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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P 3 (6100m 오전7시 정상을 향해 출발
Camp3 도착한 것은 오후6시경 하산 시간이 7시간 정도 내려온 것 같았다. 주변에 사람들은 심한 눈보라에 텐트 안에 들어가 보이질 않는다, 아무도 반겨줄 사람 없는 텐트로 가야 하나 문득 아침에 진주(경남지부) 한국산악회 회원들에게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한 유일한 한국 원정대가 생각이 났다, 내가 비쉬켁에서 오쉬로 국내선 항공편으로 도착 당시 마주친 6명의 한국산악회 회원과 백승윤 이라는 25세의 젊은 청년 혼자 등반 하겠다고 온 친구들을 만나서 어디 가냐고 물었을 때 레닌봉 간다는 말에 매우 반가웠고 혼자만이 그곳에 도착하면 엄청 외로웠을 것 이다. 나는 내심 인천에서 출발 당시 비행기에 탑승하여 배낭을 맨 사람과 등산복 차림을 한 사람이 없나 유심 보기도 했지만 산에 가는 팀은 보이지 않아 무척 쓸쓸해 했었다. 그런데 오쉬 공항에 도착하여 한국사람을 만났고 또한 레닌봉으로 간다니 너무도 반갑고 기뻤다. 진주 한국산악회 회원 중 1명은 여성이며, 나보다 연배인 것 같았다. 그분 이름은 박계자였고 6천미터급 등정 경험이 있다 하였으며, 그곳에서도 고소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외모로 보아서는 5천 미터도 못 오를 것 같이 보였는데, 알고 보면 대단한 여성임에 틀림 없다.
6500m 지점 부근 정상족으로 사진 촬영
심한 눈보라와 고소에 시달리고 초췌한 모습으로 C3 도착 당시 나는 누군가 기다려 주는 사람이 필요했고 예기도 하고 싶었다. 심한 바람과 눈보라 그리고 화이트 아웃의 날씨에 무사히 캠프로 귀환하게 된 것이 너무도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말을 안하고는 견딜 수 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사고가 있을 것으로 예측했을 것 같아 안부도 전할 겸 한산텐트에 갔을 때 박계자씨 혼자 있었으며, 일행 중 한 사람이 고소적응이 안되어 아침에 camp2(5400m)로 하산하고 회복되면 다시 올라 온다고 모두 내려갔다고 했다. 하지만 박계자씨는 굳이 Camp2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기 힘들어 텐트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나를 다시 보는 순간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무척 염려한 표정 이였으며, 박계자씨는 나를 걱정하여 그곳 현지 가이드에게 한국사람 1사람이 정상에 올라가 있다고 어떻게 구조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상황에 어떤 누가 구조하러 올 수 있을까 아마도 현지 유능한 가이드라 해도 텐트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질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정상 오르기 전전날 꿈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님을 보았다, 어머님은 병석에 누워 있었고 형수님이 그 곁을 지키며 병 수발을 들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깨는 순간 분명 조심하라는 어머님의 걱정이 나에게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뭔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고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사람은 온통 죽는 사람 꿈만 꾸었다고 하고, 내가 등정 할 때 알프스에서 사망소식도 들어 걱정을 엄청 했다 한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내가 아직 운명이 그곳에서 끝날 것이라 생가 해 본적도 없으며 그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바로 그것이 운명인 것이다.
CAMP 3 방향으로 촬영
그간 내가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 하였기 때문에 아직 너무도 할 일이 많으며, 나와 가까운 지인 들에게도 배 풀지도 못하였고 후배들과 아름다운 추억도 아직 갖지 못하였기에 구 소련의 레닌과 마주 하기엔 아직 이른 것 같다
빙하지대 및 Camp 1 까지 보인다.
