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전면 구촌리의 3·1 독립운동
“落石 맞아 卽死, 풀 베던 少年/ [大邱] 경찰은 6일 청도군(淸道郡 淸道邑 沙村里) 李성표(30·농업) 씨를 과실치사혐의로 입건 취조 중이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李 씨는 매전면(梅田面 龜村洞) 뒷산에서 약초를 캐다 잘못하여 돌을 굴렸는데 마침 산 아래서 소꼴을 베고 있던 경남 밀양군(密陽郡 上東面 梅花里 389) 金동금 씨의 4남 희원(13) 군이 그 돌에 맞아 두개골파열로 현장에서 즉사했던 것이다.[合同]” -<1962.6.6. 경향신문>
청도군 매전면 구촌리 뒷산에서 약초 캐던 청도읍 사촌리 이성표 씨가 잘못하여 돌을 굴렸는데 산 아래서 소꼴을 베던 밀양시 상동면 매화리 김희원 소년이 그 돌에 맞아 즉사했다는 오래된 신문기사다.
구촌리는 매전면의 맨 아랫동네로 남쪽으로 밀양시 상동면 매화리와 청도읍 사촌리를 경계하기 때문에 이 세 동네가 동창천을 사이에 두고 한 마을처럼 서로 내왕했다는 것을 이 기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우리 매전면에는 두 곳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보통 매전면의 만세 시위라고 하면 3월 11일과 12일 양일간 장연리(長淵里)에서 일어난 야간 시위 사건을 말한다. 장연리 만세 시위는 청도군에서 맨 먼저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이지만, 이보다 두어 달 후 구촌리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도 매전면 사건이다.
청도군에서는 장연리 만세 시위 이후 3월 18일 운문면 대천리(大川里), 3월 31일 청도읍 거연리(巨淵里), 4월 3일 화양읍 송금리(松金里)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고, 5월 7일 청도읍 유호리(楡湖里)에서는 일본인 구타 사건이 발생하는 등 시위가 확산하자 당황한 일제는 군·면에 자위회(自衛會)라는 이름의 단체를 조직하여 만세 운동을 방해하였다.
‘이일갑(李一甲) 외 13명 판결문’(1919.6.28. 대구지방법원)과 ‘이내윤(李乃潤) 판결문’(1919.7.26. 대구복심원) 내용에 근거한 구촌리 만세 시위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인근 유호리에서 일본인 구타사건이 있었던 5월 7일 일제는 자위회를 동원하여 매전면 구촌리에서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날인을 받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밀양군 상동면 매화리의 이일갑(李一甲) 씨 외 16명이 구촌리로 들어와 자위회의 날인을 저지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일갑 씨가 자위 회원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이에 이일갑 씨의 부친 이내윤(李乃潤) 씨가 매화리 주민 200여 명을 동원하여 곤봉을 들고 달려오자 그들은 도망쳐 버리고 그 자리에서 응원 나온 매화리 주민과 일부 구촌리 주민이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한 후 돌아갔다.
이날의 만세 시위가 있은 얼마 후 주동자 이내윤과 그의 아들 이일갑, 이상갑(李相甲), 김원도(金元道), 예주석(芮周錫), 강일곤(姜一坤), 김윤술(金允述), 이일생(李一生), 김수연(金守淵), 최삼술(崔三述), 김유준(金有俊), 김율이(金律伊), 이쾌술(李快述), 이상곤(李相坤) 등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이내윤은 대구복심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나머지는 태형 90대를 맞고 풀려났다.
한편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 경상북도경찰부. 1934년)에는 이 사건을 “밀양군 상동면 매화리의 사람들에게 전해짐으로 약 100명이 곤봉으로 응원해 왔다. 그래서 청도군 측의 동민도 다수의 응원”이라고 시위 인원을 축소하여 기록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 독립운동은 영남지역에서는 구촌리 만세 시위를 끝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역사적으로 볼 때 3·1 운동을 계기로 다져진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가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조국광복과 오늘 날 번영의 시대까지 이어진다.
3·1 운동 100년을 불과 몇 해 앞둔 지금, 청도의 독립운동사에는 구촌리 만세 시위를 밀양 매화리 주민의 원정 시위쯤으로 취급하고, 밀양의 독립운동사에는 아예 이 사건을 거론조차 않고 있다. 앞에서 신문 보도처럼 구촌리와 매화리·사촌리는 예부터 한 마을같이 살아 이 지역에서의 도계(道界)나 군계(郡界)는 특별한 의미가 없어 보인다. 지금이라도 장연리 시위와 함께 구촌리 시위 사건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