悲戀의 시인 이옥봉(李玉峰)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요즈음 님께선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달 드는 사창에 소첩은 한이 많답니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만약 꿈속의 넋에게 다닌 흔적을 남기게 한다면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그대 문앞의 돌길 반은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이 시는 '운강께 드리는 글(贈雲江)' 이라고 시제 붙어 있으나, 꿈속의 넋(夢魂)라는 제목이 훨씬 맛깔스럽고 가슴에 와 닿는다(사실 시 본문 속에 있는 字를 그대로 빌려 詩題로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인지라 夢魂은 정식 제목은 아닐 것임). 이 시가 옥봉의 시중 가장 널리 회자되고 있는데, 아마도 남편인 운강 조원(趙瑗)에게 내침을 당한 뒤에 낭군을 그리며 지은 시일 것이다.
지봉유설이 전하는 황당 스토리
조선시대의 백과사전 격인 이수광(1563~1568)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옥봉(玉峰)에 대한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나온다. 인조 때 明나라에 사신으로 간 승지 조희일이 명의 대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조선 여인의 詩라며 '옥봉시집'을 보여줘 깜짝 놀란다. 그가 이르길 "40년 전 바닷가에 괴이한 주검이 떠돈다 하여 건저 보니 온 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의 시체였다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보니 안쪽에 빽빽이 시가 적혀 있고 '해동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적혀있었는데, 시를 읽어 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이라 이렇게 책으로 엮었소이다." 라 하였다나... 조원은 그의 아버지이고 이옥봉은 庶母였으니 아니 놀랠 수 있겠는가. 이 황당한 이야기는 옥봉이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정처없이 떠돌다가 자기가 쓴 시를 몸에 두루고 물에 뛰들었다는 저잣거리 野話의 후편인 듯한 혐의가 짙다(옥봉은 자살한 게 아니라 임진왜란 중 죽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천재 시인 이옥봉
江涵鷗夢闊(강함구몽활) 강속에 잠긴 갈매기 꿈은 넓고
天入雁愁長(천입안수장) 하늘을 나는 기러기 시름 깊어라
죽서루(竹西樓)란 제목의 두줄짜리 10字의 짧은 시인데 오히려 장부의 웅혼한 꿈조차 엿보인다. 조선 중기 문인이며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신흠(申欽, 1566~1628)은 그의 淸窓軟談에서 "古今의 시인 중에 (남녀를 불문하고) 이에 비견할 詩句를 지은 적이 없다."고 했다. 고려조 帝王韻紀를 쓴 이승휴(李承休)를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관동팔경의 제1루인 죽서루에 올라 빼어난 절경을 읊었으나 옥봉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다음은 허균이 극찬한 시(雨), 이중에도 특히 3구와 4구가 아름답다 평하였다(구름 사이로 흘러나온 햇살을 은빛 댓가지라 표현했는데 감성이 메마른 필자는 도통..)
終南壁面懸靑雨(종남벽면현청우) : 남산 벼랑에 푸른 비 걸려있고
紫閣霏微白閣晴(자각비미백각청) : 보라빛 누각에 흩뿌려 하얀 누각은 개었는데
雲葉散邊殘照淚(운엽산변잔조루) : 구름 터진 사이로 저녁 햇살 흘러나와
漫天銀竹過江橫(만천은죽과강횡) : 하늘 가득 은빛 댓가지 강을 가로 지른다
허균은 "나의 누님 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옥봉이란 여인이 있었는데, 그 시가 자못 맑고 씩씩하여 여인의 태가 나지 않는다." 하였다고..
왕손의 서얼로 태어나
옥봉은 선조대왕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충북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의 庶女로 태어나, 어려서 부터 한량인 아버지에게 글과 시를 배웠는데 너무도 글재주가 뛰어나 주위를 놀라게 했다.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첩살이 밖에 할 수 없음을 알자, 시집갈 생각을 버리고(사실 초혼에 실패함)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와서 내노라하는 시인 묵객들과 어울리며 지낸다(요즘 얘기로 하자면 글 꽤나 한다는 한량들이 자주 드나드는 기방에 나가 시구를 주고 받는 먹물 알바(?)로 뛰었다고나 할까--이런 야그 잘못 나가면 혹 옥봉의 열성팬들에게 뭍매를..?). 암튼 옥봉의 시는 재기발랄하고 참신하여 많은 선비 한량들의 사랑을 받았다.
