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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 칼럼>18
지학(志學)에 첫발을 내딛은 맏손녀
해담 조남승/[국제문단문인협회]자문위원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고양이 세수로 눈곱을 떼어내고는 꽃시장을 향해 차를 몰았다. 오늘이 바로 맏손녀의 초등학교 입학식이어서 꽃다발을 만들어 오기 위함이었다. 어제 늦은 오후에 꽃시장을 찾았지만 이미 마감시간이 지나서 그냥 돌아왔었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 일찍 서둘러 꽃시장엘 나갔다. 꽃다발을 만들어주는 앳된 아가씨가 ‘어디 좋은데 가시나 봐요?’ 라며 밝은 미소와 함께 정성껏 꽃다발을 만들어 주었다. 꽃다발을 받아든 나는 이른 새벽부터 꽃향기 속에서 생동감 넘치게 바삐 움직이는 삶의 현장을 뒤로하고 막 바로 딸네 집으로 향하였다. 현관문을 열자 이제 18개월 밖에 되지 않은 작은 손녀딸이 꽃같이 예쁜 함박웃음으로 눈 맞음을 하면서, 두 손을 벌리고 현관 앞으로 넘어질 듯 급히 달려와 품에 안겼다. 환하게 웃는 작은 손녀의 얼굴에 큰 손녀의 어릴 적 모습이 겹쳐보였다. 저렇게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던 큰 손녀가 어느새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다니, 지난세월에 대한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이 있기까지 맏손녀의 육아를 도우면서 순간순간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도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손녀딸의 몸엔 멍든 곳이 가라앉을 새가 없었고, 걸핏하면 병원 응급실로 달려야만 했다. 방문에 발이 끼어 엄지발가락이 뒤집어지고, 어깨뼈가 빠졌는가 하면, 발가락의 골절로 깁스를 하기도 하고, 목 부분의 경추가 속에서 탈골되어 대학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하여 견인치료를 받기까지 하였다. 또 감기에 걸리면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는 통에, 밤새 물수건으로 머리를 식히면서 제발 내가 대신 아플 테니 우리아이 좀 낳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밤을 지새우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닌, 정말로 불행스러운 대형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는 지난해 늦가을 이었다. 유치원에 다녀온 손녀와 함께 아파트정원에 있는 놀이터엘 나갔다. 손녀는 그네와 킥보드를 번갈아 타기도 하고 나와 함께 술래잡기를 하면서 재밌게 놀았다. 그네를 어찌나 잘 타는지 곱게 물든 단풍나무의 높은 가지에까지 머리가 닿을 정도로 아주 시원스레 높이높이 잘도 탔다. 한참을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 이제 그만 집에 오려고 하는 순간, 초등학생 두 명이 그네 쪽으로 뛰어왔다. 손녀는 다시 그네에 앉아 ‘할아버지 그네 좀 밀어주세요. 조금만 더타고 가게...’라며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난 ‘그래, 한 열 번만 타고가자’라면서 그네를 슬쩍 밀어 주었다. 그런데 손녀가 그만, 그네에서 나가떨어지는 게 아닌가! 놀란 손녀는 겁먹은 얼굴로 울음을 터트린다. 손녀보다도 더 놀란 나는 얼른 손녀를 끌어안으며 ‘왜, 꼭 잡지 않고선... 어디 다친데 없어?’라고 물으니 손녀는 다친 데는 없다고 하면서도 우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보였다. 당황스러움에 손녀를 등에 업고 급히 집으로 오면서 어디 아픈데 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하자, 한 쪽 어깨가 많이 아프다면서 울먹였다. 난 직감적으로 골절상을 입었다는 판단에 손녀를 등에서 가슴으로 옮겨 안고선 더 빨리 걸음을 재촉하였다. 한손에 킥보드를 잡은 채 일곱 살짜리 아이를 안고 뛰다시피 걷다보니 팔도 아프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애 엄마인 딸에게 아이가 골절상을 입은 것 같으니 빨리 병원에 가봐야 되겠다는 말을 킥보드와 함께 내던지고는 가까운 병원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아이의 엄마는 둘째 손녀를 보느라 따라올 수도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여 대기를 하는 동안 아픈 손녀의 애처로운 모습과 놀란 눈으로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수심 가득한 애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저미어왔다. 진찰을 해보니 한쪽 어깨의 쇄골이 골절되었다면서 X밴드를 채워주는 것이었다. 정말 애 엄마를 볼 면목이 없었다. 옛말에 ”애본 공은 없다.“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네를 새끼손가락으로만 잡고선 밀어달라고 했었다는 것이다. 다치기 전에 그네를 두 번씩이나 잘도 탔건만... 참으로 일수가 나쁜 날이었다.
