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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전세조공물(田稅條貢物)
정의
전세의 편리한 수송을 위하여 전세의 일부를 정포·꿀·기름·잡곡 등으로 내게 한 것.
개설
과전법의 전세 수취 규정에 의하면 논에서는 조미(糙米)를, 밭에서는 잡곡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전세 수취에서 곡물 대신에 정포(正布)·면포·명주·모시 등을 거두기도 하였는데, 이를 전세조공물(田稅條貢物)이라 하였다.
전세조공물은 ‘전세소출공물’ 혹은 ‘전세소납공물’이라고도 하며, 전세에서 나오는 공물 혹은 전세에서 바치는 공물을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포류(布類)는 전세백저포(田稅白苧布)·전세포화(田稅布貨)·전세포자(田稅布子) 등으로 지칭되었고, 참기름·들기름과 꿀[蜜]·밀랍[蠟] 등이 팥·메밀·중미(中米)와 함께 전세에 포함되었다.
전세조공물이 상납되는 중앙 각사는 주로 왕실공상(王室供上)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왕실과 관련 있는 내자시·내섬시·인순부·인수부 등에서는 공상에 필요한 기름[油]·꿀·포를, 예빈시에서는 사신의 연향(宴享)이나 제향에 사용할 기름·꿀을, 의영고에서는 사신 접대나 궁궐에서 필요한 기름·꿀을, 제용감에서는 의복을 하사하거나 왜인(倭人)에게 답례·진헌(進獻)하는 등에 필요한 포류(布類)를 위전(位田)에서 수취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과전법 체제 하에서 전세는 쌀·보리·밀 등의 곡물류로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곡물 대신에 정포·면포·명주·모시 등으로 징수하기도 하였다. 수송에 따르는 농민의 고역을 다소 완화하기 위해서였다.
내용
전세조공물의 종류에 대해서는 1401년(태종 1) 5월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에서 올린 내용에 잘 나타나 있었다. 즉, 제고(諸庫)·궁사(宮司) 및 호조·공조·내부시·광흥창 등에서는 소속되어 있는 위전(位田)에서 포·꿀·밀랍·기름·모시·미포(米布) 등을 전세 명목으로 징수하였다[『태종실록』 1년 5월 3일].
과전법 하에서 전세는 수확의 1/10을 내는 조세 비율[租率]에 따라 1결당 30두라는 세액이 법제화되어 있었고, 농사의 작황에 따라 조세를 감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세조공물은 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 정액 전세였다. 1409년에는 전세조공물도 농사의 작황에 따라 감면되는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이 적용되었다[『태종실록』 9년 3월 19일]. 따라서 풍흉에 따라 각사의 세금 수입은 매년 달라졌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1445년(세종 27)에는 국용전제(國用田制)를 시행하였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즉, 과전법 하에서는 전국의 토지가 서울[京中]의 각사위전(各司位田)과 외군자위전(外軍資位田)으로 나뉘어 속해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작황에 따라 전세 수입에 차이가 생겼다. 그리고 서울의 각사에서는 그 부족분을 으레 외군자에서 빌려서 충당하였다. 그런데 각사위전제의 형태는 각사별로 개별적으로 운용되어 그 계산이 번잡하였고, 새로 설정된 공법으로 계산해도 번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주군(州郡)의 역전(驛田)·아록전·공수전을 제외한 서울의 풍저창·광흥창위전과 각사위전을 모두 혁파하고 이를 국용전(國用田)으로 귀속시켰다.
그리고 외방 각관은 서울의 각사에 납부하는 일정한 수를 계산하여 민가에 나누어 납부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 관(官)의 국고에 납입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면 계산이 편리할 뿐 아니라 민간에서 납부하던 미곡(米穀)·밀랍·포화(布貨)의 고되고 헐한 것이 거의 고르게 된다고 보았다. 각사위전제 하에서의 전세조공물인 미곡·밀랍·포화는 미곡의 시중 가격으로 적당히 환산해서 정한 것이었지만 풍흉 때문에 매년 시가와 큰 차이가 났다. 더욱이 그것들은 각사에 개별적으로 분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의 부담이 관청에 따라 각각 달랐다.
국용전제가 시행되면서 전세조공물도 개정되었다. 1437년(세종 19) 공법(貢法)에서는 정포 1필에 하전(下田) 1결 20복(卜)이 할당되었고, 그 소출 액은 콩 19두(斗) 2승(升)이던 것이 이때에 이르러 19두로 정해졌다. 그러나 기름과 밀랍의 경우는 기름 1두에 콩 9.76두, 밀랍 1근에 콩 19.504두에 준한다는 수정된 수치만 확인될 뿐이었다.
변천
조선건국 초에는 전세로 내는 포의 값[田稅布價]이 정포 1필에 쌀 15두, 콩 30두였다. 1437년 공법이 제정되면서 19두로 개정되고, 이것은 또다시 12두로 개정되었다. 1469년(예종 1) 9월에는 정포 1필을 황두 10두에 준하도록 규정하였고, 이것은 성종대에도 계속되었다. 한전 매 1결당 전세로 내는 포화(布貨)는 건국 초에 정포 1필이 황두 30두에 준하던 것이 후에 20두·19두·12두·10두로 줄어들었다. 조선후기 효종대 호서대동법을 시행한 이후에는 전세조공물을 쌀과 콩으로 통일하고 이를 위미(位米)·위태(位太)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강제훈, 「조선초기의 전세공물」, 『역사학보』 158, 1998.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박도식, 「조선전기 전세조공물 연구」, 『인문학연구』 제8집, 2004.
이재룡, 「조선초기 포화전에 대한 일고찰」, 『한국사연구』 91, 1995.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점퇴(點退)
정의
중앙 각사에서 지방의 공물을 수납할 때 여러 가지 구실을 달아 퇴짜를 놓는 것.
개설
공물은 공안에 의거하여 대개 각사 → (각도 감사) → 각관 수령 → 각면(各面) → 각호(各戶)의 체계로 부과·징수되었다. 각 군현의 수령은 그해 군현에 분정된 공물을 마련하고 공리에게 주어 중앙 각사에 직접 납입하도록 하였다. 공리가 공물을 각사에 납부할 때 최종적 관문은, 수령이 발급한 공물명세서인 진성(陳省)과 공리가 가지고 온 공물을 각사의 관원이 대조·점검하는 간품(看品)이었다. 하지만 각사 관원의 간품은 형식에 불과하였고, 실제 그 실무는 각사의 이(吏)·노(奴)에게 맡겨져 있었다.
각사의 이는 동반 경아전(京衙前)인 서리(胥吏)를 가리켰다. 이들이 담당했던 주요 직무는 전곡의 출납을 비롯하여 공문서의 작성과 접수·전달, 보관·관리, 각종 기록을 베껴 적는 일, 그리고 연락하고 보고하는 등의 사무였다. 지방군현의 공리가 가져 온 공물의 수납도 이들이 담당하였다. 각사의 노비는 각사 또는 궁궐에서 잡역에 종사하던 노비[差備奴]와 관원을 따라다니며 시중드는 일을 하는 노비[根隨奴]가 있었다. 각사의 이노들은 공리가 가지고 온 공물과 수령이 발급한 공물명세서인 진성을 대조할 때 으레 뇌물을 요구하였다. 만약 뇌물을 주지 않으면 공물의 품질이 아무리 우수해도 억지로 흠을 잡아 접수하지 않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각사의 이노 대부분에게는 급료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노들은 공물 수납 과정을 통하여 자신들의 노역 대가를 얻었다. 1470년(성종 1) 6월 국가에서 모든 공물을 수납할 때 수수료를 제정하였던 것도 각사 이노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수수료는 원래 종이[紙]로 납부하였으나 후에 면포로 납부하였다. 그러나 각사의 이노들은 규정된 수수료[作紙價]보다 많이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로 인해서 공리들이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심지어 일자리를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각사의 이노가 규정된 수수료보다 더 거둘 경우에는 공리가 사헌부에 고발하도록 허락하였다. 사헌부도 또한 부정한 이노를 자주 적발하여 죄를 물었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부정은 끊이지 않았다. 1472년(성종 3) 3월에는 각사 이노들이 저지르는 부당한 공물 점퇴에 대한 감독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 후 『경국대전』 단계에 와서는 감찰을 파견하여 그 수납의 책임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내용
각사의 이노가 공물을 점퇴하면 공리는 군현에 돌아가서 백성에게 다시 공물을 거두어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공리가 서울과 본 고을을 왕복하는 사이에 때로는 공물을 잃어버리기도 하는 등 그 폐단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가는 각사에서 공물을 점퇴할 경우에는 반드시 호조에 신고하여 재심사를 받도록 하였고, 그 점퇴가 부당한 경우에는 관리와 사령을 아울러 벌주도록 하였다.