내 생일은 음력으로 8월3일(양력9월경) 이다. 내가 등정 실패한 날은 양력으로 8월2일이다. 오래 전 설악산 마등령에서 공룡을 거쳐 희운각에서 설악동으로 하산하는 등산코스를 간 적이 있다. 당시 공룡능선 길이 지금처럼 선명하지 않았고 자칫 엉뚱한 길로 가기 일 수였다, 그날도 길을 잘 못 들어 그만 수렴동 계곡으로 들어 섰는데 그날 비가 오후에 장대같이 쏟아져 전 설악산구간 통제되었고 수렴동 계곡 길은 강물처럼 넘쳐 하산 할 수 없어 산을 넘고 넘어 길고도 긴 수렴동 계곡 길을 내려와 수렴산장에 도달했을 때 산장 주인이 나를 보며, “어찌 이 빗속에 내려 왔노”, 하며, 당신 생일잔치는 오늘 날 자에 두번 해 먹어야 한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8월2일은 그날처럼 또 생일 잔치를 해 먹으면 일년에 3번 잔치 해야 하는데 일생에 3번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날씨는 갑자기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디
박계자씨는 내게 뜨겁지는 않지만 찬물이라도 먹으라고 내게 물을 권하고 나는 거푸 두 잔을 마시고 내가 마지막으로 내려오는 가이드를 만나 그들과 함께 내려와 무사히 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내 모습이 너무도 엉망이라 손 수건을 건 내며 얼굴을 닦으라 한다, 아마도 얼굴에는 콧물이 주변으로 얼어 붙어 있어 몰골이 말이 아니고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살아온 얼굴이라 더욱 초췌해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안부를 전하고 텐트에 들어가는 순간 아이젠을 벋지도 못하고 그냥 얼마간 쓸어져 있었다, 한참을 지나도록 텐트 바깥은 바람소리와 눈이 엄청 쏟아 붙고 있었으며,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녹여 물을 끌이기 시작한 후 10리터를 20여분 걸려 끊인 후 수통에 담아 침낭 속으로 밀어 넣고 나도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나는 정상등정 전날 내가 가지고 있는 식량은 고작 전투식량(물을 끊여 부으면 10분 정도 기다리면 밥이 불고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는 간편식품)3봉 그리고, 쵸크렛, 사탕, 에너지 바 4개가 전부다, 베이스캠프부터 C1, C2, C3까지 오르면서 거의 전투식량만 먹다 보니 역겨워지기 시작해 좀처럼 먹기 싫었다. 정상 등정 전날 한국산악회 회원들에게 라면을 얻어 볼까 생각을 했다, 2개만 얻으면 아침에 한 개를 먹고 정상에 다녀와서 오후 저녁에 한 개를 또 먹으면 다음날 C1으로 내려가면 끝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새벽에 텐트 앞에 가서 말 꺼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도 염치불구하고 1개를 구걸 했을 때 흔쾌히 주었으며, 정상등정 아침에 라면 한 개를 맛있게 다 먹고 남은 국물에 전날 3숟가락 뜨고 던져놓은 전투식량도 끊여서 다 먹었다, 왠지 그날 아침은 평지에서처럼 식욕이 돋아 배불리 먹은 게 이해가 되 질 않았다.