난 가슴 한가득 차오르는 미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더 크게 다치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라며 가족들을 위로하였다. 하지만 사고가 난 다음날 유치원에서 노래잔치가 있는 날이어서, 예쁜 무대의상까지 장만해놓았던 터라 마음이 부풀어 있었던 손녀는 물론이고, 가족 모두의 아픈 마음이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다음날 손녀는 그 몸을 해가지고 노래잔치에 나가고 싶다고 엉엉 울면서 떼를 썼다. 하는 수 없이 옷도 제대로 입히지 못한 채 노래잔치엘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손녀는 그렇게 아픈 몸으로 노래를 부르고 와선 꼬박 한달 동안 유치원엘 등원치 못하고 집에서 생활하면서 골절부위가 낳아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손녀딸이 제발 다시는 다치지 말고, 다친 곳도 하루빨리 완치되어 건강하게 자라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새벽마다 108배를 올리면서 기도를 하였다. 맏손녀는 여러 번 유산 끝에 어렵게 얻은 첫 손녀인데다, 내가 퇴직하여 많이 허전하고 외로울 때, 눈만 뜨면 할아비인 나에게 갖은 재롱으로 나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주었던 애정(愛情)이 깊게 쌓인 특별한 손녀딸이다. 이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손녀딸이 오늘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손녀딸에게 꽃다발을 건네주면서 ‘꽃다발 마음에 들어? 새벽에 꽃 도매시장엘 가서 싱싱한 꽃으로 만든 거라 아주 향기가 좋을 거야’라고 말하자, 손녀딸은 꽃냄새를 맡아보면서 ‘와! 정말 향기가 좋은데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라며 나의 품에 안겨온다. 난 아이들의 아침 식사가 끝나는 것을 보고는 큰손녀에게 ‘입학 축하해! 그리고 입학식 잘하고와, 할아버지는 입학식에 안갈 테니 섭섭하게 생각하지말구, 알았지?’ 라며 손녀딸의 등을 토닥여주고는 이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아침을 먹는데 아내가 ‘입학식에 안간 건 아주 잘한 거야, 우린 평소에 늘 보잖아, 친 조부모님께서 오신다는데 우리까지 가는 건 좀 그렇잖아?’ 라며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보름나물만 한가득 입에 넣고선 우물거린다. 나 역시 ‘그럼 잘했고 말구, 우리까지 가면 어른들이 여섯 명씩이나 따라가는 게 되잖아?’ 우린 이렇게 손녀딸의 입학식에 참석치 못한 허전한 마음을 서로 위로하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 TV를 보다보니 입학식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난 평소처럼 인근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공원 정상에 이르러 양지바른 바윗돌에 앉아 하릴없이 하늘 높이 떠있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갖가지 상념에 젖어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아직은 쌀쌀하게만 느껴지는 바람결이 오늘따라 귓전을 더욱 쓸쓸하게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경칩이 사흘 밖에 남지 않아서인지 한낮의 햇살만은 제법 따스하게 안겨왔다. 핸드폰에서 연신 울리는 ‘카톡’ 소리에 눈을 떠보니, 공원 저 아래에 있는 초등학교에서도 입학식을 하였는지, 어린 학생들이 어른들과 함께 꽃다발을 들고 교문을 나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녀딸도 지금쯤 입학식이 끝났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핸드폰을 열어보니, 딸이 손녀의 입학식 사진을 몇 장이나 보내왔다. 단정한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얼마나 귀엽고, 예쁘고 대견스러워 보이던지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니 그 귀한 지학(志學)의 길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 아닌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희망적이며 중요한 것은 바로 교육이요, 배우는 것이다. 사람은 죽는 날까지 평생 동안 배우고 공부하면서 학습(學習)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곧 배우는 것이라는 뜻으로 생즉학(生則學&Living is learning)이라고 말들을 한다. 배워야 인생의 가치관이 바로서고, 삶이 향상되며 발전을 하게 된다. 배움은 곧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건설적인 것이다. 맹자(孟子)의 책에 공자(孔子)는 배우는 데 싫증을 내지 않고, 가르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는 “학불염 교불권 (學不厭敎不倦)”이란 말이 있다. 나의 서재에도 이 글귀의 액자가 걸려있어 늘 마음에 새기고 있다. 배움의 길에 들어선 어린 손녀딸이 공자(孔子)처럼 배우는데 싫증을 느끼지 않고, 공부에 재미를 붙여 즐거운 마음으로 학문(學問)을 가까이하는 습관이 어릴 적부터 자리 잡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바람이 헛된 욕심이고 무리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삼년동안의 유치원생활을 거치면서 정규교육에 대한 다소의 트레이닝(Training)이 되긴 했겠지만,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손녀딸에게 마냥 축하를 하기보다는 안쓰러운 생각이 먼저 든다. 