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수록 이런 풍광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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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8세기 무렵 고대 크메르는 쩬라 국을 둘러싸고 수마트라 해협의 시비라지야(Shrivijaya)제국과
자바(인도네시아. 하지만 현재의 자바섬은 아닌듯하다)의 샤이렌드라(Shailendra)제국이 급부상하고 있어
매우 혼란한 상태였던 것이 분명하다.
신당서 新唐書에 따르면 706년 이후에
캄부자는 두개의 국가로 분열되고,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고 적혀있다. 그 기록에는
" 산과 계곡의 땅인 북부의 절반은
육진랍이라고 부르고, 바다와 호수로 덮인 남부의 절반은 수진랍으로 부른다"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내륙쩐라와 수륙쩐라 둘로 나뉘어져있던 쩐라국 가운데
해상을 끼고 있던 수륙쩐라는 강력한 힘을 지닌 자바의 왕국 샤이렌드라에 예속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앙코르 유적을 관광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씨엠립에 도착해야한다. 매일 아침 8시경이면 씨엠립은
앙코르 유적을 관광하기 위한 세계의 관광객들로 무척이나 부산스럽다. 그러기에 씨엠립 시내는
불완전 연소되는 매연가스와 자전거, 오토바이로 인해 무척 공기가 나쁘다. 그러나 인도처럼 경적소리는
내지 않아 덜 소란스럽다. 이곳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다 도심을 빠져나가면 채 1분도 안되어서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나무와 오솔길, 그리고 광활한 평야와 호수를 바라다 볼 수 있다. >
수륙 쩐라국의 마지막 왕일지도 모르는 어떤 왕의 비극적 사례가 이 곳을
자주 왕래하고 있었던 한 아라비아의 상인이 쓴 기행문을 통해서 전해졌다.
서기 916년 아부 자이드 하산(Abu Zayd Hasan)이라고 하는 상인이 기행문을 발표했는데
그는 이 기행문에서 서기 851년 이곳을 항해했던 상인인 슐라이만(Sulayman)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당시 쩐라국과 자바국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사건을 기록했다.
<앙코르 제국의 시작은 롤루스에서 시작되었다. 롤루스 유적지 그룹은 씨엠립에서 동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 곳은 앙코르 제국의 첫번째 왕인 자야바르만 2세가 도읍지로 삼은 곳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씨엠립에서 유명한 도매시장인 싸르를 지나가야하는데 새벽부터 각지에서 오는 캄보디아 사람들로 가득하다.>
당시 샤이렌드라의 왕은 마하라자(Maharaja)였는데 아마도 쩐라국에서도 나름대로
국력을 비축했다고 생각한 어떤 젊은 왕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어느날 자기의 한 신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한 소원이 있는데 그 소원은 마하라자의 목을 내 쟁반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한 신하는 간곡하게 젊은 왕의 그 소원을 말렸다. 하지만 이 젊은 왕은 계속해서
마하라자의 목을 자기 앞에다 놓고야 말겠다는 소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소문은
입에서 입을 타고, 바다를 건너 자바섬의 샤이렌드라 왕인 마하라자에게로 날아갔다.
이 말을 전해들은 마하라자는 아무도 모르게 1천척의 배와 함께 메콩강을 거슬러
크메르(당시 쩐라국의 수도는 프놈펜 근처였다.)에 상륙했다.
그러나 쩐라국은 샤이렌드라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단숨에 크메르를 정복한 마하라자는
크메르의 젊은 왕을 그의 앞에 무릎을 꿀렸다.
가엽게도 그 젊은 왕은 그가 간절하게 소원한 바가 거꾸로 되어 마하라자 왕에게 목이 짤리웠다.