C3에서 C2로 하산하는 날 깊은 잠에서 깨어나 전날 라면 먹은 기억이나 또 한번 박계자씨에게 라면을 부탁 했고 흔쾌히 라면을 주어 코펠에 보글보글 끌인 라면국물을 세 숟가락 먹고 라면건더기 2번 정도 먹었는데(라면이 운송과정에 부스러져 젖 가락이 필요 없다) 왠 일인지 도저히 속에서 받지 않아 모두 눈 속에 파 묻어 버렸다. 역시 고산에서 인스턴트 식품은 먹을 수 없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인데 어찌 정상 가는 날 아침은 그리 맛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새벽에까지 눈보라는 엄청 불어 발목 정강이 까지 눈이 쌓여 아침에 하산을 어디로 해야 할지 전망을 보니 아무도 걸어간 흔적이 없다, 텐트 속에서 계속 기다리다 오전7시쯤 눈 발이 잦아들고 바람도 별도 없고 텐트 바깥에서 사람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가이드들이 하나 둘 자기 고객들을 데리고 하산하기 시작한다, 잽싸게 배낭을 챙기고, 그 동안 감사했고 본국에 돌아가면 꼭 한번 진주에 놀러 가겠다는 말을 박계자님에게 남기고 가이드와 일행들이 러셀하며 간 길로 하산을 시작하였고 가파른 픽스로프 구간을 지나 하산 중에 문득 내가 C3 올라오는 날 여러 명의 가이드가 시신을 고어텍스 자켓으로 둘둘 말아 자일로 여러 곳을 동여 맨 시신 한구를 끌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인생이 참으로 알 수 없다, 누구는 시신이 되어 끌려 내려가고 누군가는 또 그 곳을 오르려고 안간힘을 다해 허덕거리며 오르고, 과연 인생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도전이란 무언가, 높은 저 산은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무언가 찾기 위해 가는가, 무엇을 얻으려 가는가, 그 행위가 실패하면 허망 하다 할 수 있는가. “하지만 알 수 없다,” 그 져 산이 좋다… 그 져 그 뿐인걸 그래도 좋다. 바로 내가 즐거워야 했다. 즐겁지 않은 것은 무의미하다, 산은 내게 즐거움의 대상이지 도전이나 정복의 대상은 아니다. 이번 원정은 고독했고 즐거움이 없는 그 져 산에 오르는 게 다였다. 이는 준비부족, 계획부족, 정보 부족으로 결국 큰 의미를 얻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 했다.
camp2로 하산
단숨에 C3에서 C2를 거쳐 C1까지 내려왔다. 내려오는 도중에 너무 더워 파카점퍼를 벋어 잡 주머니에 넣고 바지도 벋어 정리하던 중 그만 빙하 아래로 대굴대굴 떨어지고 말았다.나의 소중했던 우모 복은 몇 년 전에 종로에서 구입해 빙벽 철 늘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던 옷이라 정이 많이 가는 점퍼인데 이제 저놈마저도 날 떠나 버렸다….
camp3 하산기전
C1(4300m)
도착하여 소고기를 떡 갈비처럼 만든 저녁을 한 접시 먹고 텐트에 모처럼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이 텐트는 내가 혼자 사용할 수 없다, 늘 다른 외국인과 같이 함께 사용하는 2인1조 텐트이다. 내가 C1에 도착 후 하루는 혼자 넓게 사용했지만 다음날 곧 바로 네널란드 사람인 스와츠와 같이 2일을 보냈는데 스왔츠는 몇 년전에 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가 이번에 다시 왔다고 한다. 나이는 50세 이고 키는 190cm정도 되어 보이는데 나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스왔츠는 나에게 C2까지 같이 안자일 하고 가고 싶은 눈치였는데 내가 별로 호응을 안하고 언어소통이 자유롭지도 못하여 늘 텐트에서 과묵하게 있었는데 C2로 가기 전날 저녁에 다이닝 룸에서 식사하는 중 이였다, 스왔츠는 박군에게 통역을 부탁하여 내가 같이 줄 묶고 가자고 한다, 그래서 알았다고 했더니 스왔츠는 엄청 기뻐하며 나에게로 다가와 하이 파이브를 하자고 손을 번쩍 들어 마주친다, 저놈이 뭐 그리 좋아하지….생각 컨데 가이드를 쓰면 돈이 들어 가지만 나와 같이 하면 돈이 절약되니 아마도 그래서 저놈이 반가워 하는 것 같다. 그러던 중 또 한 명이 박군(케나다에5년거주 영어잘함)에게” DO you speak English” 하고 다가와 줄 묶고 갈 사람을 찾는다 한다. 그는 프랑스 출신으로 나이는 50세이고 키는 나보다 작아 보였으며, 다리 종아리를 봐선 워킹을 엄청 하는 것 같아 보였으며, 팔뚝을 보니 전환 근이 그리 잘 발달되어 보이지 않아 전문적인 등반가는 아니라 판단 되였다, 우연히 세 명이 같이 묶고 가게 되었지만 나는 혼자 가고 싶다고 통역 하라고 예기했다. 하지만 상황이 어떤 곳 인지 파악이 안돼 그냥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camp2로 올라가는 산악인들
C1까지는 3끼 식사가 제공되며, 이곳까지는 말이 주로 운송하므로 대체로 무거운 짐이 쉽게 올라오며, 식사 시간은 아침 8:00 ~9:00, 점심 13: ~14:00, 저녁은 20:00~21:00 새벽 3:00~4:00 간단한 죽이 제공된다.