각사의 이노가 공물을 부당하게 점퇴하였을 때 공리가 신고하는 길이 열려 있었지만, 공리는 이를 신고하지 못하였다. 설사 그 부당함을 알리더라도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도리어 관리들의 보복이 따르기 일쑤였다. 따라서 공리가 각사에 공물을 납부하기 위해서는 각사 이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변천
각사의 이노는 외방 공물을 수납할 때 그 역할을 이용하여 처음에는 사주인(私主人)과 결탁해 방납을 일삼았다. 그러나 예종대 이후에는 직접 방납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1469년(예종 1) 6월 공조 판서 양성지는 각사의 노자들이 그 실무를 빙자하여 생초(生草) 수납 시 풀이 푸른데도 시들었다고 하여 물리치고, 돼지 수납 시에는 살찐 돼지를 수척하다 하여 물리친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남문으로 물리쳤던 생초를 서문으로 받아들이고, 집에서 기르던 돼지를 대납하며 점퇴한 돼지는 자기 집에서 길러 후일의 대납을 기한다고 하였다. 또한 공리가 바치는 실[絲]의 품질이 우수해도 좋지 않다고 하고, 자기들이 대납하는 실은 품질이 좋지 않아도 좋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많은 값을 주고 그들이 대신 바치도록 한다고 하였다[『예종실록』 1년 6월 29일]. 그들이 공물 대납을 할 때에는 같은 무리는 물론이고 상급 관원과도 결탁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하였다. 거기에는 각사마다 현직에 있는 관원은 물론이고 전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강승호, 「조선전기 사주인의 발생과 활동」, 『동국역사교육』 7·8, 1999.
김진봉, 「사주인연구」, 『대구사학』 7·8, 1973.
박도식, 「조선전기 공리 연구」, 『인문학연구』 3, 2000.
박평식, 「조선전기의 주인층과 유통체계」, 『역사교육』 제82집, 2002.
정역호(定役戶)
정의
정부의 특정 기관에 예속되어, 생업에 따라 공물·진상품을 납부하던 민가.
개설
정역호는 특수한 물품을 공물과 진상으로 상납하는 대신 전세 이외의 여러 잡역을 모두 면제받았다. 응사(鷹師), 채약인[藥夫], 정상탄정역호(正常炭定役戶), 염간(鹽干), 생안간(生雁干), 생선간(生鮮干), 산정간(山丁干), 포작간(鮑作干), 소유치[酥油赤], 아파치[阿波赤], 재인(才人), 화척(禾尺) 등이 정역호에 속하였다. 이외에도 특수한 물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일반인 혹은 군사를 동원하여 정역호와 같이 그 의무를 명시해서 ‘모모군(某某軍)’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소목군(燒木軍)·해작군(海作軍)·취련군(吹鍊軍)·채포군(採捕軍) 등이 그런 예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정역호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그 직은 세습되었다. 약재의 경우 지방관은 의원(醫院)과 의생(醫生)을 설치하고 약부(藥夫)라고도 불렀던 채약인(採藥人) 및 약포(藥圃)를 두어 향약을 채취하도록 하였다. 이 약재는 전의감·혜민서·제생원·동서대비원 등의 중앙 의료 기관에 상납되었다. 약재 채취는 그 종류에 따라 각각 일정한 시기가 있었는데, 특히 채취 시기가 매우 중요하였다.
고려후기 이래 응안간(鷹雁干)은 응방(鷹坊)에 소속된 자였다. 응방에는 실무에 종사하는 응인(鷹人)이 있어서 매를 잡거나 길렀다. 조선시대에는 매의 진상이 더욱 확대되어 1442년(세종 24) 이후에는 일반 민가에서도 매를 잡도록 하였고, 그 대신 이들의 잡역과 요역을 면제해 주었다. 응사(鷹師)는 왕의 매 사냥[放鷹畋獵]과 행행(幸行)·강무(講武) 때 왕을 호위하였다.
내용
정역호는 그 직이 세습되었다. 예를 들면 경기 좌우도에는 사수감 수군에 소속되어 땔나무[燒木]를 상납하는 소목군(燒木軍)이 있었다[『태조실록』 7년 12월 29일]. 충청·황해·강원도에는 선공감·사재감 등에 소속되어 목탄(木炭)을 제조 상납하는 정상탄정역호(正常炭定役戶)가 있었다. 한강에서 통진에 이르는 물가의 각관 양민·공천(公賤) 중에서 선발한 120명을 3번(番)으로 나누어 매일 물고기를 잡아서 상납하는 사옹방 소속의 생선간(生鮮干)도 있었다[『세종실록』 23년 3월 10일]. 그 밖에 응사(鷹師)·아파치[阿波赤]·소유치[酥油赤]·약부(藥夫) 등이 있었다.
변천
정역호 중에는 생선간·응사와 같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것도 있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폐지되고 그 공납역이 일반 민가에 전가된 것도 적지 않았다. 가령 땔나무를 상납하던 소목군은 1398년(태조 7) 12월에 혁파되어 민가에 땔나무 1태(駄) 이하의 비율로 부과되었다[『태조실록』 7년 12월 29일]. 소유치는 1421년(세종 3) 11월에 폐지되고 그 소유는 민가에 전가되었다[『세종실록』 3년 11월 28일].
참고문헌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류승원, 「조선초기의 ‘신량역천’ 계층 -칭간·칭척자를 중심으로-」, 『한국사론』 1, 1973.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제역(除役)
정의
공물을 부과하는 전결 외에 별도의 결수를 확보하여 각 군현의 운영에 필요한 잡다한 비용을 마련하는 것.
개설
‘제역’이라는 말 자체는 역을 제외시킨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민호(民戶)가 원래 져야 하는 역에서 제외되는 대신에 다른 부담을 전담하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므로 제역은 단순히 역에서 면제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제역은 군현 안에서 각각의 민호가 져야 할 부담의 형평성을 고려한 조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공물(貢物) 분정은 거의 건국 초기부터 토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민호별 토지 소유량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공물을 분정하였지만, 이것은 곧 역민식(役民式)에 의한 전결(田結) 단위별 분정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역민식은 8결 윤회분정(輪回分定) 방식을 의미하며, 8결 윤회분정이란 경작지를 8결 단위로 묶어 1부(夫)라 하고, 부 단위로 돌아가며 공물을 마련하는 방식을 뜻하였다. 이 방식은 이전 호등제에 비하면 한결 발전된 내용이었지만, 역시 많은 문제를 내포하였다. 그 결과 각 군현에서 자연스럽게 제역의 방식이 병행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조선전기에 공물의 수취는 8결 윤회분정의 방식과 제역의 방식이 이원적으로 운영되었다. 중앙에 바쳐야 할 공물과 진상·방물(方物)은 대개 전자의 방법으로 마련되었고, 각 군현 자체의 잡다한 수요는 주로 후자의 방법으로 마련되었다. 법적으로는 전자가 조선전기 공물 분정 방식을 대표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제역 역시 중요한 공물 조달 방식이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8결 윤회분정과 제역의 2가지 방식 중 후자가 훨씬 부담이 덜하였다. 8결 윤회분정은 공물 수취가 부정기적이고 할당되는 양도 불규칙하였지만 제역의 방식은 적어도 그러한 문제를 최소화하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드물기는 하였지만, 군현 안의 모든 공물을 제역 방식으로 거두는 곳들도 자연적으로 생겨났다. 이런 곳들은 적어도 역민식이 발표된 시기나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나아가 중앙정부 안에서조차 이 방식을 확대하자는 요구가 있었다. 토지 1결당 무조건 1두씩의 쌀을 거두어 공물을 대신하자는 대동제역(大同除役)에 대한 요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 이 방식이 뚜렷이 확산되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제역은 처음에 진상과 같은 중앙 수요에 응하기 위해서 실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상은 지방 수령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도 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더구나 진상품의 경우는 일반 공물보다도 더욱 높은 품질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물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각 군현에서는 중앙 수요에 대비하기 위해서 이를 전담하는 제역 전결(除役田結)을 설정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역은 각 군현 내부 수요를 충당하는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대동법이 성립된 이후에조차 제역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대동법으로 지방 재정이 새롭게 마련되기는 하였지만, 역시 충분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대동법 이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각 군현의 부족한 재정이 수령의 자율적 혹은 자의적인 수취를 정당화해 주었다. 그 물질적 기반이 바로 관중제역(官中除役)이었다.
