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사표(萬世師表) 공자 이야기 [비정상적 출생과 불우했던 어린 시절] 공자는 춘추시대인 BC 551년 노나라 곡부에서 태어났다. 퇴역한 하급 무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첫 부인이 딸만 9명을 낳는 바람에 둘째 부인을 들여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장애가 있었다. 이에 공자의 아버지는 60대에 16세의 무녀(巫女)를 셋째 부인으로 맞아 공자를 낳았다. 출신성분을 본다면 공자는 결코 성인 반열에 오를 수 없을 정도로 핸디캡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공자의 출생을 '야합이생(野合而生)'이라고 표현했다. 정상적인 혼인절차가 아닌 관계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이는 사마천이 공자를 폄하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공자가 보잘 것 없는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노력을 통해 성인이 된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자는 세 살 때 아버지가 죽자 어려서부터 목동이나 창고지기 같은 거칠고 험한 일을 하면서 곤궁하고 불우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오소야천 고다능비사) "나는 어렸을 때 천하게 자랐다. 그래서 많은 재주를 배우게 되었다." [이름에 얽힌 뒷얘기] 공자는 태어났을 때 이마가 튀어나온 짱구였는데, 그 모습이 공자 고향의 니구산(尼丘山)과 비슷하다 하여 '언덕 구(丘)'를 이름으로 썼으며, 자(字)는 둘째 아들이란 의미의 중(仲)과 니구산의 니(尼)를 따서 '중니(仲尼)'라고 했다. 공자 아들 이름은 '공리(孔鯉)'였다. 공자가 아들을 얻었을 때 노나라 제후가 축하한다며 잉어를 선물로 보내주자 공자는 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들의 이름을 '잉어 리(鯉)'를 써서 지었다. [천하를 떠돌다] 공자는 56세에 노나라에서는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왕이나 제후를 만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떠돌아 다니는 '주유천하(周遊天下)'에 나섰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그를 수행하며 힘든 유랑생활을 함께 했다. 정나라에 갔을 때 공자는 어쩌다 제자들과 헤어지게 되었는데, 제자들은 공자를 찾기 위해 한 행인에게 공자의 인상착의를 대면서 물었다. 그 행인은 "동문 옆에 비슷한 노인이 있는데, 머리는 요임금 같고 허리는 순임금 같고 가슴은 우임금 같은데, 행색은 '상가지구(喪家之狗)' 상갓집 개 같다."고 말했다. 제자들은 동문으로 가서 공자를 만났고, 행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공자에게 해주었다. 이에 공자는 "외모는 그런 훌륭한 분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상갓집 개와 같다는 표현은 맞는 말 같다."고 하면서 웃었다. 주유천하의 고달픈 상황에서 남들로부터 수모와 조롱을 당해도 너그럽게 웃어 넘긴 공자의 인간미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공자의 유랑생활은 12년 동안 계속됐지만 끝내 그를 환영하는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 [최초의 사립학교 공자학원] 공자는 68세가 되어 고국인 노나라로 돌아와 공자학원을 세우고 BC 479년 73세에 죽을 때까지 교육과 고전 문헌 정리에 전념했다. 공자학원에서는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가르침이 있을 뿐 차별은 없다는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원칙에 따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을 평민에게까지 개방했다. 공자학원은 '속수지례(束脩之禮)'라 하여 배우고 싶은 사람은 육포 한 속만 가져오면 다 받아 주었다. 육포는 당시 예물로는 가장 격이 낮은 소박한 물품이었다. 공자학원의 교육기간은 3년이었으며, 교과목은 예(禮,예절), 악(樂,음악), 서(書,서예), 사(射,활쏘기),·어(御,마차 몰기), 수(數,수리) 등 '육예(六藝)'였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교육에 치중했으며, 정서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 모두를 고려한 균형 잡힌 교육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배움을 즐기다] 發憤忘食, 樂以忘憂 (발분망식, 낙이망우) 不知老之將至 (부지노지장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밥 먹는 것도 잊고, 배움의 즐거움으로 근심 조차 잊었으며, 늙는 것도 미쳐 깨닫지 못한다." 三人行必有我師焉 (삼인행 필유아사) 擇其善者而從之 (택기선자이종지) 其不善者而改之 (기불선자이개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좋은 점은 가려서 따르고, 좋지 않은 점은 고쳐야 한다." 不恥下問 (불치하문)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공자의 호학(好學) 정신이 잘 드러나는 글귀이다. '배움'은 공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였다. 공자가 주역을 열심히 읽은 나머지 죽간을 꿰맨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데서 '위편삼절(韋編三絶)' 고사성어가 생겨났는데, 독서에 힘쓰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명분과 배려를 중시하다] 공자의 기본 사상은 그가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주나라 때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으며, 그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 '정명주의(正名主義)'이다. 君君臣臣父父子子 (군군 신신 부부 자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정명주의란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면 명분이 바르게 되고, 명분이 바르면 민심과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이다. 제자 자공이 "평생을 두고 실천할 만한 한 마디의 말이 무엇인가?" 하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기서호, 기소불욕 물시어인) “그것은 바로 서(恕)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마라.” 여기서 '서(恕)'는 다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는 관용 또는 배려의 의미이다. [사람과 삶이 먼저다] 공자는 귀신 보다 사람을 우선시 했으며, 죽음 보다 삶에 관심을 더 두었던 인본주의자였다. 敬鬼神而遠 (경귀신이원)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라." 제자인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未能事人 焉能事鬼 (미능사인 언능사귀) "사람 섬기는 것도 잘 하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느냐." 계로가 이번엔 죽음에 관해 묻자 공자가 다시 대답했다. 未知生 焉知死 (미지생 언지사) "아직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공자의 마구간에 불이 난 적이 있었는데, 공자는 제자들에게 사람이 다치지 않았는지 물었을 뿐,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傷人乎 不問馬 상인호 불문마) [안빈낙도의 생활] 공자는 청빈하고 소박한 생활을 좋아했다. 君子憂道 不憂貧 (군자우도 불우빈) "군자는 도를 걱정하지, 빈곤함을 걱정하지 않는다."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반소사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베개를 하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다. 의롭지 않은 부귀는 나에겐 뜬구름과 같다." [죽었다 살아난 공자] 공자는 춘추시대에는 제자백가의 한 명에 불과했으나 한나라 이후 유교가 통치이념으로 채택되면서 격이 높아져 청나라 초기에는 '시대를 초월하여 본받아야 할 스승'이라는 의미의 '만세사표(萬世師表)'의 존칭을 얻게 되었다. 청나라 말기부터 모택동 치하의 문화혁명 때는 만악(萬惡)의 근원인 봉건사상가로 낙인 찍히기도 했으나, 1980년대 개혁개방과 함께 재평가 작업이 시작되었고, 시진핑 시대에 들어서는 대대적으로 공자 띄우기에 나서고 있다. [마무리]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친구가 있어 멀리서 온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이 문장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인애(仁愛)로써 사람을 대하며,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충실한 삶을 살았던 공자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공자의 생애는 우리에게 누구나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공자처럼 신념을 갖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때 우리의 인생도 의미를 더할 것이다. (클래식 클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