 조국을 위하여 죽어갔다.
한편 강승위 소위, 안영권 일병, 오규봉 일병은 삼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1953년 7월 1일 삼 용사에게는 금성 을지무공훈장과 함께 1계급특진을 추서하였다.
그래서 강승우 용사는 중위, 안영권. 오규봉용사는 상병이 되었으며 더불어 강승우 중위에게는 1953년 5월 3일 미국은성훈장도 추서하였다.
강승우 중위의 유해는 부모님의 요청으로 고향인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충혼묘지에 안장하였다.
한편 전쟁기념사업회에서는 1995년 4월 강승우 중위를 100인의 호국인물 중 한 분으로 선정하였으며 2001년 10월에는 이 달의 호국 인물로 선정하여 10월 11일 현양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용사를 기리는 조형물로는 1973년 10월 12일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어린이 대 공원에 보병 제 9사단에서 백마고지 삼용사의 동상을 건립하였고
1990년 5월 3일 보병 제 5사단(사단장 소장 김봉찬)장병들이 선배 전우들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기리기 위하여 철원읍 백마고지 남쪽에 22.5m의 백마고지 전적 비 2개를 나란히 세웠다.
또한 1991년 6월 15일 제주시 일도2동 968-2번지 탐라 자유회관 경내에 강승우 중위의 동상을 건립하였고 서울 용산구 용산동 1 가 전쟁 기념관 내에도 동상을 건립하였다. 그 외에도 2001년 6월 23일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11258번지 동남초등학교 구내에 강승우 중위의 흉상을 건립한 바 있다.
강승우 영웅의 가족으로는 미망인 김춘일여사가 1982년 6월 19일 제주신문사가 제정한 제 8회 제주원호대상을 수상하였다.
여사께서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고 아들을 훌륭히 성장 시킨 후 1998년 7월 20일 6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외아들인 강은봉은 부인 임정화여사와 제주시에 살고 있다
<발췌> 정수현, [한라의 젊은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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