제역이 중앙에 바치는 물품 이외에도 각 군현 자체의 수요를 위해서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제역과 관중제역은 구분되었다. 말 그대로 관중제역은 제역 일반 중에서도 관 자체의 수요를 위해서 마련되었던 것을 뜻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역의 대부분은 관중제역의 형태로 이루어진 듯하다. 그리고 관중제역전(官中除役田)은 경작 가능한 토지를 토지대장에 기록하지 않고 숨기거나 누락시킨 은루결(隱漏結)로 충당되었다.
관중제역전을 만드는 일은 수령의 개인적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요역과 공납의 운영이 각 군현에서 거의 전적으로 수령의 자율권에 속하였듯이 제역에 관한 사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자연히 이것은 일찍부터 공물에 대한 무리한 수취로 이어졌다. 제역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중앙정부가 파악하는 전결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가 각 군현의 운영비를 충분히 지급하지 못하는 한, 관중제역전의 존재는 불가피하였다. 이것은 ‘인리 제역(人吏除役)’의 경우에서 잘 나타났다. 인리제역이란 인리, 즉 서리가 가진 제역 전결이 아니라 서리가 활동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조달하는 전결을 말하였다. 대개 ‘○○제역’이라고 말할 때, ‘○○’는 제역 전결에서 조달된 물자의 사용 목적을 말하였다. 인리제역은 서리의 사사로운 용도가 아니라 지방관청의 경비로 쓰였다.
변천
제역은 조선시대 어떤 특정 시기에 존재하였던 관행이 아니라, 사실상 전 시기에 걸쳐서 존재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미 태종대부터 제역의 관행이 나타났고, 이것은 중앙정부도 허용하는 사항이었다. 비록 대동법의 시행 규정인 대동사목도 제역을 금하였지만, 대동법이 거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17세기 말까지도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제역에 대하여 규제를 하였지만 지방 재정에 대한 고려가 매우 미흡한 상태에서 지방 차원의 잡역은 여전히 제역의 방식으로 충당되는 경우가 많았다. 백성의 입장에서도 특정 관수품을 부담하고 다른 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제역은 지역에 따라 결(結)이나 호(戶) 단위로 운영되었고, 관(官)은 물론 민간 관련 기관·기구의 재정 운영에도 광범위하게 채택되었다. 제역을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졌지만 지방 재정에 대한 별도의 조치가 어려웠던 정부는 이를 사실상 묵인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한편 균역법(均役法) 실시를 계기로 제역은 더욱 확산되는 모습을 보였다.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의 시행으로 각 관아에 부족해진 재원을 균역청에서 지급해 주는 정책[給代]은 철저히 중앙 재정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재정난에 봉착한 지방의 관아는 별도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으로 제역의 방식을 활용하였다. 특히 주로 결 단위로 부과되던 지방 잡역에 대한 규제가 가해지자 이제는 마을이나 민호를 대상으로 잡역을 부과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같이 18세기 중엽 이후 제역이나 이와 유사한 형태의 각종 수취 방식은 지방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광범위하게 채택되었다.
참고문헌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송양섭, 「조선 후기 지방 재정과 계방의 출현: 제역 및 제역촌과 관련하여」, 『역사와 담론』 59, 2011.
이정철, 「조선시대 공물 분정 방식의 변화와 대동의 어의(語義)」, 『한국사학보』 34, 2009.
제역촌(除役村)
정의
조선시대 특정한 역을 전담시키기 위하여 국가가 다른 역 부담에서 제외시켜 준 마을.
개설
제역(除役)은 글자 상으로는 역을 면제한다는 뜻이나, 실제 내용은 특정한 역을 전담시키기 위하여 국가가 다른 역 부담에서 제외시켜 주는 것을 의미하였다. 제역은 지방의 각종 행정기관을 비롯하여 서원·향교까지 채택하여 관행화되었다. 제역촌의 설정은 행정 실무를 맡고 있는 이서층의 뜻에 좌우되었다.
전정(田政)의 운영을 둘러싸고 이서의 중간 횡령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는데, 양호(養戶)가 일반적인 형태였다. 이서층이 행하는 양호는 수세 대상인 민전을 제역촌으로 설정하고, 민전에서 내야 할 조세를 착복하는 것을 말하였다. 대신 민전에서 거두어야 할 전세와 대동세는 다른 농민의 민전에 부과하였다.
내용 및 특징
제역촌의 유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리별로 특정한 세를 부담시키고 다른 부세를 면제해 주는 관행은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되었다. 제역은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촌락 단위로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역촌은 읍치 지역 운영을 위한 읍내촌을 비롯하여, 향교·역(驛)·원(院)·병영·수영·점(店)·창고·포(浦)·고개[嶺] 등 특수한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과 기구를 중심으로, 중앙의 궁방전·둔전의 영향권에도 설치되었다. 재지사족의 묘촌(墓村)과 복주촌(福酒村), 사찰 주변의 사하촌(寺下村)도 제역촌에 포함되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읍내촌(邑內村)·학궁촌(學宮村)·역촌(驛村)·원촌(院村)·궁둔촌(宮田村)·둔전촌(屯田村)·사촌(寺村)·영하촌(營下村)·점촌(店村)·창촌(倉村)·포촌(浦村)·영촌(嶺村)·견여촌(肩輿村))·묘촌·복주촌 등의 다양한 제역촌 형태가 기록돼 있다.
정약용은 제역촌을 다시 국제(國除)와 읍제(邑除)로 구분하였다. 국제는 궁전촌·둔전촌·학궁촌·역촌 등 국가 차원에서 설정한 제역촌이었다. 읍제는 계방촌(契房村)·점촌 등 지방 차원에서 설정한 제역촌이었다.
변천
18세기 들어서 정부는 각 기관의 개별적 수취에서 나타나는 폐단을 해소하고 나라 운영의 효율성을 꾀하기 위하여, 각 기관의 재정 액수를 일정액으로 고정시키는 비총제(比摠制)적 부세 운영의 방식을 채택하였다. 1711년(숙종 37) 「양역변통절목」에서 강조된 이정법(里定法)이 실시된 이후 수취 책임이 촌락으로 일정 부분 이전되자, 촌락은 공동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중요한 단위가 되었다[共同納]. 이로써 면역의 특권을 누리고 있던 구래(舊來)의 제역촌들이 피역처로서 부각되었다.
1750년(영조 26) 균역법 실시는 제역의 방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수령들이 부당하게 징수하는 가징(加徵)의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토지에서 거두던 잡역세를 호역(戶役)이나 다른 형태로 확보하는 과정에서, 제역의 관행은 더 확산되었다.
균역법 실시로 전라도 연해 지역에 있는 어염(魚鹽) 관련 제역촌은 모두 혁파되었다. 옥구의 연해 지역 11개 마을은 어염을 납부하는 대신 신역(身役)과 호역 등을 면제받는 제역촌이었다. 균역법으로 어염세가 혁파되자, 각 군현에서는 이들 제역촌에 호역을 부과하여 보민청(補民廳)이라는 민고(民庫)를 만들고 각종 지출에 충당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목민심서(牧民心書)』
강성복, 「조선후기 홍성 성호리 동제의 성립과 신격의 변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10-2, 역사문화학회. 2007.
배기헌, 「18·19세기의 계방촌」, 『계명사학』 20, 계명사학회, 2009.
송양섭, 「조선후기 지방재정과 계방의 출현-제역 및 제역촌과 관련하여」, 『역사와 담론』 59, 호서사학회, 2011.
조등(刁蹬)
정의
관원이 근거 없이 물건 값을 조작하여 높게 책정하는 것.
개설
방납(防納)은 각 군현에서 중앙 각사에 바치는 공물·진상 가운데 그 지역 백성이 준비할 수 없는 물품을 그 군현의 경주인(京主人)이나 관청의 관속(官屬) 등이 대신 바친 후에 그 값을 군현의 농민에게 받아 내는 것을 말하였다. 조등은 이 같은 행위가 가능하도록 관속이나 수령과 결탁하여 교활하게 추진시켜 나가는 것을 말하였다.
