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한훤당선생기념사업회 추계학술대회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道學 · 師友 · 追崇樣相에 관한 연구* 일시 : 2014년 11월15일 12:00(토요일) 장소 : 대구시 중구 장관동 담수회관 3층 ⚫주제1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道學의 實相과 그 意味 발표자 : 권오영 학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주제2 한훤당 김굉필선생에 대한 評價와 追崇樣相 발표자 : 황위주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주제3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師友關係와 時代精神 발표자 : 정출헌 점필재연구소장,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대구담수회관에서 열린 한훤당선생기념사업회 갑오년 학술발표회에 대종회(회장 熙勇)가 제공한 버스편으로 병국炳國 사무총장과 재경서흥회 회원 일행과 다녀왔습다. 부산종친회(회장 兌雲) 종원 스무분도 버스편으로 대구 담수회관에 도착했고 희덕熙德 계파 종손을 비롯 달성과 창녕, 합천, 마산 등 각지에서 많은 종원분들이 참석해 한훤당선생에 대한 우리 문중분들의 관심과 열의를 직접 엿 볼 수 있었다.
대구시청에 봉직하고 계신 돈희 종원의 사회로 시작된 개회식은 긍식兢埴 자문위원의 개회선언, 문희갑文熹甲 기념사업회 회장의 대회사, 박연탁朴淵鐸 사단법인 담수회장의 축사, 한훤당 종손과 차종손을 대신하여 성용聖容 한훤당 종손의 차자次子가 참석자들과 한훤지례寒暄之禮의 예를 나눴다. 문희갑 회장은 인사말에서 한훤당선생이 몸소 실천한 소학사상을 이제 우리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소양과 능력이 부족하지만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감히 맡게 되었다는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관료생활을 그만둔 후 늦었지만 한학과 유학 등에 관심을 갖고 공부에 정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문회장은 우리사회가 과거에 비해 풍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자녀들의 충효사상과 도덕적 해이가 도를 넘어 국가 기강과 존립의 위기감마저 느낀다며 이제 경제 우선 논리보다 윤리와 기본질서를 지키는 것을 국정의 최우선과제로 삼아 우리사회가 한훤당정신을 후세들이 본받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첫 발표자로 나선 권오영權五榮 학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道學의 實相과 그 意味』 에 대해 논하면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이 스승 점필재 김종직선생과 제자와 스승 사이라 할지라도 지향하는 목표가 다른 점이 있었다는 기록에 주목하고 秋江文集, 佔畢齋集, 國朝儒先錄, 退溪文集, 高峯集, 東文選, 慕齋集, 旅軒文集, 星湖全集, 別洞集, 世宗實錄, 冶隱集, 中宗實錄, 「김훈식의 한훤당 김굉필에 대한 조선시대의 평가와 그 의미」 등 다양한 문헌과 학술자료 등을 통해 선생이 스승을 제치고 조선 도학의 祖宗이 되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파헤쳐나갔다. 권오영 교수는 이황선생 문집의 글을 인용, 우라나라의 先正이 도학에 있어, 오로지 위기爲己의 학문을 일삼아 참으로 실천하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은 이를 구한다면 오직 김굉필 한 사람뿐이라는 평가가 내려지고 그로인해 조선 도학의 도통道統이 정립되었음을 주지시키고 ‘일상의 도’를 실천한 학자 김굉필은 그 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도자殉道者」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다. 두 번째 발표자 황위주黃渭周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는 『한훤당 김굉필선생에 대한 評價와 追崇樣相』 주제의 강연에서 한훤당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남효온의 秋江集, 景賢錄, 景賢續錄과 附錄의 글을 인용, 한훤당은 소학小學에 기초한 의리학義理學의 탐색과 실천에 매진함으로써 자신의 몸가짐이 반듯하고 우뚝했음은 물론, 제자 양성을 통해 이런 새로운 학풍 조성에 진력함으로써 당대에 이미 명성이 드러났다는 평가가 있었고, 한훤당과 혈연, 학연,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조차 김굉필이 ‘유학의 정맥正脈을 얻은 사람’, ‘학문이 순정醇正하다’, ‘지조를 지키고 실천에 힘쓴 操守踐履之人’, ‘학자들이 종사宗師로 여긴 인물’, ‘현자賢者로 예우해야 마땅하다’라는 평가에 주목했다. 황위주 교수는 이러한 당대의 평가는 한훤당 제자들이 관직에 진출하면서 한훤당에 대한 차별화를 시도하고 가증加贈, 증시贈諡, 문묘종사文廟從祀 등을 추진하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한훤당의 학문이 소학과 그 실천에만 특징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학大學』과 『육경六經』을 두루 탐색하여 종양성찰을 본체[體]로 삼고 제가 치국 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를 활용[用]으로 삼아 도학 자체가 고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학자들이 종사宗師로 여겼다 했을 뿐만아니라 일부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존숭하며 유림의 종장宗匠, 곧 유종儒宗이 되었다는 평가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황위주 교수는 한훤당에 대한 평가와 추숭은 선조 이후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두 분이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한훤당을 김종직과 차별화시켜 비로소 그 그늘에서 해방시켰고, 사제간의 의리를 벗어나면서까지 도학을 추구한 꿋꿋한 도학자로 부각시킴으로써 그에게 독자적인 위상을 부여할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이황이라며 그 근거를 경현록 등의 문헌에서 제시하고 있다. 