요즘 커가는 아이들의 실상을 살펴보면, 학교에서 공부가 끝나자마자 이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잡아 돌다가 집에 돌아와서까지 개인지도를 받는 등, 잠시라도 배움의 굴레에서 벗어나 숨 쉴 틈이 없으니, 과연 공부에 흥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개인적으로는 행복하고, 사회적으로는 쓸모가 있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는데 있다. 이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선악(善惡)과 시비(是非)를 분별할 줄 알고, 자기 자신의 소질과 역량을 확실히 알아서 직업의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 적합한 일을 선택하여 자기가 맡은 일을 아무 탈 없이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긴 하겠지만 사회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 자기가 꼭 원하지 않는 직업일지라도 사회와 환경이 정해주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경우라도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는다는 불원천 불우인(不怨天 不尤人)의 정신으로 아무 불평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책임을 지는 사람이 곧 훌륭한 사람이다. 바로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바른길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의 교육풍토를 보면 이러한 지성(知性)과 인격(人格)을 도야(陶冶)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진정한 교육의 이념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오직 물질만능주의와 배금풍조(拜金風潮)에 매몰된 나머지 허황된 외형적 행복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구직(求職)을 해야 되며, 구직을 하기 위해선 남보다 더 다양하고 높은 스펙(specification)을 쌓아야만 하는 게 오늘날의 슬프고도 엄연한 현실이다. 이러한 사회정서가 요즘 어린청소년들의 마음을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고 있는 것이다. 이렇고 보니 어린애가 말을 하기시작만 하면 그때부터 좋은 대학에 보내고자 하는 욕심이 앞서게 되고, 이러한 사회현실을 이용한 사립학원의 마케팅전략에 휘둘린 나머지,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들보다 공부를 더 잘할 수 있게 지원해야한다는 압박감으로 사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사교육비가 무서워 결혼을 미루거나 심지어 아이의 출산까지 기피하겠는가. 물론 글로벌시대에 우수한 인적경쟁력을 갖추어 세계적으로 큰 활동을 하기위해선 다양하고 심도 있는 전문적인 학문을 갈고 닦아야 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국가 사회적으로 삶의 지향점과 목표달성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주어진 현실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보다 성숙된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또 정부나 기업에서 인적자원의 채용기준을 객관적인 스펙보다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성과 적성을 우선하는 것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학벌과 개인의 스펙을 따지지 말고 의욕과, 열정과, 책임정신과, 창의적인 훌륭한 인재를 채용한 다음, 부서별로 필요한 부분을 자체적으로 재교육하여 활용하는 제도가 정착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 소위 빵을 해결하기 위한 밥벌이 교육에서 인성교육을 우선시하는 인문학적 교육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참된 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에 “공부하는 사람은, 집에 들어와서는 어버이를 섬기어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남을 공경하여 행동을 삼가고 말을 믿음성 있게 하며, 널리 뭇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질고 훌륭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야한다, 이런 몸가짐을 하고나서 남는 힘이 있으면, 그때 학문을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悌,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제자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중이친인, 행유여력, 즉이학문)”는 공자(孔子)의 말이 새롭게 가슴에 와 닿는다. 다시 말하여 먼저 사람이 되고 나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선행후지(先行後知), 즉 사람됨이 먼저이고 지식은 그다음이란 것이다. 그러나 요즘 세태는 인격형성이야 어찌 되어가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제일로 치고 있으니 본말(本末)이 전도된 것이 아니겠는가!