내용 및 특징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에는 수많은 공물·진상을 각 군현에서 시기에 맞추어 중앙으로 올려 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들 물품 중에는 그 고을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도 있고, 시기에 맞추기 어려운 것도 있고, 또 올려 보내도 품질이 떨어진다며 수납되지 못하는 이른바 점퇴(點退)되는 것도 있었다. 그러자 상납의 책임이 있는 군현에서 공물을 서울에서 마련하여 납품하도록 청탁하는 일들이 생겨났다. 이때 그 수고에 대한 보수가 적지 않아 이 이익을 노리는 부정행위가 점차 많아지게 되었다. 나아가서는 각 군현에서의 공물 상납을 아예 포기시키고 몇 배에 달하는 대가를 억지로 긁어 가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행위를 합쳐서 방납(防納)·조등(刁蹬)이라 일컬었다.
중앙 각사에서 공납 업무를 담당하던 자들은 지방 각 군현에서 상납하는 공물에 대하여 갖가지 구실을 붙여 점퇴한 다음, 그 공납 의무를 대행하고 나서 비싼 대가를 강제로 징수하였다. 그 주역이 사주인(私主人)과 각사이노(各司吏奴)였다.
지방 각 군현이 공물을 납부해야 할 중앙 각사는 여러 곳이므로 지방관을 대리해 이들 사주인이 공물을 방납하였다. 각사이노는 공물 수납을 담당하였던 실무자라는 점에서 방납 활동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각사이노는 공리(貢吏)가 바치는 공물이 아무리 품질이 좋다고 하더라도 온갖 이유로 물리치고 방납한 후에 성화같이 독촉하면, 공리는 견책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요구를 들어주고 나서야 겨우 바칠 수 있었다.
변천
공물을 현물로 대신 쌀·포(布)로 납부하는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조등 행위는 크게 줄어들었다.
참고문헌
박도식, 『조선 전기 공납제 연구』, 혜안, 2011.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진상(進上)
정의
지방 장관이 국가 제사에 사용하는 음식이나 각사에 필요한 물품을 상납하는 것.
개설
본래 진상이란 공헌(貢獻)과 같은 뜻으로, 아래에서 위로 바치는 것을 말하였다. 그 명목은 크게 물선(物膳)·방물(方物)·제향천신(祭享薦新)·약재(藥材)·응자(鷹子) 등과 별례진상(別例進上)으로 나누어졌다. 진상 물자에는 짐승류·어류·조류·채소류·과실류·기구류를 비롯하여 모피·약재류, 그리고 기타 장식품 등이 포함되었다.
공물은 중앙에서 지방군현에 분정하였지만, 진상은 관찰사와 병마·수군절제사에게 분정하였다. 관할 군현에 대한 분정은 이들 문무관의 권한에 위임하였고, 민가에 대한 분정은 수령에게 위임하였다. 그 제도는 공물과 성격을 달리했지만, 생산되지 않거나[不産] 구하기 어려운[難備] 물자의 조달과 상납 등은 공물과 비슷했다. 공물은 중앙 각사에 상납되었고, 진상 물자는 전적으로 궐내 각사(闕內各司)에 납입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진상은 공물과 달리 각도 관찰사, 병마·수군절제사를 비롯한 지방 장관이 왕에게 바치는 예물이었다. 주로 국가 제사에 사용하는 음식물이나 각사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관찰사와 절도사는 이러한 물품들을 각관의 수령에게 분정하였고, 분정받은 지방관은 진상 물자를 갖추어 상납하였다. 진상은 각관에서 직접 준비하여 바치는 관비진상(官備進上), 각관의 민가에서 수취·상납하는 민비진상(民備進上), 정역호(定役戶)로 나뉘었다.
당번군사(當番軍士)를 역을 지거나 사냥하여 바친 조류(鳥類)·짐승류·어류와 채소·과일은 관비진상이었다. 정역호는 전문적인 기술 습득이 필요한 일이라 그 직이 세습되었다. 여기에는 사재감 소속의 소목군(燒木軍)·정상탄정역호(正常炭定役戶)·공염간(貢鹽干)·응사(鷹師)·약부(藥夫)·생선간(生鮮干)·소유치[酥油赤]와 생안간(生雁干)·아파치[阿波赤]·해작군(海作軍)·산정간(山丁干)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진상의 대부분은 민가에서 징수되었다.
내용
물선진상은 매월 정기 혹은 부정기적으로 왕실에 바치는 식료품을 말하였다. 조선초의 기록을 보면 왕·왕비·왕세자·전왕(前王)·전왕비가 그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지방관이 임의로 징수하였으나, 1419년(세종 1) 각 지방의 수령을 차사원(差使員)으로 삼아 정해진 날짜에 그 물목의 송장(送狀)과 물선을 사옹방에 바치도록 규정하였다[『세종실록』 1년 12월 22일].
방물진상은 명일(名日)에 바치는 명일방물과 왕의 행행(行幸) 때 바치는 행행강무방물(行幸講武方物) 등이 있었다. 명일이란 명절과 절일(節日)을 말하는데, 명절은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을 말하고 절일은 축일(祝日)을 말하였다. 이때는 갑주(甲冑) 등 병기(兵器)·모피·기구·백포(白布) 및 산해진미를 바쳤다. 또 왕이 선왕의 능에 참배하거나 온천에 목욕하기 위하여 행차할 때에도 진상물을 바쳤다. 강무라는 이름으로 봄가을 2차례씩 수렵을 위하여 지방에 나갈 때에는 그 지역의 관찰사가 차사원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
제향·천신진상은 시절제사(천신)를 비롯하여 왕실의 각종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바치는 것이었다. 원래 제사에 필요한 물품은 중앙의 각 기관에 맡겨져 있었다. 예를 들면 양이나 돼지는 전농시·내자시·전구서, 채소류는 침장고, 과실류는 상림원이나 혜민서·양현고·내자시 등이 맡아서 진상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담당 관청이 마련할 수 없는 것은 지방 각 관에 나누어 바치도록 하였다.
약재진상은 각 지방관이 지방에서 산출되는 이른바 향약(鄕藥)을 채취하여 내의원이라고도 불렀던 내약방에 상납하도록 한 것이었다. 지방관은 의원(醫院)과 의생(醫生)을 설치하고 약부(藥夫)라고도 불렀던 채약인(採藥人) 및 약포(藥圃)를 두어 향약을 채취하도록 하였다. 특히 채약인은 약재에 대한 지식, 채취 및 건조 등 특별한 기술을 익혀야 했으므로 정역호라고 하여 다른 잡역을 면제하고 세습제로 운영되었다.
응자진상은 고려후기 이래 설치된 응방(鷹坊)에서, 중국에 진헌(進獻)하거나 왕의 수렵에 사용하기 위하여 매를 바치던 것을 말하였다. 응방에서는 실무에 종사하는 응인(鷹人)이 있어서 매를 잡거나 기르는 일을 하였다. 이들 역시 특별한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대개는 가업으로 세습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매의 진상이 더욱 확대되어 1442년(세종 24) 이후에는 일반 민가도 여기에 편성되어 매를 잡아야 했다. 이 경우에 이들의 잡역과 요역이 면제되었다.
변천
진상물자는 관부 혹은 정역호에 의하여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점차 일반 민가에 전가되었다. 가령 사수감 소목군은 1398년(태조 7) 12월에 혁파되어 그들의 역이 민가에 전가되었다[『태조실록』 7년 12월 29일]. 소유치[酥油赤]는 1421년(세종 3) 11월에 폐지되어 역시 그 역이 일반 민가에 전가되었다 [『세종실록』 3년 11월 28일].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虎豹皮]이나 큰 사슴의 가죽[大鹿皮], 기타 포육류(脯肉類)의 마련은 당번군(當番軍) 혹은 엽호(獵戶)의 역이었지만, 이것 또한 일반 농민에게 마련하도록 한 일도 적지 않았다. 진상의 분정도 공물의 경우와 같이 생산되지 않거나[不産] 구하기 어려운[難備] 물자를 분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물자는 일반 민가에 전가되었으며, 공상아문(供上衙門)의 부족한 물자는 별례진상(別例進上)의 형태로 추가되어 부과되었다.
진상은 왕에 대한 예헌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또 방납인들의 이권이 개입되어 쉽사리 개선되지 못하였다. 조선후기에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1결당 쌀 12말[斗]씩을 징수하여 각 도와 군현에서 매년(해마다) 상납하던 진상물의 일부를 대동저치미로 구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법이 시행되었다고 해서 모든 진상이 대동세로 징수된 것은 아니었다. 천신(薦新)·약재(藥材)·삭선(朔膳)·명일물선방물(名日物膳方物)·인삼의 진상은 여전히 현물로 상납되었다.