마하라자는 젊은 왕의 목을 쟁반에 담아 자바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자국의 신하와 백성들에게 쩐라국 왕의 목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앞으로 크메르 왕들의 능력을 벗어나는 소망은 불행을 자초할 뿐이라는 것에 교훈을 주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시 젊은 왕의 목을 정성껏 씻어 크메르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치욕의 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역사학자 브릭스는 "젊다"라는 단서로
마히파티바르만이라고 하고, 마스페로(George Maspero)는 라젠드라바르만 1세라고 추정할 뿐이다.
<앙코르는 사라진 역사의 되짚음이다. 우리나라도 자랑스러운 삼국의 역사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여
되살아 나지 않았더라면 앙코르의 역사처럼 완전히 묻혀버릴 뻔 한 것이다.
삼국의 역사에서 빠져버린 가야에 대해 우리가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과 같이 앙코르의 역사도 그렇게 사라졌다.>
여하튼 이렇게 서기 700년경에서 800년경까지 주변국의 강세로 말미암아 고대 코메르국은 큰 곤욕을 치루었던 것 같다.
특히 우리가 앞으로 집중적으로 탐사하고자 하는 앙코르 제국의 시작은 바로 이 시점에서부터 시작됨으로
앙코르 역사의 다른 부분보다도 더 주위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후 역사의 자료가 매우 적고 중국연대기에 나온 단 몇줄에 문장에 국한된
후우난 국과 쩐라국이라고 하는 두 나라의 이야기에서 벗어난 9세기 초
자야바르만 2세(앙코르 제국의 초대 왕, 말하자면 고려의 왕건과도 같은..)의 등장으로 보다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혜성과 같이 나타나 고대 크메르를 통일한 자야바르만 2세는 누구인가?
<씨엠립 도심을 빠져나오기만 하면 바로 앙코르 대평원이 펼쳐지고, 도로는 수령 몇백년은 됨직한 나무들로
길을 이룬다. 툭툭이와 현지인들의 오토바이가 간간히 지나갈 뿐 도로는 늘 고요할 뿐이다.>
자야바르만 2세는 서기 802년부터 서기 1431년까지 약 630여년간, 서쪽으로는 태국의 동부, 북쪽으로는 라오스의 일부를,
그리고 동쪽으로는 지금의 베트남의 중부 이남 전역을 통치하였던 동남아시아 최대의
대 제국 앙코르 왕국의 초대왕이다. 그렇지만 그도 젊은 날에는 역시 매우 불행한 일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앞에서 말했던 목이 짤려진 왕과 함께 샤이렌드라 왕국으로 볼모로 잡혀가서
낯선 땅에서 고난의 10대 생활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가 고국으로 되돌아온 것은 아마도 790년 혹은 80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는 고국으로 되돌아오자 당시 크메르의 여러 나라들을 통일하고, 앙코르 왕국을 세운다.
시소폰 근처에서 발견된 스독 칵 톰(Sdok Kak Thom, 돈레샵 호수의 북동쪽 방향)비문에
"자야바르만 2세는 자바에서의 질곡을 벗어나
4개의 도읍지를 근거로 캄부자를 통합하여 왕위에 올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롤루스 지역에는 쁘레아 꼬와 바꽁 사원 그리고 롤라이 사원이 있다. 이 유적들은 앙코르 시대의
첫 도읍지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사원군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앙코르 유적을
역사적으로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롤루스 지역의 유적탐사는 필수적이며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다.>
그는 자바에서 돌아오자 '브야드하푸라'와 '삼보후드라'를 정복하고 왕이 된 후 첫 수도를 인드라푸라(그것이
어딘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에 정했다가 지금의 롤루스 지역인 '하리하랄라야'와 악윰 근처의 '아젠드라푸라'
그리고 프놈쿨렌 산 위의 '마헨드라푸라"등 네개의
도읍지를 건설했다. 그리고는 지금의 롤루스에 돌아와 사망했다.
그는 국가를 통일하기 위하여 4번이나 이동하며 나라의 기틀을 만들었으며, 그가 그 때 확보한 영토는
현재 캄보디아 영토의 절반에 해당할 만큼 괄목한 것이었다.
