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굉필(金宏弼, 1454∼1504년)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 혹은 한훤당(寒暄堂). 본관은 서흥(瑞興).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와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 청주 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소학≫을 배웠고,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적 학문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의 문하에서 조광조, 김안국 등이 배출되었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형조 좌랑(刑曹佐郎)을 지냈으면 1498년의 무오사화와 1504년 갑자사화를 겪으며 두 번의 유배를 당했다. 1504년 전라도 순천의 유배지에서 사형당했고, 사후 1577년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追贈, 나라에 공이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벼슬의 직위를 높여 주는 것)되었다. 1610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었다.
'반쪽의 목표와 온전한 삶'
사람들은 누구나 삶의 목표를 세우면서 미래를 설계한다. 가령 대석학이 되어 대학의 강단에서 서서 후진을 양성한다든가 의사가 되어 여러 사람의 건강을 보살피며 다르게는 판사나 검사가 되어 힘없는 사람들의 의지처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는 경우는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성취한 다음의 삶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 되었다. 결국 반쪽의 목표만 세웠기에 반쪽의 삶을 살게 되는 꼴이다.
조선시대의 청소년들은 각 지역에서 치르는 초시(初試)에 합격을 하여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이 되고 나면 보다 큰 내일을 위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관비장학생의 특혜를 입으면서 중시(重試, 과거)를 준비했다. 그들이 공부하는 성균관의 구내에는 대성전(大成殿)이 있다. ‘문묘(文廟, 성균관 대성전)’라고도 불리는 아주 신성한 곳이다.
문묘에는 해동 18현(海東十八賢)으로 추앙되는 이 땅의 명현(名賢)들이 배향되어 있다. 신라의 명현으로는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의 두 분이 종사(從祀)되어있고, 고려의 석학으로는 안향(安珦)과 정몽주(鄭夢周)의 두 분이 그 영예를 누렸다.
조선조의 명현으로는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다섯 분이 먼저 배향되었고, 그 후에 김인후(金麟厚), 성혼(成渾), 이이(李珥), 조헌(趙憲),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俊吉),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박세채(朴世采)의 순으로 배향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이들이 과연 누구인가. 이들은 태산과도 같은 학덕으로 예치(禮治)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임금을 교화하여 품격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칼날 같은 직언을 올리는 것으로 때로 목숨을 잃는 불운을 자초하였다. 행동을 수반한 참 지식인들에 의해 역사는 언제나 온전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우매한 임금은 신하들의 충언을 야속히 여겼다. 더러는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여 자신을 위해 충언한 신하들을 절해고도나 산간벽지에 부처(귀양)하기도 하였고, 심하면 사약을 내려서 죽이기까지 하였다. 김굉필, 조광조, 송시열은 그런 죽음(賜死)을 오히려 명예로 여겼고, 정여창, 이언적, 조헌 등은 귀양을 사는 고통까지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충언하는 신하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내렸던 군왕들도 한 줌 흙이 되어 잊힌 존재가 되었지만,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공익에 이바지한 용기 있는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문묘에 배향되어 천년의 삶을 누리면서 그 명예를 자손들에게까지 나누어주고 있다.
성균관에 입학한 조선의 젊은이들은 이들 선현들의 지고함을 삶의 목표로 삼았고, 명현들의 뒤를 따를 것을 다짐하면서 관직에 나갔다. 그리고 또 품격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선현들이 했던 직언을 그대로 이어가면서 사신들에게 다가오는 불이익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전통을 이어나갔다
원로가 원로의 구실을 하고, 지식인들의 참 목소리가 울려야 역사는 옳은 방향으로 발전해 간다. 그것은 돈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성한다고 되는 일은 더욱 아니다. 오직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살피고 그 정체성ㅇ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꿈으로 심어 주고서만 가능한 일이다.
예(禮)로써 가르치면 나라가 평온해지고,
법(지식)으로써 가르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이미 5백여 년 전에 제시된 이 치도(治道)의 핵심이 오늘날 우리의 반쪽자리 삶을 바로잡는 지침이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반쪽짜리 삶에서 벗어나 온쪽짜리 삶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도 깃들어 있다.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을 뒤지면서 사료를 챙겨준 송정은의 노고가 그지없이 고맙고, 또 여러 차례 중단의 위기를 잘 수습하게 해 준 청아출판사 편집부의 조언도 새삼 고맙기만 하다.
2010년 3·1절 아침
艸堂 辛 奉 承
지은이 신봉승
1933년 강릉 출생. 강릉사범,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현대문학」에 시·문학평론을 추천받아 문단에 나왔다. 한양대·동국대·경희대 강사,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 대종상·청룡상 심사위원장, 공연윤리위원회 부위원장, 1999년 강원국제관광EXPO 총감독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추계영상문예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방송대상, 대종상, 청룡상, 아시아영화제 각본상, 한국펜문학상, 서울시문화상, 위암 장지연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하였고,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저서로는『대하소설 조선왕조 5백년』(전 48권), 『소설 한명회』(전 7권), 『이동인의 나라』등의 역사소설과 역사에세이『양식과 오만』,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역사 그리고 도전』(전 3권), 『직언』, 『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 『일본을 답하다』 등과 시집 『초당동 소나무 떼』, 『초당동 아라리』외 『TV드라마 · 시나리오창작의 길라잡이』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