참고문헌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Ⅲ』, 일조각, 1988.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德成外志子, 「조선후기의 공물무납제 -공인연구의 전제작업으로-」, 『역사학보』 113, 1987.
安達義博, 「18·19世紀前半の大同米·布·錢の徵收支出と國家財政」,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3, 1976.
진헌(進獻)
정의
조선에서 사행을 통하여 명나라와 청나라에 방물을 바치던 것.
개설
일반 기록에서는 왕에게 바치는 진상(進上)과 용어를 혼용한 경우도 있으나 법전에서는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비정기적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매 신년에는 하정사(賀正使), 황제의 생일에는 성절사(聖節使), 황태자의 생일에는 천추사(千秋使)를 정기적으로 파견하였다. 그 후 동지사(冬至使)를 한 번 더 보냈다. 이외에도 계품사(啓稟使)·사은사(謝恩使)·주청사(奏請使)·진하사(進賀使)·진위사(陳慰使)·변무사(辨誣使) 등의 명목으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하정사·성절사·천추사·동지사 정규 4사에는 진헌방물을 세공(歲貢)으로 가져갔고, 그 밖의 사행에도 세공방물수목(歲貢方物數目)에 준하여 진헌물목수(進獻物目數)가 제정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중국에 사신이 갈 때는 정기·비정기 사행을 막론하고 진헌물을 바쳤다. 중요한 진헌물은 말·돗자리·인삼·가죽·직물 등이었다. 조선은 이렇게 진헌을 통하여 중국과 장기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선진국의 발달된 문화를 수입하여 자국의 발전과 이익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내용
말은 정기·비정기 사행에 모두 바쳤는데, 후자를 별마(別馬)라고 하였다. 진헌하는 말은 색과 크기를 정하여 종류마다 수를 지정하였다. 정기 사행 때 진헌하는 말은 50필 정도였다. 크기는 세종대 주척(周尺)으로 5척 7촌 이하, 5척 4촌 이상이었다. 별마는 더 커서 6척 이하, 5척 8촌 이상이었다[『세종실록』 12년 8월 24일]. 말 가격은 상등이 1필에 면포 50필, 중등이 45필이었다. 때로 중국 측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말에 대한 명의 요구는 고려말부터 문제가 많았다. 조선초에 그 요구는 한층 강하게 나타나 1394년(태조 3) 4월에는 말 10,000필을 요구하였고[『태조실록』 3년 4월 4일], 1395년(태조 4)에는 연왕(燕王)이 거의 반강제적으로 군마의 진헌을 요구하였다[『태조실록』 4년 11월 6일]. 1401년(태종 1) 9월에는 명의 사신 축맹헌(祝孟獻) 등이 칙서를 가지고 와서 민간인 소유의 말을 시가(時價)에 맞추어 바꾸고자 한 사실까지 있었다[『태종실록』 1년 9월 15일]. 이후 점차로 명의 말에 대한 요구는 수탈적 성격을 띠었다.
진헌에 쓰였던 돗자리는 황화석(黃花席)·채화석(彩花席)·만화침석(萬花寢席)·만화염석(萬花簾席)·만화방석(萬花方席) 등이었다. 베[布]는 화폐 대용인 정포(正布)가 5승포였는데, 진헌포의 규격은 15승포여서 1필 값이 정포 18필에 해당하였다. 또한 모시·삼베·명주 등을 진헌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세마포인 흑마포(黑麻布)를 귀중하게 여겼다. 이들 물품의 조달은 제용감에서 담당하였다.
가죽은 표범과 수달의 가죽이었다. 가죽에 상처가 있으면 안 되었고, 1장 가격이 말 1필 값에 해당할 정도로 고가였다. 백성들로서는 조달하기 매우 어려운 진헌품이었다. 진헌물은 중요한 것이므로 종류와 규격, 구입 방법과 가격을 법전에 명시하였고, 지방에서 공납하는 것은 관찰사가 품질을 검사하여 바치도록 하는 등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이 밖에 환관[火者]과 처녀[貢女]를 진헌하였다.
변천
조선초 이래 명나라가 요구한 품목 중에서 조선에 가장 부담이 되었던 것은 금과 은이었다. 당시 조선은 매년 금 150냥과 은 700냥을 진헌으로 명나라에 보냈다. 조선에서는 금·은의 국내 유통을 제한하고 민간 소유의 금을 수집하였으며,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금·은을 수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대명외교를 통하여 면제받는 것을 최선의 정책으로 여겼다. 이에 조선에서는 금·은의 대체 물품에 대하여 논의하여 말[馬匹]과 모시[苧麻]로 대신하고자 하였다. 이에 명나라에 금·은을 다른 토산물로 대체하고 조공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세종대에 세 번에 걸쳐 금·은의 면제를 명에 요청하였고, 명 선종(宣宗)대에 이르러서 조선의 요청을 허락하였다. 이로부터 조선은 금·은을 면제받는 대신에 말과 명주 등을 진헌품에 새로 추가하였다.
응골(鷹鶻)은 1427년(세종 9) 이후부터 명 황제의 요청에 따라 매년 진헌하였다.
청나라 때는 초기를 제외하고는 방물이 과거 어느 시기보다도 완화되었다. 명나라 때 성행하던 처녀·환관·말의 요구도 없었고, 진헌품의 감면도 비교적 많았다.
참고문헌
전해종, 『한중관계사연구』, 일조각, 1977.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청대(請臺)
정의
각 관청에서의 물품 출납 또는 연말 결산 시에 사헌부 감찰이 입회하여 검사하는 절차.
개설
청대는 돈과 곡식이 있는 중앙 각사에서 그것을 출납할 때, 부정을 막기 위하여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참석하게 했던 일을 말한다. 그 상세한 절차는 『경국대전』 「예전(禮典)」 청대(請臺) 조에 실려 있다. 『대전회통』이 나올 무렵 군자감(軍資監)·광흥창(廣興倉)·봉상시(奉常寺)·장흥고(長興庫) 이외의 각사의 청대 규정은 폐지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 건국 후 돈·곡식의 출납과 회계에 관한 사무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삼사(三司)에서 관장하고, 이에 대한 감찰은 매월 사헌부 감찰이 담당하였다. 1419년(세종 1) 사헌부의 계(啓)에 의하면, 중앙 각사는 매일 청대하는 것을 꺼려서, 출납이 시급하다는 것을 핑계 삼아 돈과 곡식을 외고(外庫)에 보관하여 별도 출납을 한다고 하였다. 또한 임시 장부를 비치하여 본래의 장부인 중기(重記)에 기록하지 않아 그 회계 기록을 믿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였다[『세종실록』 1년 3월 6일].
1421년 호조(戶曹)의 계에서는, 여러 관서의 월령감찰(月令監察)은 원래 6개월 만에 서로 교체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 매일의(그날그날의) 청대에 월령감찰이 아닌 다른 감찰이 파견되어 업무를 세밀히 살피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만약 갑자기 왕에게 중앙 각사에서 왕실에 물품을 바치는 공상(供上)을 하거나 사신을 접대할 일이 있으면, 일단 외고에 있는 물자를 쓰고 반드시 다음 날 청대하여 중기에 올리도록 하였다. 만일 그 기한이 지나서도 부득이 중기에 올리지 못할 때는 매월 말에 호조에 보고하고 호조에서는 사실을 조사하여 사헌부에 이첩(移牒)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3년 1월 16일].
세종대에 사헌부 감찰은 20명뿐이어서 각사에 나누어 파견하기에 항상 부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무가 지체되자 다른 관원 5명으로 감찰을 겸직하도록 하고, 성균관(成均館) 주부(注簿)·승문원(承文院) 부교리(副校理)·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위솔(衛率)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위솔(衛率)·훈련주부(訓鍊主簿)·통례문 통찬(通禮門通贊)의 순서로 겸직·파견하도록 하였다. 그 후에 반포된 『경국대전』에는 감찰이 24명으로 되어 있고, 『속대전』에는 11명을 줄여 13명으로 되어 있다. 이는 청대의 번거로운 폐단을 인식하여 청대 대상 관사를 줄여서 특수한 관사에만 한정하였기 때문이었다.