5200m지점 고소적응차 앞산에 오름(영상)
새벽 3시에 텐트에서 스왔츠가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얼마간 있다 텐트로 들어오더니 주방이 닫혀 있다고 한다. 그럼 아침 죽도 못 먹고 가야 하는데. 할 수 없이 주방을 들어가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이고 물만 끊여서 각자 수통에 담아가기로 하고 4시쯤 출발 했다. 빙하지대를 약 2시간 정도 가야 설사면에 다다를 수 있다. 한참을 걷는데 스왔츠는 엄청 뒤 쳐 저서 따라오고, 프랑스인은 제법 잘 걷는다.
빙하지역에서 c2가는 길에
우리 세 명은 설사 면에서 아이젠,하네스,주마, 등 각자 착용하고 첫 번째 스왔츠, 두 번째 나, 세 번째 프랑스인이 안자일을 하고 오르는데 스왔츠가 문제다. 걸음이 너무 느리다, 이러다 하루 종일 갈 것 같다. 걸음도 제도로 걷지도 못하는 놈이 보온무통은 엄청 큰 것을 배낭 옆구리에 끼고 온다. 어이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프랑스인이 친구를 만났다고 그와 줄을 묶고 우리 둘만 가라고 한다. 그래 잘 되었다 싶어 내가 선두로 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역시 스왔츠가 도대체 걷지를 못한다. 정말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 5100m 통과 지점에는 어느정도 크레바스 구간도 가파른 경사지도 픽스로프 구간도 모두 끝난 것 같아 나는 스왔츠에게 지금부터는 위험한 구간이 없으니 혼자서 천천히 오라하고 자일을 넘겨주고 잽싸게 혼자 도망치듯 다라 났다. C2는 눈이 있는 곳과 눈이 없는 너덜지대 가 있으며, 너덜지대는 비탈 면이라 2인용텐트에 겨우 1사람만 사용이 가능하다. 또한 만년설 빙하에서 물이 흐르고 있어 눈을 녹여 먹지 않아도 좋은 환경 이였다. 한 낯 텐트는 여름날 해변가처럼 덥다, 나는 C2에서 2일간 머무르며 첫날은 너무 더워 팬츠만 있고 있었다. 지나가던 외국인이 웃기도 했다. C2에 구름이 끼면 춥고 해가 뜨면 덮고 5000m지점이 네팔 쪽과는 만이 다르다.
크레바스가 곳곳에 엄청나게 만네요
하산 때 마지막으로 한국산악회 진주 사람들과 해어진 곳으로 내가 C2에 대포 시켜 놓은 햇반, 짜장소스 1개를 주고 쵸크렛,사탕 등 을 모두 주고 “ 꼭 등정하세요. 본국에서 뵙시다,” 라고 하고 헤어진 곳이다. 이분들 대부분 등정 했을 것이다.
c3 하산길에 시신 수습 중인 가이드
BC(3400m)로 내려간다, 가는 길은 약 12km 하산 길에 심한 바람과 우박이 내린다, 나는 이번 원정에 고어텍스 자켓을 가져오지 못 했다, 우리 집 장롱에는 몇 벌이 있었는데 무심코 한 벌 배낭에 챙겨 넣었는데 BC에서 도착해 비가 쏟아져 고어 자켓을 꺼내 입었다, 헌데 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켓이 꽉 끼는 것 이다, 자세히 보니 마누라 자켓이다. “뭐 장비 탓 해봐야 뭔 소용 있나 맨탈이 중요하지” 하지만 철저한 준비, 계획 그리고 위험요인에 대한 대처방안 등 준비 없이 그 져 아무 생각 없이 무지한 등반을 시도한 것 아닌가 생각 해 본다.