<이러한 아름드리 나무와 붉은 황토길에 서있으면
저절로 시심(詩心)이 돋는다. 하지만 그러한 시적 낭만도 잠시일 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적막에 휩싸인다. 말이란 그저 허황스런 사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 서서 돌이 되고 만다
- 롤라이 들어가는 길>
자야바르만 2세는 전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나라의 기틀을 잡았지만
그는 결국 지금의 롤루스 지역으로 돌아와 숨을 거두었다. 그는 광활한 평야와 숲으로 이루어진 이곳
롤루스를 정신적으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롤루스 지역의 옛 이름은 "하리하랄라야"다.
그런데 이 옛 지명의 이름인 "하리하랄라야" 에서 앙코르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 한 축 이었던
즉 앙코르왕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힌두라고 하는 종교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재미난 단서가 하나가 포착된다.
앙코르 유적을 다룬 어느 책에서도 하리하랄라야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다.
국영문 모두를 통해서도 말이다. 하지만 앙코르 유적의 첫 도읍지중에 하나였고 후에 중심 도시의 역할을 했던
"하리할라라야"는 어쩌면 앞으로 앙코르를 탐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지 모른다.
앞으로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한 이름들 즉 시바와 비슈누 그리고 브라흐마라고 하는 힌두신들의 이름들과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데 이 들 신들의 이름에 관하여 흥미없어하거나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뜨거운 캄보디아의 태양아래 발품을 어렵사리 팔아가며
유적탐사 여행을 한 우리들의 노력이 안타깝게도 그만 허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만큼 시바와 비슈누 그리고 브라흐마의 이름은 앙코르 유적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기억해두어야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인내심이 많이, 아주 많이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우선은
긴장을 풀고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고 옛 크메르인들이 다룬 힌두와 불교를 들여다 보는 여행을
천천히 그리고 아주 낭만적인 기분으로 즐기는 것이 앙코르 유적 여행의 백미가 될 것이다.
하여간에 고대 인도에서는 베다의 시대를 거쳐 기원전 500-600년경에 힌두라는 사상이 완전하게 확립된다.
힌두는 Hindu라고 쓰는데 인도에서는 H자가 발음이 안되니 사실상 인도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바로 인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 바로 힌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힌두에서는 고대로 창조와 유지 그리고 파괴를 관장하는 세 분의 신이 별도로 있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창조는 브라흐마 신이, 그리고 창조된 모든 사물과 존재들은 비슈누 신이,
그리고 태어난 모든 것들은 소멸되고 파괴되므로 이러한 것들은 시바 신이 관장한다고 믿었고 지금도
인도인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고 일생을 살아간다.
<쁘레아 꼬 사원 - 앙코르 제국의 제 3대왕인 인드라바르만 1세는 이곳 수도 하리하랄라야에
처음 쁘레아꼬 사원을 건설한다. >
그런데 인도인들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창조신인 브라흐마는 비록 대단히 뛰어나고 훌륭한 신임에도 불구하고
창조라는 대역사를 이미 마쳤음으로 더 이상 인간들에게 해줄 것이 없다고 믿어 브라흐마 신을
믿고 받들지 않는다. 다만 이 세상의 존재들은 살아가고 죽고, 또 살아가고 죽고하는 윤회의 바다에 던져져 있으므로
삶을 관장하는 비슈누와 죽음을 관장하는 시바를 목숨처럼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에서는 "살아있는 생명체 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없는 무정물까지 신(神)이다"
또는 "인도인의 수만큼 신이 있다" 할 만큼 신이 많아도
그 가운데 절대적인 신은 바로 비슈누 신과 시바 신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신을 믿고 추종하는 무리들이 둘로 갈라졌다. 비슈누 파와 시바파가 바로 그것이다.
다시말해서 비슈누 신이 쎄냐? 시바 신이 쎄냐? 에 따라서 갈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인도 신들의 결합현상이 나타났다.