황교수는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에서 향선생鄕先生을 거쳐 동국유종東國儒宗으로 까지 추승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현존 문헌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긴 하나 선생에게 직접 공부한 제자나 그 계승자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던 깊은 학문세계가 따로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면서 이에대한 학계의 연구를 추후의 과제로 남겼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황위주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의 「한훤당 김굉필선생에 대한 評價와 追崇樣相」과 다른 두 교수의 연구발표 내용 전문도 우리 카페에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발표자는 점필재연구소장을 맡고 계신 정출헌鄭出憲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는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師友關係와 時代精神」에 대해 강론을 폈다. 점필재연구소에서는 김굉필선생을 ‘詩없는 도학자’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도학道學뿐만 아니라 시학詩學에도 정통했던 분이라며 남효온이 죽기 2년 전까지 써내려간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 모두 63명 벗들의 이름을 올리면서 김굉필을 맨 첫 자리에 올려놓고 그의 행적을 기술했음을 상기시키고 남효온의 기록들을 꼼꼼히 읽어 줄 것을 참석자들에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당시 사제사이의 이견과 사우사이의 논란이 한훤당과 점필재의 시대인식 차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성종13년 봄부터 김종필이 서른 살이 되던 성종14년(1483) 봄에 이르기 까지 성균관 유생들은 교수들의 무능과 비리를 조롱하는 대자보를 내걸었다. 성종14년 봄, 김굉필은 서울을 등지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나이 30이 된 뒤에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고, 후진을 가르치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했던 증언은 김굉필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났던 시기가 바로 그 때였고 당시 김굉필과 절친하게 지내던 벗으로 남효온과 김시습을 꼽았다. 정출헌 교수는 김굉필과 김시습의 관계가 거리가 먼 것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그들 둘은 절친한 사우師友였다며 「매월당집」 김시습의 시 <회구懷舊>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며 당시 김굉필은 양주楊州에 은거하며 지내고 있었다며 많은 사우들이 김굉필이 서울을 떠나 후진들과 강학講學에 전념하고 있는 양주를 자주 찾았음을 상기시키고 ‘양주가는 길’이 순례성지의 역할을 했다며 경현록(215-216쪽)에 기술된 ‘미원별서迷原別墅’에 관해 부연 설명했다. 唯家金氏子 누구의 집 김씨 아들인가 家往古松橋 집은 고송교 곁에 있었다네 不輟寒暄間 한훤을 묻는 걸 그치지 않고 多周錢穀饒 도와주던 전곡은 넉넉했었네 東來音更斷 동쪽으로 오고 보니 소식 다시 끊기어 西望首重搔 서쪽 바로 보며 머리 거듭 긁어대네 迢遞揚州路 아득히 먼 양주로 가는 길 孤魂肯見招 외로운 혼이 기꺼이 부름 받을까? 정출헌 교수는 검증되지 않아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훤당의 시 「노방송路傍松」 의 주제가 된 소나무에 이런 설명을 달았다. 김굉필이 밀양으로 내려와 지내고 있는 노스승 김종직의 병들고 지친 모습을 뵙고 돌아가는 길에 문득 길가에 선 노송을 보며 스승의 모습으로 떠올리며 지은 시가 노방송이라 했다. 그 근거로 「소나무는 밀양 땅에 있다[老松 在密陽]」는 경현록[44쪽]의 주석을 제시했다. 김종직의 제자 남효온 또한 병든 스승을 찾아 내려와 밀양 영남루에서 마지막 작별의 만남을 갖고 시를 남겼다. 제자 남효온과 스승 김종직은 그 이듬해인 성종22년(1492) 모두 죽었다. 그 무렵 김굉필은 부친상을 당해 삼년상을 마치고 고향에 머물러 있었다. 정출헌 교수는 학계에 아직 발표되지 않은 위의 사실들을 새롭게 제사하면서 노방송의 시에서 보듯 스승 점필재와는 이견을 보인 적은 있지만 갈라지지는 않았다는 견해를 부각했다. 하지만 김굉필은 스승과 달리 자신의 갈 길을 명확하게 정하고 더욱 깊게 인간의 길을 걸어갔다며 우리가 김굉필을 조선의 도학을 창도唱導한 분으로 기억하는 까닭은 김굉필의 모습이 사우들에게 존중의 마음을 불러 일으켰고 마침내 조선을 새로운 문명국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2014 한훤당선생기념사업회 추계학술대회 주제발표 내용은 94쪽의 많은 분량이다. 따라서 필자가 작성한 글은 학술발표 내용의 일부만을 발췌하여 소개한 것임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책자 말미에 한훤당선생 생애 연표(草案)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경현록에 실린 연보 등을 기본으로 실록과 잡록, 시문을 통해 보완 수정한 초안으로 기념사업회의 연구 성과에 따라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날 것으로 기대되는 대목이다. 일례로 성종13년(1482) 죽림칠현 결성. 성종15년(1484) 김시습이 김굉필을 그리는 시 <회구懷舊>, 성종22년(1491) 한훤당 시 <노방송路傍松>이 지어진 해. 그리고 연산1-10년까지 선생의 행적 등 몇가지 사실들이 추기되었고 한훤당 김굉필선생이 돌아가신 1504년부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된 1610년 까지 사후 100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학술대회 자료집 부록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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