자고(自古)로, 학문을 하는 목적은 군자(君子)다운 삶을 살아 자신도 군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과연 군자와 소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군자(君子)란 세상의 불평을 말하고 남을 원망하는 보통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을 초월하여 덕(德)을 닦고 인격수양에 힘쓰며, 천명(天命)에 따라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일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자세로 태연자약(泰然自若)하고도 어질게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군자지도(君子之道)를 향한 교육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다는 건 힘든 일이다. 옛날엔 올바르고 정성된 태교를 거쳐 출산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유아 때부터 소학(小學)을 가르치면서 가정교육에 정성을 다하여 왔다. 현대사회에 와서도 미국의 로버트 폴검(Robert Fulghum)이란 교수는 내가 정말 필요해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어릴 때의 유아교육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어린 학생들은, 마치 나무가 곧고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지주(支柱)를 세우고, 중간 중간 묶어주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어린나무를 교정하여 바로잡아주는 것과 같이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다. 초등학교시절이 바로 어린나무가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여 지도해야할 소중한 시기인 것이다. 누고필자하(累高必自下)란 말처럼 높이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천리지행시어족하(千里之行始於足下)란 말과 같이 천리 길도 바로 발아래의 첫 한발자국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초등학교 때의 학교생활과 공부를 하고자하는 자세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세상의 모든 것이 처음의 시작이 중요하며 기초가 튼튼해야만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孔子)도 일생의 계획은 어릴 때에 있다(一生之計 在於幼/일생지계재어유)고 하였다. 또 배울 때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것처럼(學如不及/학여불급)하고, 오직 배운 바를 잃을까 두려워하는(惟恐失之/유공실지)생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인지 공자의 제자들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집대성해놓은 논어(論語)라는 책을 엮으면서 그 많은 구절 중에 “배우고, 제 때에 그것을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란 구절을 시작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펼쳐내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주자(朱子)는 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 배움의 말뜻은 본받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하되 그 깨달음은 선후가 있다. 늦게 깨닫는 자는 반드시 먼저 깨달은 자가 하는 바를 본받아야 한다. 그리하면 가히 선(善)을 밝히고 그 애초의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學之僞言 效也 人性皆善 而覺有先後 後覺者 必效先覺之所爲 乃可以明善 而復其初也-학지위언 효야 인성개선 이각유선후 후각자 필효선각지소위 내가이명선 이부기초야)”고 하였다. 또 배운 것은 때때로 익혀야 하니, 익힘이 익숙해진 후에는 자연히 기쁘게 되어 스스로 그만둘 수 없게 된다. 요즈음 사람들이 곧 그쳐버리는 까닭은 다만 일찍이 익히지 아니하여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學 要時習 習到熟後 自然說喜 不能自已 令人 所以便住了 只是不曾習 不見得好-학 요시습 습도숙후 자연열희 불능자이 령인 소이편주료 지시불증습 불견득호)”라는 아주 중요한 말을 하였다. 또한 정자(程子)는 이 구절을 두고 말하기를 습(習)이란 거듭 되풀이하여 익히는 것이다. 그때그때 때때로 되풀이하고 사색하여 그것이 샅샅이 두루 미치면 즐거워지게 된다“(習 重習也 時復思繹 浹洽於中 則說也-습 중습야 시복사역 협흡어중 즉열야)”고 하였다. 또한 논어 자장편(論語 子張篇)에 보면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고 뜻을 독실이 하며, 절실한 심정으로 묻고 가까운 것을 미루어 생각할 줄 알면, 인(仁)이 그 가운데에 있을 것이다.“(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박학이독지, 절문이근사, 인재기중의)”라는 말을 하였다. 즉 넓게 두루 배우며 목표를 확실히 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간절한 심정으로 물어보며, 자기를 미루어 남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어진 마음을 실현하는 지혜나 방법이라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공부의 재미와 참 맛을 모르고 학문을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배운 것을 제때에 익혀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쫒기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 배운 것은 그날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지도록 복습을 해야 하는 것이며, 배우고 공부하면서 잘 모르는 점이 있을 때는 주저하지 말고 질문을 하여 확실히 이해하고 넘어가야만 한다.