옥봉이 왕손임을 보여주는 시, 영월 가는 길(寧越道中),
五日長關三日越(오일장관삼일월) 닷새거리 긴 고개를 사흘에 넘어서자
哀辭唱斷*魯陵雲(애사창단로능운) 노릉은 구름 속에 애달픈 노래 조차 끊어져
妾身亦是王孫女(첩신역시완손녀) 첩의 몸도 또한 왕손의 여인이라서
此地鵑聲不忍聞(차지두성불인문) 이곳의 두견새 울음소리 차마 듣기 어려워라
*노릉(魯陵)은 단종의 묘, 실제로 옥봉은 단종 복위운동에도 관여하였다함.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당시풍(唐詩風)의 5언절구 한수,
玉峯*涵小池(옥봉함소지) : 옥봉이 잠긴 작은 연못
池面月涓涓(지면월연연) : 못 위에 달빛이 은은하다
鴛鴦一雙鳥(원앙일쌍조) : 원앙새 한쌍이
飛下*鏡中天(비하경중천) : 거울 속 하늘로 날아 든다
*아마도 산기슭에 있는 집인지, 멋진 봉오리가 연못에 비친다는 뜻이면서 자신의 이름(玉峰)을 써서 운치를 더했네요
*연못이 얼마나 맑았으며 거울속 하늘(그림자)라 표현했을까.
그리고 가을을 노래한 무공해(?) 시(秋思),
翡翠簾疏不蔽風(비취염소불폐풍) : 비취 발 성글어 바람 막지 못하고
新凉初透碧紗襱(신량초투벽사롱) : 선선한 기운 푸른 깁치마에 스며든다
涓涓玉露團團月(연연옥로단단월) : 작은 이슬 방울에 반짝이는 달빛
說盡*秋情初夏蟲(설진추정초하충) : 가을 심사 풀어내는 초여름 풀벌레 소리
*참으로 불가사의 한 여인이다. 가을에 초여름 벌래 소리를 듣다니...
사랑에 빠지고...詩를 버리고..
옥봉은 시를 잘하는 젊은 선비 조원을 흠모하고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된다. 옥봉의 사랑을 알게 된 아버지 이봉은 조원을 찾아가 딸을 첩으로 받아 달라고 간청했지만, 이미 결혼한 몸인 조원은 거절한다. 딸을 너무도 사랑했던 이봉은 체면을 따지지 않고 조원의 장인인 이준민에게 도움을 청해 결국 소실로 들어가게 한다. 자기 딸을 첩으로 들여 달라고 사위될 사람의 장인에게 청을 넣은 아버지나, 자기 딸의 시앗이 될지도 모르는 여인을 첩으로 주선한 장인이나 대단하다 할지 아니면 그 시절엔 이런 건 별일도 아니었는지 나 원참....그러나 이 때 옥봉은 자기의 운명을 바꿔놓을 엄청난 언약을 한다, 다시는 시를 짓지 않겠다고...
別恨(별한)-이별의 한
明宵雖短短(명소수단단) : 임 떠나는 내일 아침 아무리 짧더라도
今夜願長長(금야원장장) : 임 만나는 오늘 밤은 길고 길었으면
鷄聲聽欲曉(계성청욕효) : 닭우는 소리 들리고 날이 밝아오니
雙瞼淚千行(쌍검루천행) : 두 뺨에 온통 천갈래 눈물이 흐르네
이 시 한수로 버림을 받고,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손을 좀 써달라 한다. 사정을 들어본 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해,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문제의 시 한수를 써 보낸다.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 참빗에 물로 기름삼아 빗습니다.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 저의 신세가 직녀 아닐진대
郎豈是*牽牛(낭기시견우) 낭군이 어이 견우가 되리이까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빗대어 죄가 없음을 말한 것으로, 견우의 한자가 소(牛)를 끌고(牽) 간다와 같아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라 할 수 있네요. 물론 이시로 산지기 남편은 풀려나고..
내처진 후에도 변함없이 낭군을 그리워하며
조원이 속이 좁아선지 이 시 한수를 빌미로 옥봉을 내친다. 그러나 조원은 절세의 용모와 문장을 갖춘 여인의 재능을 독점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첩실이란 얼굴이 예쁜 것만으로도 풍류 넘치는 한량과 시인 묵객들의 눈요기 감이 되기 십상인데 詩文에도 능했으니 말이다. 혹자는 옥봉의 글재주에 열등감을 느껴 자격지심에 내쳤다 하나, 그런 것 만은 아닌 듯 싶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를 버린 낭군을 더욱 그리워하며 언제라도 다시 돌아 올 것으로 굳게 믿고 기다리는데.., 심금을 울리는 빼어난 문장은 거개가 이 시기에 쓰여졌으니...