『속대전』에는 각사의 잡물(雜物)을 출납(出納)할 때는 해당 관원과 입회한 감찰이 그 회계 문서와 창고 문을 봉한 종이에 각각 이름과 직함을 연서하여 기록하고 서명 날인하도록 되어 있다. 감찰은 각사의 출납에 입회할 뿐만 아니라 매월 말에 호조의 낭관(郎官)과 함께 돈·곡식이 있는 여러 관서의 창고를 심사하여 왕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였다.
『탁지지(度支志)』와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篇)」에는 월말에 호조에서 날짜를 정하여 사헌부에 청대하는 공문을 보내고, 그날 호조의 낭관과 감찰이 동시에 감사를 하여 부정을 적발하였다. 그 결과 보고서는 호조 녹사(錄事)가 승정원에 제출하고 다음 초 1일에 왕에게 상계(上啓)하였다.
변천
『대전회통』 「예전」 청대 조에 따르면, 군자감·광흥창·봉상시·장흥고 이외에 각사의 청대 규정은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탁지지(度支志)』
『만기요람(萬機要覽)』
윤근호, 「조선 왕조 회계 제도 연구」, 『동양학 』5, 1975.
토의(土宜)
정의
해당 지역에서 경작하는 데 적합한 작물.
개설
조선전기 각 군현에서 중앙 각사에 납부하는 공물 품목을 비교적 상세히 수록한 책으로는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관찬 지리지와 사찬 읍지를 들 수 있다. 그중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의 도총론(道總論)과 일반 군현 항목에는 당해 지역의 산물이 수록되었다.
도총론의 경우 『경상도지리지』에는 도복상공(道卜常貢)으로만 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를 세분하여 궐공(厥貢)·궐부(厥賦)·약재(藥材)·종양약재(種養藥材) 4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일반 군현의 경우 『경상도지리지』에는 공부(貢賦)·토산공물(土産貢物)·약재(藥材)·토의경종(土宜耕種) 항목으로 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토공(土貢)·토산(土産)·약재(藥材)·토의(土宜)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 토의는 해당 지역에서 경작하는 데 적합한 작물을 의미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전세조공물로 수취한 포류(布類) 가운데 백저포(白苧布)는 경기·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서, 명주[綿紬]는 충청도·경상도에서, 정포(正布)는 경기·충청도·경상도·강원도에서, 목화씨[綿子]는 충청도·경상도에서, 면화는 경상도에서 수취하였다. 이들 포류는 해당 지역에서 경작하는 데 적합한 작물이며, 포류의 원료 생산지를 표로 나타내면 표 1과 같다.
<표 1> 『세종실록지리지』 토의 항목에 나타나는 포류 생산지
즉, 삼[桑]과 마(麻)는 전국적으로 생산되었고, 모시[苧]와 목면(木棉)은 일부 도에서만 생산되었다. 모시는 충청·경상·전라·황해·강원도에서 생산되었는데, 이 가운데 충청도와 전라도가 약 80%를 차지하였다. 목면은 충청·경상·전라도에서 생산되었는데, 충청도는 55개 군현 중 4개 군현, 경상도는 66개 군현 중 13개 군현, 전라도는 56개 군현 중 27개 군현이 생산지로 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분포율이 매우 높았다.
내용
『세종실록지리지』 토의 항목에는 곡물류, 과실류, 수공업 원료 및 기타의 물종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들 물종은 『세종실록지리지』 도총론의 궐부 항목에 수록된 물종과 많이 겹쳤다. 실제로 벼·보리·콩·기장·조 등의 곡물류와 뽕나무·삼·모시·목화·설면자(雪綿子) 등의 포류, 지마(芝麻) 등의 유밀류가 반복해서 수록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 토의 항목의 품목은 해당 지역에서 경작하는 데 적합한 작물을 가리켰다.
변천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은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로 부과한다는 임토작공(任土作貢)의 원칙에 따라 분정되었다[『태종실록』 13년 11월 5일]. 토산물이 나는 지역에만 공물을 분정하게 되면 해당 지역만 집중적인 수탈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산출되지 않는 불산공물(不産貢物)도 분정하였던 것이다[『성종실록』 15년 5월 29일].
참고문헌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김동수, 「『세종실록』 지리지 산물항의 검토」, 『역사학연구』 12, 1993.
김동수, 「『세종실록』지리지의 기초적 고찰」, 『성곡논총』 제24집, 1993.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파삼(把蔘)
정의
인삼을 물에 삶아 건조하여 1묶음 단위로 포장한 인삼.
개설
파삼은 생삼을 팽조(烹造), 즉 물에 삶은 후 크기를 맞추어 묶음 단위로 포장한 가공 인삼(人蔘)을 일컬었다. 생삼을 훈증하여 말리는 홍삼(紅蔘)의 제조법과 상당히 유사하여 후대에 홍삼의 전신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 정부는 건국 초부터 중국에 진헌용으로 건삼(乾蔘)을 봉진해 왔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시기에 중국 내에서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여 건삼 외에 파삼과 같은 가공인삼이 제조되어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1607년(선조 40) 평안도 지역의 인삼 공납(貢納)을 면제해 주고 인삼을 파는 사상의 출입을 금단하는 조치가 취해졌는데, 이때 사관의 평을 살펴보면 당시 인삼의 대중국 수요가 상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인삼을 바치는 것은 기껏해야 지방의 산물에 불과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마치 장생초(長生草)처럼 귀하게 여겨 공경(公卿)과 사서(士庶)에 이르기까지 항용하는 차(茶)로 삼았다. 인삼을 옮겨다 판매하면 그 이익이 100배나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간사한 무리가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니, 여러 궁가(宮家)와 권문세가에서도 이를 모방하고 삼상(蔘商)을 불러들여 서로 이익을 나누는가 하면 역관과 결탁하여 중원(中原)에다 판매한다.”[『선조실록』 40년 4월 19일]고 하였다.
이처럼 16세기 말 인삼의 대중국 수요가 증가하는 데에는 파삼의 역할이 컸다. 파삼은 황실에 진헌용으로 들어가는 건삼과 다르게 품질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민간 사대부들이 즐길 수 있는 대중 상품으로 인기를 누렸고, 행상(行商)들에 의하여 거래되었다. 조선에서는 역관과 경상, 개성상인들이 권력층의 비호 아래 중국인들을 겨냥한 파삼 가공과 판매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장기간에 걸친 운송과 유통 과정을 견딜 수 있도록 삼을 삶아 건조하고 이를 다시 파(把) 단위의 묶음으로 포장하여 판매함으로써 큰 이익을 거두었다.
변천
파삼이 중국에까지 크게 유통되자, 크고 작은 인삼이 모두 파삼을 제조하는 데에 동원되어 진헌용 인삼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1606년(선조 39) 한때 호조에서 파삼을 일절 금단해야 한다는 사무역 금지령을 내렸지만 대중국 파삼무역은 근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중강개시(中江開市)와 같은 공식적인 무역 통로 외에 조선과 명의 상인들은 의주에서 이산에 이르는 지역까지 밀무역인 잠상(潛商)활동을 확대해 갔다.
16세기 파삼의 제조와 유통은 가공 형태와 제조기법 면에서 유사한 홍삼의 유통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박평식, 『朝鮮前期 交換經濟와 商人硏究』, 지식산업사, 2010.
박평식, 「宣祖朝의 對明 人蔘貿易과 人蔘商人」, 『歷史敎育』 108, 역사교육연구회, 2008.
해운판관(海運判官)
정의
조선시대에 조운선의 정비, 세곡의 운반과 납부 등을 관장하는 전함사 소속의 종5품 관직.
개설
조세로 거둔 곡식을 수송하는 것을 전운(轉運)이라 하였다. 전운은 운반 경로에 따라 육전(陸轉)과 조운(漕運)으로 나뉘었다. 조운은 다시 북한강·남한강을 따라 이루어지는 수운과 남해안·서해안을 따라 이루어지는 해운으로 나뉘었다. 수운과 해운의 감독관, 즉 압령관(押領官)을 각각 수운판관, 해운판관이라 하였다. 이들을 관장하는 전함사(典艦司)는 경관직 종4품아문으로, 서울과 지방의 병선을 관장하였다. 수운판관 2명과 해운판관 1명이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다.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8호로 지정된 ‘삼도해운판관비’ 6기가 서 있다. 해운판관의 청렴한 덕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담당 직무
해운판관은 조운과 관련된 제반 업무를 관장하였다. 먼저 수송 수단인 조운선과 조운선에 타는 선원들을 관리하였다. 조운의 하급 지휘관인 영선(領船)·통령(統領)에 대한 선발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호(千戶)직에 대해서는 추천권이 있었다. 천호는 해운판관이 추천하고 호조에서 임명하였다. 또한 조운선박의 수리와 제조를 지휘·감독하고, 선박에 싣는 물품 검사하였다. 항해 중인 조운선이 중간에 머무는 기항지(寄港地)에 있으면 그곳으로 가서 해당 지역의 관찰사나 수군절도사 등과 함께 조운선단을 점검하였다. 전라도 삼조창(三漕倉)인 영산창·법성창·덕성창에 집적된 전세미곡을 조운선에 적재할 때, 입회하여 지휘·감독하는 직무도 담당하였다.
