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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리
본래 마전군 화진면의 지역으로 흙빛이 누렇다 하여 ‘황지리' 또는 ‘황지대리'라 하였는데, 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문리를 병합하여 군남면에 편입되었다. 945년 해방 이후 38선 북쪽 지역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954년 1월 7일「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개 리, 5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계골[金鷄谷], 음지말 : 양지말 동쪽에 있던 마을. 골짜기 안에 있는 산의 형태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현재 그 명혈에는 강릉 김씨의 묘가 있으며, 한국전쟁 전에는 개성 왕씨(開城王氏)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달안이[達遠里] : 빗접산 동쪽에 있던 골짜기 마을. ‘윗달안이'와 ‘아랫달안이'로 나뉜다. ‘달'의 원래 음은 ‘'로 불리웠었는데, 차츰 ‘달'로 음이 옮겨가 안쪽의 뜻을 가진 ‘안'과 합쳐져서 ‘달안[野內]'과 화진벌로 되었다가, ‘안'이 앞 음절 ‘ㄹ'을 옮겨받으며 ‘다라니' 또는 ‘달안이'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은대리 가사평을 기준으로 하여 ‘넓은 들에서 안쪽에 위치한 산골짜기 마을'이란 뜻을 지닌 땅이름이다.
◇마탄동(馬灘洞) : 양지말 남쪽에 있던 마을. 임진강에 있는 말여울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한국전쟁 전에는 청풍 김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새점[新店] : 오소리등 동쪽에 있던 마을. 일제강점기 때 요업(窯業)이 번창했던 곳이다.
◇석문동(石門洞) : 황지리 동남쪽의 322번 지방도 옆에 있는 마을. 장진천변에 펼쳐져 있는 현무암 절벽이 문과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구석동'으로도 불리운다.
◇양지말 : 마탄동 북쪽에 있던 마을. 음지말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오리골[吾柳洞] : 마산 동쪽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고성 이씨(固城李氏)*함창 김씨(咸昌金氏)*반남 박씨(潘南朴氏)*전주 이씨가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가리상골 : 오리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가마소 : 말여울 북쪽에 있는 소.
개미골 : 금계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관낭 : 황지리 서쪽, 임진강의 현무암 석벽. 황지리*남계리에 넓게 펼쳐져 있는 화진벌이 경지 정리되면서 이 곳에 농업용수를 퍼 올리는 양수장을 설치하여 붙은 이름이다.
기와골고개 : 마탄동에서 화진벌로 나오는 고개.
기탄(햜灘) : 가마소 옆에 있는 여울. 임진강의 물이 이 곳에 이르면 강 가운데 퇴적되어 있는 모래섬으로 인하여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긴등 : 빗접산 동북쪽에 있는 긴 산등.
능골 : 새점 북쪽에 있는 골짜기. 김씨의 큰 묘가 있다고 한다.
도깨비여울 : 가마소 북쪽에 있는 임진강 여울.
도당골 : 이러니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도당이 있었다 하며 ‘작은도당골'과 ‘도당골'로 나뉜다.
동글봉 : 구석동 북쪽에 있는 동그란 봉우리.
등골[藤谷] : 무쇠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원래 산을 뜻하는 고어 ‘둠‘과 ‘골'이 합하여 단순히 ‘산골짜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던 것이, ‘ㅁ'이 ‘ㄱ'에 동화되는 자음동화로 ‘등골'로 발음되어 쓰이다가 한자로 음차하면서 ‘등곡(藤谷)'이 된 곳이다.
마구리약물 : 무쇠봉 북쪽 산비탈에 있는 약수.
마산(馬山) : 마탄동 남쪽에 있는 갈마음수형의 산.
말여울[馬灘] : 관낭 북쪽에 있는 임진강 여울. 지형이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망두골 : 등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무쇠봉 : 가마소 북쪽, 임진강 옆에 있는 봉우리. 높이 34m. 우리 지명에는 ‘무쇠'*‘무시'*‘무수'가 들어가 있는 것이 많이 나타나 있는데, 모두가 강이나 내를 끼고 있어 물과 관련을 가지는 공통점이 있다. 물은 원래 ‘'*‘'*‘뭇'*‘믓' 등으로 발음되어 왔다. 그 한 예인 무쇠는 ‘믓'에 뿌리를 두고 음의 변화를 거치며 ‘무쇠'로 굳어지게 된다. 믓 > 뭇 > 무스 > 무수 > 무쇠 + 봉. 따라서 무쇠봉은 임진강 옆에 있는 봉우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뱃터거리모퉁이 : 마탄동에서 임진강 나루로 가기 전에 있는 모퉁이. 예전에는 이 곳에 있던 나루를 이용하여 미산면 마전리와 왕래하였다 한다.