중국 주나라 때의 현자(賢者)인 태공(太公)은 사람이 태어나서 배우지 않으면, 어둡고 어두워 마치 불빛 없는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人生不學 冥冥如夜行-인생불학 명명여야행)”고 하였으며, 이에 반하여 장자(莊子)는 배워서 지혜가 심원해지면 마치 높은 산에 올라가서 사방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다“(學而智遠 如登高山而 望四海-학이지원 여등고산이 망사해)”고 하였다. 일생동안 어두운 밤길을 이리저리 헤매듯 어렵게 살 것인가, 아니면 높은 산에 올라 사방의 아래를 훤히 내려다보면서 지혜롭고 여유로운 삶을 살 것인가는 바로 배우는 학생들의 굳은 결심과 노력에 달려있다. 한문에 근자필성(勤者必成)이라 하여 부지런한 사람은 반드시 성공을 하며, 땀을 흘리지 않고는 이루지 못하고, 인내하지 않고는 이기지 못한다는 무한불성 무인불승(無汗不成 無忍不勝)이라는 귀한 말이 전해져온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그저 쉽게 이루는 것을 선호하는 게 인지상정일지 모르지만, 어려움을 참아내며 애쓰지 않고 어찌 이룰 수 있겠는가? 혹 쉽게 이루어지는 게 있다면, 그만큼 보람이 적을 수밖에 없고, 행복감 또한 떨어지게 되고 만다. 빨리 끓는 냄비가 빨리 식고, 쉽게 더워진 방이 쉽게 식는 것과 같이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잃게 되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공부하는학생들에게 권학(勸學)에 대한 두 편의 시를 소개해본다.
주자(朱子)의 권학가(勸學歌)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少年易老 學難成/소년이로 학난성),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一寸光陰 不可輕/일촌광음 불가경).
연못가 봄풀의 꿈이 아직 깨지도 못했는데(未覺池塘 春草夢/미각지당 춘초몽),
섬돌 앞 오동잎은 이미 가을소리를 내누나(階前梧葉 已秋聲/계전오엽 이추성)
도연명의 권학시(勸學詩)
젊음은 거듭해 오지 아니하고(云盛年 不重來/운성년 부중래),
하루에 새벽은 재차 있기 어려우니(一日 難再晨/일일 난재신)
때가 되었을 때 마땅히 학문에 힘써라(及時 當勉勵/급시당면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歲月 不待人/세월 불대인)
공부에 전념해야할 어린 시절의 중요함을 이 얼마나 잘 말해주고 있는가! 우리는 시간에 대하여 금(金)과 같다(Time is gold)는 표현들을 한다. 그러나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이야 말로, 돈처럼 저축해두고 필요할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보면, 돈 보다도 더 소중한 것(Time is more than gold)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시간을 금과 같이 아끼라는 석시여금(惜時如金)이란 말이 내려오고 있다. 또 유태인의 격언에 “시간을 훔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물론 남의 귀한 시간이 허비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조심해야 되겠지만, 한창 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이 헛된 생각으로 한눈을 팔아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스스로 도둑 당하게 해서는 더더욱 아니 될 것이다. 공부를 하는 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누구라도 늘 책과 더불어 생활하는 습관을 가질 때 좀 더 참되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명심보감 훈자편(訓子篇)에 가장 즐거운 것은 책을 읽는 것 만한 것이 없고, 가장 요긴한 것은 자식을 가르치는 것 만한 것이 없다“(至樂 莫如讀書, 至要 莫如敎子-지락 막여독서, 지요 막여교자)”란 말이 있다. 또 안중근 의사(義士)는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일일불독서(一日不讀書)면 구중생형자(口中生荊朿)란 말로 독서를 강조하였다. 책을 보는데 재미를 붙이고 독서를 하는데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아울러 자식을 기르는 부모는 자녀의 교육에 정성을 다하여야만 한다.
