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비치를 보고서
문학 사랑방에서 동성로 아트센터에 ‘체리 비치’라는 영화를 보러 간다기에 신청했다. 영화에 대해서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이 극장에 나갔다. 동성로 아트 세터에서 하는 영화이니까 단순히 오락 영화는 아니겠구나. 어쩌면 재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재미가 없더라도 나의 취향과 맞으면 다행인데,
그래선지 영화가 시작되고, 이야기가 한참이나 흘러가도록 무슨 영화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고, 황량한 해안가의 호텔에서 첫날밤을 맞이하도록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남녀 주인공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남자는 어머니가 머리를 다쳐서 약간은 비정상적인 행동과 사고를 하지만, 그림을 좋아하고, 조금은 정서적인 면이 있는 여자였다.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끔찍이 보호하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왔다.
남자 주인공은 옥스퍼드의 역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수석을 떠벌리면서 자랑하고 다녔다.
여자 주인공의 집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거의 독선에 가까울 정도로 무서웠다. 딸들은 아버지 안에 숨도 못 쉴 만큼 기가 죽어서지냈다.
여자 주인공도 옥스퍼드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둘이 만날 때의 모습이, 영화가 끝나고 보니까 상당히 상징적인 것 같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기가 수석 졸업을 했다면서 큰 소리로 자랑하고는, 여자에게 너는? 하고 묻는다. 여자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도’ 라고 대답한다.
그뿐 만이 아니고, 두 사람의 대조적인 성격이 영화의 곳곳에서 나온다. 그리고는 종종 부딪치기도 한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서로가 깊이 사랑함으로, 이내 화해를 한다.
여자는 음대에서 크래식 음악을 전공하였으니까 당연히 크래식 음악을 좋아한다. 그러나 남자는 60년대에 비틀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 록앤롤에 푹 빠져든다.
남자는 성격이 조금 격하면서도, 열정적이고, 그런 반면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욱’하고 화를 낸다. 여자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끊임없이 남자에게 질문을 하면서 확인을 한다. 두 사람이 키쓰를 할 때는 여자는 남자더러, ‘나를 사랑하지,’ ‘다른 사람과도 한 일이 있어’라면서 쉴 새 없이 질문하고 확인한다. 남자는 용케도 참아낸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소한 부딛힘이 있었지만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을 앞두고 여자 주인공은 성 교과서를 읽으면서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공부한다. 그가 공부하는 내용을 우리가 따라가 보면 거의 전문 의학 수준이다.
1960년대는 성의 개방을 부르짖고, 성행위를 사랑의 일부로 생각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킨제이 보고서가 일반적인 상식이 되고, 존슨 $ 마스터스 부부가 펴낸 성교과서는 성행위의 기술을 사랑의 기술처럼 다루어서 거의 사랑의 교과서로 읽히던 시절이었다.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영화 제목인 ‘체리 비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찾아 보았다. 체리는 처녁막을 상징했다. 손상되지 않는 처녀막을 가진 처녀를 상징했다. 그제서야 영화의 의미가 어렴풋이나마 떠올랐다.
신혼여행을 가서 식사도 끝나고, 그것도 포도주를 곁들여서 분위기 있게 끝내고, 침대로 자리를 옮겼지만, 남자는 불타 올랐고, 여자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순간마다. 여자는 남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다른 여자와 몇 번이나 했어,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남자는 열이 식는다. 그러나 남자는 이내 달아 오른다. 여자도 남자를 받아들이려 노력하지만, 공부한 성교과서처럼 하려 해보았지만 자신의 몸이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질문한다는 것은 여자가 소심하다는 뜻이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남자에 대한 심리적 위축이 원인이라고 봅니다.)
남자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욱하는 성격이 그대로 나타났다. 첫날밤까지 와서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여자에 대하여 화를 냈던 것이다. 그리고 호텔 밖의 해안가로 뛰쳐나갔다. 아마 ‘체리 비치’일 것이다. 그는 화가 나서 해안의 모래를 발로 걷어찬다.
여자도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욱’하여 뛰처 나간 남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남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안다. 해안가의 남자에 찾아가서, 자기는 성에 둔감한 ‘석녀’인 듯하니, 다른 사람과 성행위를 해도 좋다고 사정을 한다. 우리, 부부로 이렇게 평생을 함께 살면 안돼, 다른 사람과 성행위를 해도 말하지 않겠어,‘라며 사정을 한다.
남자는 성행위가 없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면 돌아서 버린다. 여자도 남자의 냉정한 행동에 포기한다.
남자의 말대로 결혼한지 6시간 만에 헤어졌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남자들은 첫날밤에 발기가 되지 않아서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처갓집에 이끌려 비뇨기과를 찾아오는 일이 많습니다. 이혼을 하려면 병원의 진단서가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진단서를 끊어 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왜냐면 남자는 심리의 움직임에 민갑해서 첫날밤에 대한 두려움, 걱정, 여자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심리적 부담이 거의 100%라고 합니다.)
그리고 45년이 흘렀다. 둘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나도 금년이 결혼 45년 째입니다.)
영화에서는 둘 사이에 만남이 없지만 아마도 서로를 생각하고 있다는 암시적인 사건이 짧게 나온다.
남자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음반 가게를 하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스님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여자와 접촉도 하면서 산다. (영화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여자는 연주단의 첼로리스트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셋이나 낳고, 손주를 5명이나 두었다. 첫날밤 남자가 절규하듯이 부르짖은 ‘당신은 성불감자야!’라고 부르짖은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부족하였을 뿐이다.
남자는 신문을 통해서 옛날의 그 여자가 은퇴 공연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여자와 연애를 할 때, 당신이 공연할 때 셋째 줄 가운데 좌석에 앉아서 가장 큰 소리로 ‘부라보’를 외치겠다고 하였다.(셋 째 줄 가운데가 어떤 자리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아주 중요한 자리린 듯합니다.)
여자가 은퇴 연주를 하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주름살 투성이가 된 그 남자가 셋 째 줄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본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처음에는 이 영화가 성에 둔감한 여인을 다룬, 말하지면 성소수자 문제를 다룬 영화인가 생각했다. 요즘 우리 사회도 성소수자 문제로 시끄럽다. 권리를 요구하는 데모에다. 반대하는 데모까지. 그래서 그런 비극을 다루는가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니 애절한 사랑 이야기 같았다.
단순히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부부에게서 성이란 무엇인가? 결혼 생활에 성이 그렇게 중요한가? 성이 없는 사랑은 불가능한가? 성불감자란 본래부터 있는 것인가“ 등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였다.
결혼을 위해서는 서로가 살아온 삶을 이해하는 마음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공자 촛대뼈 까는 소리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