빗접산 : 요골 북쪽의 긴등에 딸린 산. 이 곳의 모양이 미녀가 머리를 풀고 앉아 머리를 빗는 형국인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한탄강 건너 전곡읍 고능리 국사봉은 미녀가 마주 대하고 앉아 치장할 때 보는 거울과 같다 하여 ‘면경산(面鏡山)'으로도 불리워지고 있으나, 미녀가 풀어 놓은 비녀에 해당하는 명혈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서낭고개 : 등골에서 왕림리 안골로 넘어다니는 고개. 고개에 성황당이 있었다.
쇠골고개 : 등골에서 새점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쇠골 : 능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일제강점기 때 철광을 개발하였으나 운반 여건이 좋지 않아 폐광이 된 곳이다.
수사막골고개, 송낙골 : 오리골에서 금계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오리골고개 : 마탄동에서 오리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벼락재고개'라고도 한다.
오소리등 : 달안이 남쪽에 있는 산등으로 오소리 형상이라 한다.
요골 : 화진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골짜기.
이러니골 : 등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장진낭[휏津崖] : 구석동 동쪽, 장진천변에 펼쳐진 높은 현무암 절벽.
회가마골 : 오소리등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숯[灰]을 구웠던 곳이라 한다.
옥계리
본래 연천현 남면 지역으로 옥녀봉 밑에 옥같이 맑은 냇물이 흐르는 곳이라 하여 옥계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전리를 병합하여 군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45년 해방 후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3개의 행정리, 17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암밭골[榛田里] : 아전비 남쪽에 있던 마을. 옛날에 개암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관말[官村] : 중간말 북쪽에 있던 마을. 고려 말 연주현의 관아가 위치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주변에서 많은 와편이 발견된다.
◇독짓골, 탁거리 : 장거리 남쪽에 있는 마을.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이 골짜기에서 옹기를 구웠다 하여 독짓골이 되었다 하나 확인할 수 없다. 또한 고려 때에는 이 곳에 있던 주막에서 막걸리를 팔았다 하여 ‘탁거리'로도 불린다.
◇미래 : 연천아전비 북쪽에 있는 마을. 궁예가 세운 태봉국이 철원에 있었을 때 이 곳까지 조수가 들어와 수운을 이용하려 했으나, 전방에 조그만 언덕이 가로막혀 있어 통행이 어려웠다. 이때 여러 명이 힘을 모아 배를 밀며 언덕을 넘어다녔다 하여 ‘밀어고개'로 불리우다가 차츰 ‘미래고개'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 미래 마을에는 400년 전에 정착한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산다.
◇새말[新垈洞] : 작은밤골 입구에 있는, 한국전쟁 이후 새로 생긴 마을.
◇옥계역터[玉溪驛址] : 미래 마을에 있던 옥계역의 터로서 지금은 마을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중앙 관청의 공문을 지방 관청에 전달하며 외국 사신의 왕래와 관리의 여행 또는, 부임 때 마필을 공급하던 역참이 있었다. 남쪽은 장단도호부의 백령역에서 서울로, 북쪽은 철원도호부의 용담역(龍潭驛)을 거쳐 함경도 노선으로 이어졌다. 『여지도서』 연천현 역원조에 의하면 백령역· 옥계역·용담역은 고려시대에도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일제 강점 후 철도와 통신의 발달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옥계역이 자리했 던 이 곳 역시 옛 역사(驛舍)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고 민가만 들어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온수골[溫水洞] : 옥녀봉 남쪽 임진강변의 골짜기이자 마을. 예로부터 피부병에 효 험이 있는 온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만병 통치의 효력으로 소문이 널리 퍼져 사방에서 문둥병 환자들이 모여 들면서 물을 더럽히고 걸식하며 주민들을 괴롭히자, 마침 이 곳을 지나가던 어떤 도승이 부적을 돌에 싸서 물에 던져 넣자 온수가 끊어졌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에는 연주현씨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윗말[上洞] : 관말 서쪽에 있던 마을. 중간말을 기준으로 할 때 위쪽에 위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간말 : 장거리 서쪽, 중간에 있던 마을. 현재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광대봉 : 미래 동쪽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이 마을에 살던 광대가 정상에 있는 두봉우리에 줄을 매고 놀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군수맥이고개 : 작은밤골에서 중면 합수리의 능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예전에 군대가 주둔하던 군막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귀골[耳谷洞] : 광대봉 아래에 있는, 사람의 귀처럼 생긴 골짜기.