근사록(近思錄)의 논학편(論學篇)에 “학자대불의지소기경(學者大不宜志小氣輕) 지소즉이족(志小則易足) 이족즉무유진(易足則無由進) 기경즉이미지위이지(氣輕則以未知爲已知) 미학위이학(未學爲已學)”이라는 구절이 있다. 즉 배우는 사람은 뜻을 작게 하고 기질(氣質)을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 뜻이 작으면 쉽게 만족하고, 쉽게 만족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어 발전이 없다. 기질(氣質)이 가벼우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거나, 아직 배우지 않은 것을 이미 배웠다고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뜻이나 꿈을 크게 가지고 기질을 중후하게 하여야 발전이 있으며, 성질이나 마음이 중후하지 않고 가벼우면, 알지 못하는 것도 아는 척하면서 배우지 않은 것도 이미 배운 것처럼 건방을 떨게 되어 마침내 자기 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폐단에 대하여 공자(公子)는 일찍이 논어 위정 편에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실로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라는 귀한 가르침을 남겼다. 아울러 중국 송대(宋代)의 학자인 정명도(程明道)는 성정자 가이위학(性靜者 可以爲學)이라 하여 성격이 조용한 사람이 학문을 할 수 있다고 하였고, 그의 동생인 정이천(程伊川)역시 인안중 즉학견고(人安重 則學堅固)라 하여 사람의 마음이 안온하고 진중하면 그 사람의 학문은 견실해진다고 하였다. 또 정명도는 홍이불의(弘而不毅)면 즉난입(則難立)하고 즉무규구(則無規矩)하게 되며, 의이불홍(毅而不弘)이면 즉무이거지(則無以居之)되고, 즉애루(則隘陋)하게 된다고 하였다. 즉 마음이 넓더라도 의지가 강하지 못하면 기반이 흔들려 서지 못하고 규율이 없어져 흐리터분해진다. 이에 반하여 의지가 강하더라도 마음이 넓지 못하면 도량이 좁아져 사람을 포용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안정성이 없게 되고 소견역시 좁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인지학불진(人之學不進)이면 지시불용(只是不勇)이기 때문이니, 학자위기소승(學者爲氣所勝)이거나 습소탈(習所奪)하면 지가책지(只可責志)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학문에 진보가 없는 것은 다만 용기가 없는 것이니, 배우는 자가 기질에 지거나, 나쁜 습관에 젖어 마음을 빼앗긴다면 오직 자신의 의지가 약함을 스스로 책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착한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與善人居/여선인거), 마치 향기로운 지초와 난초가 핀 방안에 들어간 것과 같으니(如入芝蘭之室/여입지란지실) 시간이 흘러 오래되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하게 되지만(久而不聞其香/구이불문기향) 이는 바로 그 향기와 더불어 동화되었기 때문이라고(卽與之化矣/즉여지화의)하였다. 이와 반대로 착하지 못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與不善人居/여불선인거), 마치 생선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으니(如入鮑魚之肆/여입포어지사) 오래되면 그 악취를 맡지 못하지만(久而不聞其臭/구이불문기취) 이 또한 악취와 더불어 동화되었기 때문이다(亦與之化矣/역여지화의). 따라서 함께 머무는 사람도 반드시 삼가해야한다고(必愼其所與處者焉/필신기소여처자언)하였다. 또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과 동행을 하면(與好學人同行/여호학인동행) 마치 안개와 이슬 속을 걸어가는 것과 같아서(如霧露中行/여무로중행) 비록 옷이 흠뻑 젖지는 않지만(雖不濕衣/수불습의) 항상 촉촉함이 있도록 적셔준다(時時有潤/시시유윤). 이와는 반대로 식견이 없는 사람과 동행을 하면(與無識人同行/여무식인동행) 마치 뒷간에 앉은 것과 같아서(如厠中坐/여측중좌) 비록 옷은 더럽히지 않더라도(雖不汚衣/수불염의) 항상 그 악취를 맡게 된다(時時聞臭/시시문취)고 하였다. 사람은 일생동안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속에서 살아가게 되며,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품성과 인격에 따라 자신 또한 은연중 젖어들게 되어 닮아가기 마련이다. 특히 성격이 형성되어가는 성장과정에서의 마음가짐과 친구의 사귐은 더 없이 중요한 것이다.