변천
관선 조운체제의 재정비와 조선(漕船)의 파손·침몰로 인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1461년(세조 7)에 전라도수참전운판관(全羅道水站轉運判官)을 두고, 충청도의 조운업무까지 겸하도록 하였다. 이 전라도수참전운판관이 해운판관의 전신이었다. 전라도수참전운판관이 해운판관으로 바뀐 것은 단순한 명칭의 변화가 아니었다. 1470년(성종 1)에서 1472년(성종 3) 사이에, 선군(船軍)을 대신하여 조운 전업집단으로 기선군이 신설되어 조군(漕軍)으로 확립된 것에 따른 조치였다. 이에 따라 직무권한을 확대시키면서 조운판관이 설치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세곡 수납이 국가 재정상 중대해지면서 1478년(성종 9)에 관찰사가 직접 세곡의 수납 및 조운선의 발선을 책임지도록 함에 따라 해운판관직도 폐지되었다. 그 뒤 조운의 중대성이 제고되면서 유순(柳洵)의 주장으로 1509년(중종 4) 해운판관이 부활하여 다시 조운 업무를 감독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상 운송에 밝지 못한 자가 해운판관에 임명되어 침몰 사고가 자주 일어났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5척 이상의 조선이 침몰하면 파직시키는 등 감독을 철저히 하도록 하는 관리 규정도 마련되었다. 그러다가 1762년(영조 38)과 1779년(정조 3)에 각각 충청도와 전라도해운판관을 혁파하고, 군산과 법성포첨사가 관할 조창의 세곡을 조운하도록 하였다. 이는 관선 조운제의 기능이 약화되고 사설 임운업이 발달하는 상황에서 야기된 조치였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만기요람(萬機要覽)』
최완기, 『조선후기선운업사연구』, 일조각, 1989.
김옥근, 「조선시대 조운제 연구」, 『부산수산대 논문집』 2집, 1981.
六反田豊, 「李朝初期の田稅輸送體制」, 『朝鮮學報』 123, 朝鮮學會, 1987.
六反田豊, 「海運判官小考」, 『年報朝鮮學』 1, 九州大學 朝鮮學硏究會, 1990.
최완기, 「수상교통과 조운」, 『한국사 24』, 국사편찬위원회, 1994.
횡간(橫看)
정의
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세출 예산표.
개설
조선시대의 세출 예산표는 가로[橫]로 기재하여 가로·세로로 대조해 보는 서식(書式)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형태 때문에 세출 예산표를 횡간이라 불렀다. 정식 명칭은 경비식례횡간(經費式例橫看)이었다. 횡간에는 왕실 경비, 각사의 경비, 국상(國喪)에 쓰이는 제반(여러 가지) 경비, 중국에 파견하는 사신 경비와 외국 사신 접대에 필요한 경비, 관료들의 녹봉, 구휼, 군기감이 수취하는 군기물(軍器物) 등이 수록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건국 초기부터 출납·회계에 관한 감찰 규정은 마련되어 있었지만, 경비식례는 없었다. 이 때문에 경비의 지출은 방만하게 운영되었다. 방만한 경비 운영은 필연적으로 백성에게 많은 공물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횡간을 제정한 것은 방만한 경비 운영과 과다한 각사의 경비 책정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내용
세종대에 경비식례가 없는 각사에서 지출한 잡물의 수량을 파악한 결과, 실제 경비보다 2~3배 이상이 지출되었다. 1426년(세종 8) 경비식례의 제정은 방만한 경비 운영과 과다한 중앙 각사의 경비 책정을 바로잡고자 추진된 것이다.[『세종실록』 8년 10월 22일]. 1440년(세종 22) 5월에는 이전에 제정된 식례의 유무를 막론하고 다시 식례를 제정할 것을 명하였다[『세종실록』 22년 4월 21일]. 그리고 1443년(세종 25) 12월에는 식례가 없는 각사는 그때까지 사용한 잡물 제작 경비의 수량을 참고하여 식례를 제정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5년 7월 29일]. 이를 바탕으로 국용전제가 시행된 다음 해인 1446년(세종 28) 정월에 이르러 각사의 공용물은 물건마다 시험하여 수량을 참작 결정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8년 1월 22일]. 또 결손 나는 자료는 예비로 1푼을 더하여 각사·호조 및 가각고(架閣庫)에 각각 나누어 보관하게 하여 영구히 출납의 격식(格式)으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경비식례는 모든 관사가 아닌 재정 지출과 관련 있는 43개 관서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또 각사에서 사용하는 모든 경비가 아닌 만들어 쓰는 물품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하지만 각사의 경비식례 제정은 향후 횡간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세종대에 일부 중앙 각사에 정해졌던 경비식례를 다시 추진한 왕은 세조였다. 세조는 호조와 상정소에 명하여 세종대에 제정된 일부 각사의 경비식례를 궁궐에서부터 지방 고을에 이르기까지 확대 제정하게 하였다[『세조실록』 2년 10월 30일]. 경비 용도의 규제를 확립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그 관사에서 1년 동안 사용되는 물량과 수입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좌우로 나누어 중앙 각사와 지방군현의 회계를 서로 교정하게 하였다. 경비 남용을 방지하고 경비 출납을 철저하게 하며, 경비 계산을 담당하는 산학중감(算學重監)의 태만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461년(세조 7) 7월에는 탁지사를 설치하여 호조 판서 조석문(曺錫文)에게 중외탁지사를 총괄하게 하였다[『세조실록』 7년 7월 12일].
세조는 횡간 작성을 위해서 친히 그 예산 규모를 내려 주기도 하였고, 직접 횡간을 교정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조의 열성적 노력으로 마침내 1464년(세종 10) 정월에 횡간이 완성되었다[『세조실록』 10년 1월 27일]. 횡간의 제정은 지금까지 일정한 지출 계획 없이 관례에 따라 경비를 지출하던 것에서 벗어나 지출 예산표에 따라 경비를 지출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당시 식례횡간의 상정에는 여러 관리가 동원되었지만, 이것이 완성되기까지 깊이 관여한 사람은 호조 판서 조석문과 김국광(金國光)이었다. 호조에서 아뢴 차자에 조석문의 이름만 있으면 그 내용을 살피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세조는 그를 신임하였다. 그는 재정에 대한 식견과 세조의 신임을 배경으로 1459년(세조 5)부터 1466년(세조 12)까지 호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김국광은 여러 각사[諸司]의 횡간을 상정할 때 그 추진 과정과 내용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업무에 정통하였다.
그런데 이때 완성된 식례횡간은 너무 빠른 시일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세조는 이를 개선하고자 횡간을 친히 열람하기도 하였고, 여러 차례에 걸쳐 횡간의 틀린 곳을 개정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죽음으로써 횡간의 문제점은 개정되지 못하였다.
그 후 성종은 세조대의 횡간을 토대로 개정 작업에 착수하여 1473년(성종 4) 9월에 이르러 횡간조작식(橫看造作式)을 완성하였고[『성종실록』 4년 9월 20일], 다음 해 횡간식례(橫看式例)를 완성하였다[『성종실록』 5년 윤6월 26일]. 조선왕조에 들어 국가의 경비 지출이 횡간에 의거해서 출납하게 된 것은 1474년(성종 5)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완성된 횡간은 국가 경비를 절감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연산군대에 이르러 왕실의 경비 지출이 이전보다 현저하게 증가함에 따라 1501년(연산군 7) 7월에 공안을 개정하였다[『연산군일기』 7년 7월 17일]. 이것이 신유공안(辛酉貢案)이었다. 공안 개정을 통하여 국가 재정이 대대적으로 확충되었지만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낭비의 구조화로 인하여 국가 재정은 항상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렸다. 이로 인하여 인납(引納)·가정(加定) 등이 거의 일상화되었다.