긴등 : 청화산에서 군자산으로 이어지는 산등. 연천읍 현가리와 경계가 된다.
노루메기고개[獐項] : 장거리 동쪽에 있는 고개.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겨서 ‘노루메기'로 불렀다고 전해 오나, 원래의 정확한 뜻은, ‘넓음' 또는 ‘늘어진'의 의미인 ‘너르'와 ‘목'의 모음동화 현상인 ‘메기'가 합쳐져 ‘너르메기'로 불리우던 것이 ‘노루목'으로 점차 굳어지면서 한자로 음차되는 과정에서 ‘노루목'이 된 곳이다. 실제로 이 곳의 지형은 긴등에서 내려온 산 끝자락이 넓게 늘어진 목처럼 되어 있어 노루[獐]와는 무관한 것 임을 알 수 있다.
동지미산 : 매봉 아래에 있는 산. 두꺼비처럼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말가죽대기 : 아전비 남쪽에 있는 밭. 병자호란 당시 청의 군사들이 식량이 떨 어져 말을 잡아 먹었던 곳이라고 한다.
망근도리밭 : 매화봉 동쪽에 있는 망건처럼 생긴 밭.
매봉 : 마정승 묘 뒤에 있는 산. 예전에 이 곳에서 매 사냥을 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매화봉(梅花峰) : 관말 북쪽에 있는 산봉우리. 매화꽃 형상이라 한다.
맨두리 : 매화봉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세 줄기의 산자락. 활짝 핀 매화꽃 형국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백고개[城峴, 百人峴] : 잣골에서 중면 삼곶리의 논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옥녀봉 산성의 밑으로 다니는 고개라 하여 성의 고어인 ‘잣‘에서 뜻을 따와 ‘잣고개'라 하였으나,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는 과정에서 ‘잣‘을 ‘잣 백(栢)'으로 오기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또한 이 고개가 높고 험하여 대낮에도 산짐승과 도둑이 많아 백 사람이 모여야 넘어다녔다 하여 ‘백고개'라 부르기도 했다.
사당골[祠堂谷] : 정자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고려시대 연주현에 딸린 사당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상상재 : 옥계에서 온수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지형이 높고 가파르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고려시대 연주현 당시 이 고갯마루가 죄인들을 처형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샘고개 : 옥계리와 연천읍 읍내리 사이에 있는 고개. 샘이 있었다 한다.
선반밭 : 매화봉 북쪽에 있는 선반처럼 생긴 밭.
소리개고개, 솔개미고개 : 투미골 북쪽에 있는 고개. 골짜기 안에 솔개 형국의 명당이 있으나 그 혈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중면 삼곶리와 합수리로 넘어가는 포장도로가 나 있다.
숯돌봉 : 샘고개 북쪽에 있는 봉우리. 연천읍 현가리와 경계가 된다.
아지봉(阿只峰) : 샘고개 남쪽, 옥계리*선곡리*연천읍 읍내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
열두마지기논 : 정자골 옆에 있는 열두 마지기 넓이의 논.
태봉(胎峰) : 작은밤골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궁실에서 태를 봉했던 곳이었으나, 1926년경에 도굴되어 현재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옥계천(玉溪川) : 연천읍 상리의 재궁동에서 발원하여 임진강으로 합류하는 옥계리 중앙의 긴 개울.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녀봉(玉女峰), 배꼽봉, 성산(城山) : 잣골 북쪽에 있는 산. 높이 205m. 중면 삼곶리의 경계가 된다. 삭녕에서 연천 북쪽으로 내려오던 산맥이 연천읍 상리에 있는 솟을봉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는데, 좌측으로 내려온 산맥은 남자의 정기라 하여 가장 높은 봉우리를 군자산이라 하였고, 우측 산맥의 최고봉인 이 봉우리를 여자로 의인화하여 옥녀봉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또한 이 곳의 빼어난 경치 때문에 선녀가 놀았다 하여 ‘옥녀봉'이 되었다고도 하며, 산의 모양이 배꼽과 닮았다 하여 ‘배꼽봉'으로도 불리운다. 이 산은 고려시대 연주현의 진산이 되었고, 지정학적인 중요성으로 인하여 삼국 초기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이다. 현재 산 정상에는 산성의 유지와 우물이 남아 있다.
인성골[仁聖洞] : 청화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작은밤골 : 매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잣골[城谷] : 중간말 서쪽에 있는 큰 골짜기. 옥녀봉 정상에 있는 산성의 아래에 있다 하여 성의 고어 ‘잣‘에서 음을 빌어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청풍 김씨(淸風金氏)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던 곳이다.