좋은 인간관계를 위해 늘 가슴에 담고 실행해야 할 소학(小學)의 두 구절을 소개해본다. 소학(小學)의 경신편(敬身篇)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군자가 소중히 여겨야 할 도리가 세 가지 있다“(君子所貴乎道者三/군자소귀호도자삼). 용모를 움직일 때에는 난폭하거나 오만한 태도를 멀리해야하고(動容貌斯遠暴慢矣/동용모사원폭만의), 얼굴빛을 바르게 하여 신실(信實)이 가깝게 해야 하며(正顔色斯近信矣/정안색사근신의), 말을 할 때에는 비천함을 멀리해야한다(出辭氣斯遠鄙倍矣/출사기사원비배의)“고 하였다. 즉 용모를 화평하고 온화하게 하여 남이 나와 친근해질 수 있도록, 포악하고 거만한 모습을 하지 않아야하고, 얼굴과 눈빛을 믿음성 있게 성실히 하여야하며, 말을 할 때는 천박스러우면 비루하고 너무 고원(高遠)하면 사리에 어긋날 수 있음을 감안하여, 겸손하고 교양 있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입교편(立敎篇)에 순(舜)임금이 말하기를 고관대작의 맏아들들을 가르치되, ”그들의 성격을 곧으면서도 온화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하며, 굳세면서도 사나움이 없고, 대범하면서도 거만함이 없도록 하라(直而溫, 寬而栗, 剛而無虐, 簡而無傲-직이온 관이율 강이무학 간이무오)”고 당부하였다. 즉 사람이 대쪽같이 곧기만 하고 온화하지 못하면 독선(獨善)이 되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줌으로서 원한을 사기 쉽고, 매사에 아량이 지나친 나머지 상대방이나 자신의 의롭지 못한 것 까지 엄하게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유부단에 빠져 바르게 되지 못할 것이다. 의지를 굳게 가지되 일을 추진함에 있어 도에 지나친다면 곧 난폭이 되어 다툼이 생김으로서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며, 언행(言行)이 까다롭지 않고 간단하여 일면(一面) 선이 굵은 것 같으면서도 잘난 체하고 오만하기가 이를 데 없다면 시기와 질투를 받기 십상이라는 뜻이다.
지학(志學)의 길에 들어선 맏손녀의 초등학교입학에 즈음하여, 손녀딸이 위에서 말한 내용들을 가슴에 담고 실천하는데 노력하면서 항상 침착하고 정숙하게 자라주기를 기대한다. 늘 맑고 빛나는 눈과 환하고 온화한 얼굴, 공경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며, 성실하고 신의를 지켜 가는데 힘쓰면서, 좋은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잘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모님께 효성(孝誠)을 근본으로 하여 학생의 본분을 한시도 잊지 말고 일일학 일일신 일일진(日日學 日日新 日日進)이란 말처럼 매일매일 배우고, 나날이 새로운 사람이 되어 하루하루가 앞으로 나아가는 진전이 있도록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한다. 물론 공부를 하다보면 어려움도 많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 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라는 태산가를 부르면서 자신감과 불굴의 정신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높은 태산이라도 처음부터 못 오를 것 같다는 나약한 생각으로 포기하지 말고,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때마다 높은 데로 올라갈 수 있다는 보보등고(步步登高)의 겸손한 배움의 정신으로 한눈팔지 않고, 한 걸음 한걸음 힘을 다하여 오르는데 집중하다보면, 분명히 정상에 이르게 되는 행복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부를 함에 있어 남보다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남보다 노력을 더 많이 하는 것이 훌륭한 거란 걸 잊지 말아야한다. 또 인간은 누구나 과실(過失)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잘못을 신속히 고치느냐 아니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정해진다. 잘못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고치지 않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부디 실수와 잘못된 습성이 있을 땐 그때그때 고치는데 노력하여 현명(賢明)하고 덕(德)이 많은 훌륭한 인물로 예쁘고 예쁘게 성장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사진은 봄호 22쪽 참조
조남승: 충남 부여 출생, 아호-해담(海淡), 동국대학교 경영학과 졸업,서울 성북소방서장 등 역임, <국제문예>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국제문단문인협회]자문위원
시집:『매화 향에 취해서』, 수필집:『만남 뒤엔 헤어짐이 올 수밖에』外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