camp 1 (4400m)
4200m고개를 넘어 긴 하산 길에 어느 순간 바람도 잦고 우박도 없어 간식을 먹으려 하는데 두 명의 꼬마 아이들이 말을 타고 온다, 나 혼자 먹기 그래서 사탕을 몇 개 주었다, 고마운지 말 뒤에 타라고 한다, “아~ 이 동네 애들은 참으로 순박하고 예의를 아는구나.” 참으로 예쁘다… “애들아 괜찮으니 그냥 가라,” 그래도 타라고 한다, “그럼 공짜로 타 볼까,” 냉큼 말 잔등에 올라탔다, 이곳은 말 타고 BC ~ C1, 편도 120달러이다,
그런데 말 뒤 편은 엉덩이 꼬리부근에 말 끈이 걸려 꼬리뼈 쪽이 엄청 아팠다.
10분도 못 가서 엉덩이 쪽이 아파 이리저리 앉자 보았지만 그도 말 매는 끈에 접촉되어 계속 아팠다. 하지만 비탈길 걸어 가는 것 보다는 조금 참고 가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뭐 공짜로 가니 별 수 없지 하는 생각으로 그래도 참고 견디었다, 얼마 가더니 12살 먹어 보이는 꼬맹이가 나에게 스틱을 달라고 한다. “허 허 “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그래 스틱도 오래 전에 구입한 거라 아깝지는 않았다. 그레서 말탄 비용으로 준다고 하니 이놈이 좋아서 악수를 하자고 한다. 그리고 또 얼마간 가다가 스틱으로 나의 빙벽화(라스포르테)를 가리키며 이것도 달라고 한다, “뭐 이놈이 환장을 했나. 말 한필 끌고 다니며 아주 팔자를 고치려 드네”… “NO” 강한 어 저로 말 했더니 이놈이 내 눈을 보면서 그럼 내 고글을 달라고 한다, “ 예~라 싸가지 없는 넘아”… 이번에도 “NO” 라고 외쳤다. 그러지 않아도 엉덩이 꼬리뼈에 살같이 다 비겨져 아파 죽을 지경인데 이놈이 고작 30분 정도 말탄 것을 가지고 돈 대신 물건으로 달라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고 기가 차다. 아무리 관광지라 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돈 맛을 아니 저놈이 장차 뭐가 뒬까 생각 하기도 싫었다.
평지에 다다르자 내리라 한다. “그래 더 이상은 나도 엉덩이 아파서 못 타겠다” 얼른 내렸다. 뭔가 아쉬운지 계속 나를 뒤 돌아다 보며 동생과 같이 살아져 갔다.
CAMP1 다이닝 룸
BC로 돌아온 나는 캠프가 썰렁하다. 내가 도착 할 때 에도 이란,이탈리아,터키 등 유럽쪽에서 엄청나 들어왔다. 하루에 6대의 버스가 들락거리고 다이닝 룸에 빈자리가 없었는데 왠지 집으로 갈 시점이 왔나 보다 싶다. 저녁 식사는 닭고기 요리가 나왔다. 이 동네 요리의 특징은 꼭 요리에 고수라는 채소(허브)를 넣어 향료로 사용 한다. 고수는 한국사람 대부분이 좋아하지 않는 향이다. 이음식에 익숙해야 이곳 캠프생활이 원활하다.
베이스캠프에서 아침식사
또한 이곳 베이스캠프는 2인 1텐트 220V 전원 각 텐트에 제공, 샤워 시설 과 싸우나 시설이 갖춰져 있고 싸우나는 별도 요금을 지불해야 하고 그 외는 무료다.
마지막 룸메이트는 아시아계 홍콩 출신의 35세와 1박 하고 헤어졌다.