장거리(場巨里) : 미래 남쪽에 있는 사거리. 고려시대 연주현 당시 큰 장이 형성되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정자골[亭子谷] : 상상재 동쪽, 큰 느티나무 고목이 있던 골짜기. 일제강점기 때 이 곳에 300여 년이나 된 정자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속으로 큰 구렁이가 들어가자 이를 본 마을 청년이 불을 질러 나무가 타 죽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에는 강(康)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청화산(淸華山) : 인성골 동쪽에 있는 연천읍 현가리와 경계에 있는 산.
투미골[鬪美洞] : 매화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고려시대 연주현 당시 관기들이 살던 곳으로 당시 부근에 살던 호색가들이 미색을 탐하여 싸웠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그 때에는 “ 미색을 취하려면 그리가라”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다.
선곡리
본래 연천현 남면의 갈묘리 지역인데, 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선유동과 세곡동을 병합하여 선곡리라 하고 군남면에 편입되었다. 945년 해방이 되면서 38선 북쪽 지역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954년 11월 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개의 행정리, 6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니골[細谷洞] : 요골 남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한국전쟁 전에는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마을을 이루며 살던 곳이었다.
◇갈묘동(葛墓洞) : 눈고개 남쪽에 있던 마을. 고려시대에 갈씨의 묘가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한국전쟁 전에는 밀양 박씨 5호가 마을을 이루고 살던 곳이다.
◇개무더미[犬墓洞] : 뱀바리 동쪽에 있는 선곡리 중심 마을. 임진왜란(혹은 병자호란이라고도 함) 당시 부근의 전투에서 전사한 적군의 시체를 이 곳에 모아 큰 돌무덤을 만들었는데 당시에는 왜를 ‘개'로 비유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큰 동산 같던 이 무덤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수복 후 이 곳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완전히 멸실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뱀바리[蛇足洞] : 원등산 북쪽에 있는 마을. 옥녀봉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이 곳에 이르러 뱀의 발처럼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한국전쟁 전에는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20여 호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선유동(仙遊洞) : 먹음구렁 북쪽에 있던 마을. 전설에 의하면 군자산에서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며 노닐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군자산(君子山) : 선곡리*삼거리*연천읍 차탄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27.8m.
긴골 : 가니골 남쪽에 있는 긴 골짜기.
깃대봉 : 돼지물꾸럼 남쪽, 삼거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높이 81m.
눈고개 : 선유동에서 갈묘동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나직한'*‘늘어진'*‘이어진'의 뜻을 가진 고어 ‘늣'이나 ‘늠(느름)'이 ‘눈'으로 음이 변하여 불리는 이름으로, ‘나지막하게 늘어진 고개'의 뜻을 가진듯 하다.
당고개 : 갈묘동에서 삼거리 당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고갯마루에 서낭당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돼지물꾸럼 : 갈묘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멧돼지들이 먹던 우물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뒷동산 : 개무더미 마을 뒤에 있는 산.
말무덤 : 뱀바리 북쪽, 산 정상에 있는 무덤.
먹음구렁 : 선유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을 많이 해쳤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며치골 : 아지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연천읍 읍내리로 넘어다니던 큰 고개이다. 군자산과 아지봉의 두 봉우리에서 뜻을 따온 ‘뫼'와 고개를 의미하는 ‘치(峙)'가 합하여 ‘산 사이의 고개'라는 ‘뫼치'로 불리워지던 것이 지금의 ‘며치'로 음이 변하고 뒤에 ‘골'이 붙여진 이름이다.
솔너머등 : 뱀바리 서쪽에 있는 산등. 한국전쟁 전까지도 소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수로다리 : 뱀바리 동쪽의 옥계천에 있는 콘크리트 다리. 임진강에서 퍼 올린 농업용수가 이 곳으로 지나간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아지봉(阿只峰) : 군자산 북쪽에 있는 봉우리. 옥계리*연천읍 차탄리의 경계가 된다.
안골 : 임진강변에 있는 골짜기. 뱀바리 마을 북쪽 골짜기 안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골고개① : 뱀바리에서 안골로 넘어가는 고개.
안골고개② : 선유동에서 삼거리의 안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애미터골 : 군자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
양천이들[兩川坪] : 원등산 동쪽에 있는 들판. 임진강과 옥계천 두 물이 합류하는 곳에 들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오징어밭 : 뱀바리 남쪽에 있는 밭. 오장이라는 사람이 경작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차츰 오징어로 어휘가 변하였다고 한다.
왕자봉(王子峰) : 선유동 안골고개 서쪽, 삼거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높이 257m.
요골 : 개무더미 남쪽에 있는 골짜기.