방안(閨中)에서 기다리다,
閨情(규정)
有約郞何晩(유약랑하만) : 약속했는데 임은 어찌 늦으시나
庭梅欲謝時(정매욕사시) : 뜰에 매화는 피려 하는데
忽聞枝上鵲(홀문지상작) : 홀연히 들리노니 가지 위 까치소리
虛畫鏡中眉(허화경중미) : 부질없이 거울보고 눈썹 그려봅니다
이 때까지는 그래도 낭군이 가끔은 다녀갔는지...
閨情(규정2)
平生離恨成身病(평생이한성신병) :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
酒不能療藥不治(주불능료약불치) : 술로도 약으로도 못 고친답니다
衾裏泣如氷下水(금리읍여빙하수) : 이불 속 눈물은 얼음장 밑의 물 같아서
日夜長流人不知(일야장류인부지) : 밤낮을 흘러도 남들은 모르네요
참으로 처절하네요, 그 기다림이...
七夕-칠석
無窮會合豈秋思(무궁회합기추사) : (견우 직녀는) 끊임없이 만나니 어찌 가을 시름 있을까
不比浮生有離別(불비부생유이별) : 덧없는 인생의 이별과 견줄 수가 없네
天上却成朝暮會(천상각성조모회) : 하늘에서는 도리어 (견우성 직녀성이) 조석으로 만나는데
人間漫作一年期(인간만작일년기) : 인간들은 부질없이 일년 한번 만난다 하네
이제, 기다리다 못해 누각에 올라..
卽事(즉사)-뜸금없이
柳外江頭五馬嘶(유외강두오마시) : 버드나무 너머 강 언덕에 다섯 말이 울고
半醒愁醉下樓時(반성수취하루시) : 술이 반쯤 깨자 시름에 겨워 누각을 내려올 때
春紅欲瘦臨粧鏡(춘홍욕수림장경) : 봄날 붉은 꽃들 시들어 가는데 경대 곁
試畵梅窓却月眉(시화매창각월미) : 매화 핀 창가에서 반달같은 눈썹을 그려보네
술이 반쯤 깨어도 임 오실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부질없이 눈섭 그리고 화장을... 가엾은 여인이여~~
離愁(이수) : 이별의 시름
深情容易寄(심정용이기) : 속마음을 쉬이 임에게 전해드리려
欲說更含羞(욕설갱함수) : 말로 하려니 더욱 부끄럽네요
若問香閨信(약문향규신) : 만일 님께서 내 소식 묻거든
殘粧獨依樓(잔장독의루) : 화장기 없이 홀로 누각에 기대있다 하소서
登樓(등루)-누각에 올라
小白梅逾耿(소백매유경) : 작고 흰 매화꽃 더욱 빛나고
深靑竹更姸(심청죽갱연) : 푸른 대나무는 한창 곱구다
憑欄未忽下(빙난미홀하) : 난간에 기대어 문득 내려오지 못하고
爲待月華圓(위대월화원) : 달이 둥굴게 환히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네
낮부터 높은 누각에 올라 임을 기다리는데, 달이 떠올라도 내려갈 줄 모르네,
樓上(누상)-누각에서
紅欄六曲壓銀河(홍란육곡압은하) : 붉은 난간의 여섯 노래가 은하수를 누르고
瑞霧霏微懸翠羅(서무비미현취라) : 상서로운 안개 흩날려 푸른 휘장에 걸려있다
明月不知滄海暮(명월부지창해모) : 밝은 달빛에 바다에 해 지는 줄도 몰랐는데
九疑山下白雲多(구의산하백운다) : 구의산 아래에는 흰 구름이 짙어지는구나
끝으로 옥봉의 용모에 대한 기록으로 조원의 친구인 윤선각(尹先覺)은 그의 만필집 聞韶漫錄에서 옥봉을 "시를 읊고 생각하는 동안에 손으로 부채(白疊扇)을 부치면서 때로는 입술을 가리기도 하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 처절하여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고 썼다고.. 아! 시절을 너무 일직 태어난 悲戀의 여인이여~~요즘에 태어났으면 이영애나 김태희가 울고 갔을 것을....

첫댓글 이 노래 참 듣기 좋구먼...신사동에 있는 빌라 드 베@#$%예식장에서 쓸만한 테너 목소리로 들은 기억이 나네요.....
조승지 너무 행복했던 것같아 부럽네 나도 시잘쓰는 뇨자 만날 날은 없을까
스필버그 감독에게 무릎 끓고 사정해서
다음 작품 " Back to the Lee's Dynasty "에
꼭 주연으로 써 달라고.......
아! 보고프다! 그 이름 옥봉~~~
황진이를 주제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많은데 옥봉을 소재로한 영화가 없다는 것은...
시는 뛰어난데 너무 한 남자에게만 매달린 게 드라마의 소재로 부적합 한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