북인도의 뿌라나 문헌에 따르면 그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날 비슈누 신이 아름다운 여인인 모히니로 변했다. 그 때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 시바신이
모히니를 끌어안자 그 순간 비슈누와 시바가 합쳐져 바로 하리하라 신으로 변하여 절대신이 되었다."
"하리하라 Hari Hara"
바로 앙코르 최초의 도시 "하리하랄라야"는 바로 "하리하라" 신의 땅인 것이다. 이처럼 하리하라 신은 비슈뉴 신과
시바신이 합쳐진 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슈누 신이 곧 시바 신이고 시바 신이 곧 비슈누 신이라는 사상이다.
신이 둘인 듯 하지만 곧 하나의 신이라는 것이다. 힌두교신의 최초의 결합인 하리하라 신이
앙코르 최초의 도시인 바로 지금의 롤루스의 땅인 것이다.
<바꽁 사원- 자야바르만 3세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해서 인드라바르만 1세에 의해 완공된 이 사원은
대단히 아름답고 거대하다. 사암과 라테라이트 벽돌로 만들어진 바꽁 사원에서 초기 앙코르 탐방에
절정을 이룬다.>
그런데 또 여기에서 너무나 재미난 사실이 발견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일이 되겠으나 절에 한번이라도 다녀본 사람이면 한국불교에서
가장 인기(?)있는 경전 가운데 천수경이란 경전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천수경이란 손이 천개이며 눈이 천개나 가진
관세음보살(이 보살을 불교에서는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른다)에 관한 경전이다.
이 경전은 사찰에서는 새벽에 그리고 오전과 오후에 각기 예불때마나 빠짐없이 염불하고 불교신도들은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서 아니면 자신만이 혼자 그것을 읊으며 기도의 중심축으로 삼는 그러한 중요한 경전이다.
천수경 안을 들여다 보면 전혀 알 수 없는 구절로만 만들어진 주문의 성격을 가진 독특한 대목이 들어있는데
좀 제목이 길다. "신묘장구 대다라니"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바꽁 사원 을 지키는 사자상>
그 대다라니 안에 "혜혜 하례 he he hare 마하 모지 사다바"라고 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이야기하는 비슈누 신과 시바신의 결합신인 '하리하라'를 중국식으로 음역한 것이다.
"어? 어떻게 한국 불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경전인 천수경 속에 힌두의 신인 하리하라가 들어가있을까?"
사람들은 여기서 머리를 갸우뚱 거린다.
어떻게 해서 힌두신의 절대신인 비슈뉴와 시바가 결합된 하리하라가 오로지 관세음보살에 관한 경인
천수경에 들어가 있어 요즈음 살고 있는 한국의 불교신도들이 새벽마다, 그리고 하루종일
이것을 통해 염불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 캄보디아에서 본 트럭은 본네트가 거의 없다. 날씨가 더워서인가? 엔진의 열기를 식힐겸 뚜껑을
떼어서 다니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더워도 그럴까. 나는 돌아올 때까지 트럭에서 본네트를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과 비슈뉴와 시바가 무슨 연관성이?
아무튼 관세음보살 그리고 비슈뉴 신과 시바신... 앙코르의 역대 왕들 그리고 크메르 백성들..."
그렇지만 지금은 그저 그렇게 물음표만을 던져놓고 역사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가이드도 들려주지 않는 신비한 앙코르 여행의 속으로....
오시환
나이 들수록 이런 풍광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것인가?
읽는것만해도 어려운데 글을 쓰는 솜씨나 열성이 정말 부럽네. 아뫃던 열심히 읽어보겠네.
앞으로의 전개가 흥미진진 해지는구나
흙 길에서 정감을 느끼네 ~ ^&^
<바꽁 사원의 어린이 - 잠자리는 허공을 말없이 그리고 평화롭게 날고 있지만
이 땅에 사는 어린이에게는 여전히 궁핍이 괴로움이다. 나는 그러나 믿는다.
우리나라도 한그 때는 몹시 궁핍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