배이스 캠프
저녁에 다이닝 룸에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총메니져와 가이드 들이 한 줄로 서있고 영어인지 소련어 인지 손에는 등정 기념 인증서를 들고 소개를 한다, 다이닝 룸 안에는 몇 사람 없어서 확 표가 난다. 등정한 사람은 2사람 그 중 한사람은 그 프랑스 친구이다. 그와 그 친구가 나와 같은 날 그들은 새벽3시에 출발 했고 나는 7시에 출발했으며, 내가 6700m 지점에서 마주쳤지만 얼굴을 모두 감사고 있어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도 하산 길에 백야를 맞이했고 그들 또한 GPS 어풀을 핸드폰에 깔고 가서 쉽게 찾아 하산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만감이 교차 한다. 좀 일찍 서둘렀으면 뒤 늦은 후회를 하며, 다이닝 룸을 뒤로 한 체 쓸쓸히 텐트로 들어갔다.
원정이란 아무리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함께 팀을 구성하여 가야 할 신행인 것 이다.
절대적으로 팀 산행이 요구되며, 각자의 팀원 역할도 중요한 것 이 원정이다, 6000m이상 등반은 혼자 등정하기엔 무리이며, 그렇지 못 할 경우 가이드를 이용해야 보다 더 안전할 것이다. 이번 원정에서 내 성격상 가이드는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이번 원정은 부득이 혼자 할 수 밖에 없었으며, 혼자 준비물이 너무 많고 내가 떠날 때 총 무게는 33kg 였다. 그래서 최대 BC에서 16kg를 메고 나머지 17kg는 kg당 3달러 주고 C1으로 운송해야 했고 C1에서 12kg를 메고 약5kg C2로 보냈으며(kg당 6달러 지불했음) 나머지는 대포 시켰다.(스토리지에,컨테이너보관) 평소 훈련에도 15kg였는데 고산에서 10kg가 넘으니 보통 걸어 가는게 두 배는 힘들었다
4500m 주변영상(C1 옆)
내가 이번 이번 원정에 늦긴점은 그간 많은 원정을 다닌 것은 아니지만 늘 아내는 걱정했고 그때마다 만류 했지만 결국은 나의 고집에 내 아내는 승락해 주었으며 늘 나의 영원한 후원자 이지만 나는 걱정과 심려만 주는 존재로만 살아온 것 같아 늘 미안하고 어찌 해야 집사람에게 가장으로서의 안정적인 모습으로 돌아올지 늘 고민 하곤 했다. 이제 젊을 날의 왕성함은 사라져 가고 도전 의식이 점차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앞뒤 분간을 못하는 모습에 내가 내 자신이 미울 때도 많았다.
이제는 아비로서 남편으로서 충실 해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항상 나를 바라보고 나 하나 만 믿고 의지하는 그 사람에게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이번 원정에서 내가 끝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산행에 임한 것은 모두 내 아내의 모습이 자꾸 떠 올랐고 아직 못 다한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내가 혼자 원정 떠난 것을 집에는 말 하지 않았는데 딸아이가 어떻게 알아버렸다, 집사람이 혼자 갔냐고 물어보길레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했다. 여보! 미안해요...
첫댓글 일이 바뻐서 이제서야 후기를 보았네요...
아슬아슬했던 장면.. 산 사람들의 인연과 우정...
의욕과 욕심을 이긴 명석한 순간의 판단력......
생과 삶의 우연으로 3번째 생일 경험 모두가 각본 없는 드라마네요..
좀더 많은 준비와 팀구성이 아쉬웠기에.....
하늘이 말리고 꿈에서 어머니도 걱정하고 머나먼 한국에서 아내의 꿈도에서 조차 안전하게 하산하라고
계시한것 같고 또한, 그길을 선택해서 좋은 추억, 경험, 생각을하게 된거 같아요...
게다가 남자의 살아온 인생을 되 씹을 수 있는 멋진 가장이 될 기약을 한 멋진 산행이었네요...
토욜날 못다한 얘기 듣고파요..... 바뻐서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