용바위 : 뱀바리 서쪽, 임진강변에 있는 바위. 선곡리 마을에는 가뭄이 심하게 들 때 이 바위에서 물을 떠와 자기 집 장독을 씻으면 비가 온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작은다리 : 큰다리 남쪽, 324번 지방도에 있는 다리.
조개못 : 임진강변에 있는 큰 연못. 예전부터 큰 민물조개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라 한다. 지금은 조개못 옆에 골재 채취장이 들어서 있어 점점 매몰되어 가고 있는 상태이다.
지내끝 : 뱀바리 동쪽에 있는 산부리. 지내 모양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창말등 : 원등산 북쪽에 있는 산등.
큰다리 : 324번 지방도에 있는 콘크리트 다리.
호랑봉 : 갈묘동 북쪽에 있는 호랑이처럼 생긴 봉우리.
남계리
본래 마전군 화진면 지역으로 조선 중엽 ‘남계(楠溪)'라는 호를 가진 영동 이씨의 묘가 있다 하여 남계리라 하였는데,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도감포리와 음대포리로 분할되었고, 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분할되었던 2개 리를 병합하여 다시 남계리라 하였다. 945년 해방 이후 38선 북쪽 지역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954년 1월 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0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림동 : 도감포 북쪽, 임진강 옆에 있던 마을.
◇단풍동(丹楓洞) : 도감포 북쪽에 있는 마을. 한국전쟁 전까지도 단풍나무 고목 세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도감포[都監浦, 陶哥湄, 陶家湄, 甕岩灘] : 남계리 남쪽,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하는 곳에 있던 포구 마을. 옛 지리지나 여러 기행문에는, 이곳 합수머리에서 임진강을 따라 전곡읍 마포리 지역에 넓게 펼쳐진 꽃답벌과 미산면 동이리 썩은소 앞의 강폭이 좁아지는 지점까지의 지형이 항아리의 형태와 닮았다 하여 ‘독안이[壺內]' 또는 ‘호구협(壺口峽)'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항아리와 닮았다고 하는 지형 안에 있는 도감포의 원래 의미는 ‘항아리 형태의 지형 안에 있는 포구'란 뜻으로, ‘독안개[壺內浦]'또는 ‘독안이'로 불리던 것이 ‘도감'*‘독암'으로 음이 변하여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는 과정에서 ‘도감포' 외에 여러 한자 명칭으로 표현되었다. 이 곳은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임진강을 따라 올라온 새우젓*소금 배들이 정박하며 연천 지역에서 생산되었던 곡물*땔감*도자기 등을 물물교환하던 큰 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전에는 제주 고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벌말[坪村] : 어산 동남쪽에 있는 남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 한국전쟁 전에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곳이다.
◇신복동 : 단풍동 북쪽에 있는 마을. 한국전쟁 이후 수복이 되면서 새로 형성되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포촌음터[浦村隱垈, 音垈浦里] : 동매기등 동쪽, 한탄강 언덕 위에 있던 마을. 전곡읍 은대리의 음터와 인접한 포구 마을이 되어 지어진 이름으로, 『광무읍지』 마전조에는 음터의 발음대로 ‘음대포리'로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 전에 큰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나 수복 후 경지를 정리하여 지금은 농경지로 변해 있다.
동매기등 : 정가니골짜기 남쪽에 있는 등성이. 지금은 벽돌공장이 들어서 있다.
밤여울[栗灘] : 계림동 서쪽에 있는 임진강에 있는 큰 여울.
빨래나드리 : 동매기등 아래에 있는 한탄강 나루터. 예전에 빨래를 했던 곳이며 전곡읍 고능리로 연결된다.
어산(魚山) : 큰웅댕이 옆에 있는 산. 높이 70m. 산의 모양이 물고기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어씨(魚氏)의 묘가 있다 해서 ‘어산'으로도 불리운다고 한다.
정가니골짜기 : 태안개울 옆에 있는 작은 골짜기.
주란마루 : 어산 남쪽에 있는 긴 둔덕.
중턱굴 : 계림동 북쪽, 임진강 석벽 중간에 있는 자연굴. 그 깊이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진밭고리 : 신복동 북쪽, 남계리 중앙에 있는 밭. 땅이 몹시 질어 곡식이 자라지 못해 피를 많이 심었던 곳이었으나, 화진벌이 경지 정리되면서 지금은 옥답으로 변해 있다.
큰웅댕이 : 남계리와 황지리 경계인 332번 지방도 아래에 있는 웅덩이.
태안개울 : 벌말에서 한탄강으로 흐르는 개울.
화진벌[禾津坪] : 남계리와 황지리에 펼쳐져 있는 넓은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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