변천
횡간은 대동법 실시 이전까지 세출 예산표로 사용되었으나, 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횡간 외에도 『대동사목(大同事目)』을 참용하였다. 현재 『충청도대동사목』과 『전남도대동사목』이 남아 있다. 대동사목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는 대동법 시행에 관계되는 기구의 조직과 구성이고, 둘째는 대동미(大同米)의 부과와 징수이며 셋째로는 상납미(上納米)와 유치미(留置米)의 용도였다.
참고문헌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Ⅰ』, 일조각, 1984.
이종일 외, 『대전회통 연구: 호전·예전편』, 한국법제연구원, 1994.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박도식, 「조선초기 국가재정의 정비와 공납제 운용」, 『관동사학』 7, 1996.
이정철, 「대동미·포의 구성-『호서대동절목』·『전남도대동사목』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제19호, 2005.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경제 > 재정 > 역/가솔(假率)
정의
상대적으로 지위는 높고 부담은 낮은 지방의 군관직.
개설
지방관청에서는 인력을 동원하거나 군포 등의 물자를 거두어들일 때가 많았다. 이런 때 지방관청에서는 가솔을 이용하였다. 가솔은 정식 군역(軍役)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가벼우면서 군역을 피할 수 있는 관직이었다. 18세기 중엽에는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兵營) 등의 역종별 군액(軍額)을 정액화(定額化)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지방관청에서는 정병(正兵)보다 지위가 높고 부담이 적은 여러 가지 명칭의 군관직을 설치하였는데, ‘가솔군관(假率軍官)’도 그중 하나였다[『영조실록』 28년 1월 14일].
내용 및 특징
가솔이라는 명칭은 18세기 전반에 『조선왕조실록』에서 흔하게 나타났다. 1721년(경종 1) 함경도에서는 새로 군제(軍制)를 시행하여 각종 군정(軍丁)을 모으고자 하였다[『경종실록』 1년 3월 25일]. 그 가운데 남병영(南兵營) 소속인 친기위(親騎衞) 이외에 가솔을 비롯한 여러 역종은 본래 편오를 갖춘 군사가 아니고 쌀이나 면포를 조금 거두어 병영의 재정수요에 보충하고 있었다. 이들 역종에게 정식의 군액을 부여하여 군역으로 전환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함경도에는 이미 가솔군관이 설치되어 이들로부터 군관전(軍官錢)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1728년(영조 4)에는 이 가운데 반은 지방관청에 주어 지방 재정에 사용하도록 하고 반은 정식 군역으로 민간에서 거두는 군포액수를 채우게 할 것이 건의되었다[『영조실록』 4년 5월 5일].
함경도에서 가솔이 정식(定式)으로 정군화한 것은 양역(良役) 정액화 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였다. 1745년(영조 21)에는 박문수(朴文秀)가 함경감사(咸鏡監司)로 있을 때 각 고을의 가솔을 없애 버려 정군(正軍)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군대로 편성하고 훈련을 거듭함으로써 영구히 정식 군대로 삼았다[『영조실록』 21년 1월 13일].
변천
18세기 중엽에 지역별로 군역, 즉 양역의 일정한 액수를 확정한 『양역실총(良役實摠)』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북도(北道)의 가솔군관은 그 후에도 계속 문제가 되었다. 가솔에 대해서는 원래 일정한 액수가 없어서 이들에게 거두는 면포가 매번 증가하는 폐단이 있다고 지적되었다. 18세기 말 가솔군관이 설립될 당초에는 자원하는 자를 모집하고 그 중 건장한 자를 택하여 감영·병영과 읍에 소속시켜 유사시에 재정수요로 삼았는데, 이제 그 수효가 너무 많아 철폐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가령 정원을 정하여 3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충원하고 한 사람당 번을 면제받는 대가로 1냥씩을 쌀로 대신 받아들여 그것으로 군기(軍器)를 보수하는 등의 재원으로 삼는 방안이 제안되기도 하였다.
제주도에서도 가솔이 18세기 중엽까지 군관이나 군역으로 전환되지 않고 있었다. 1745년(영조 21)에는 제주목사가 고강(考講)·시사(試射) 등의 시험에서 떨어진 자를 제주도의 유품(儒品)·가솔 등의 이름으로 기병(騎兵)·보병(步兵)의 군역에 채워 넣었다. 그러자 이들이 무리를 지어 깊은 밤에 객사(客舍)의 전패(殿牌)를 봉안한 곳에 모여 곡(哭)을 하는 등 반항이 심했다고 한다[『영조실록』 21년 5월 12일].
참고문헌
『양역실총(良役實摠)』
김준형, 「19세기 진주의 신흥계층 ‘유학’호의 성격」, 『조선시대사학보』 47, 2008.
손병규, 「호적대장 직역란의 군역 기재와 ‘도이상(都已上)’의 통계」, 『대동문화연구』 39, 2001.
감필(減疋)
정의
양정 1명당 연간 군포 2필의 군역 부담을 일부 줄여 주는 것.
개설
18세기 초부터 제기된 감필 논의는 양역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제기된 변통안이었다. 양역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양인 남자[良丁] 1명에게 2필을 거두어들이던 제도를 전면 개혁하여 호(戶) 또는 결(結) 단위로 역가를 거두어들이는 변통안이 시행되어야 했으나,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컸다. 그래서 2필을 1필로 줄이고 나머지 1필 부분만 다른 세금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1750년(영조 26) 균역법의 제정으로 양역 2필을 1필로 줄이는 감필이 단행되었다[『영조실록』 26년 7월 3일]. 그로 인해 발생한 재정 수입의 부족은 절반은 결미(結米)로 해결하고 나머지 반은 선무군관포, 어염선세, 은여결 등 잡다한 세목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16세부터 60세까지 양정의 군역 부담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조선후기 양정 1명의 군포 부담은 대개 연간 2필이었다. 그러나 일부 역에서는 2필을 넘는 과중한 역도 있었고 2필보다 덜한 역도 있었다. 17세기 중엽 수군(水軍)과 훈련도감의 포보(砲保), 장악원(掌樂院)의 악공보(樂工保)는 3필이었다. 응사(鷹師)는 돈 8냥이었는데 이것은 3필을 넘는 금액이었다. 이러한 불균등은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했고 국가 재정에도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18세기 초, 군역의 부담을 2필로 고르게 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1702년(숙종 28) 이정청(釐正廳)이 설립되어 여러 가지 양역 이정 사업이 진행되었다[『숙종실록』 29년 9월 15일]. 1705년(숙종 31)에는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반포하여 군포를 2필로 통일하였다[『숙종실록』 30년 12월 28일]. 그러나 완벽하게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이때는 양역의 액수를 균일하게 하기 위한 감필이었다. 따라서 2필에 미치지 못하는 역은 2필로 올리는 정책도 병행되었다.
이정청의 감필에 이어 두 번째 단계의 감필은 1750년(영조 26)의 균역법 시행이었다. 감필에 관한 논의는 1711년(숙종 37) 양역변통론이 재개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양역의 폐해가 심각해지자 양역을 구조적으로 개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호포론(戶布論), 구포론(口布論), 양포론(良布論) 결포론(結布論) 등의 여러 가지 방책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논의는 합일점에 이르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렀다. 이때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는 대책이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구조적인 개편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부담이라도 덜어 주자는 감필론이 제기되었다.
1필 감필론은 세 가지 장점이 있었다. 첫째, 양역 부담을 반으로 줄여 상당한 양역 경감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둘째, 2필 전부를 없애는 것보다는 재정적인 부담이 적었다. 셋째, 양역 부담이 대개 2필 또는 1필이었으므로 2필을 1필로 줄이면 양역 부담을 1필로 균등하게 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2필을 1필로 줄이는 것만으로는 양역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1필을 줄이면 국가 재정이 손실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감필론은 감필결포론, 감필호포론, 감필양포론 등 다른 양역변통론과 함께 제기되었다.
변천
감필론은 18세기부터 송상기(宋相琦), 이건명(李健命) 등이 제기하였다. 그러다 1723년(경종 3) 양역청(良役廳)이 설립되면서 유력한 양역변통책으로 등장하였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양역변통에 관심을 기울였다. 영조 초기에는 2필을 1필 반으로 줄이자는 것과 1필로 줄이자는 두 가지 방법으로 감필론이 제기되었다. 양역청의 설립을 주도하였던 이광좌(李光佐)와 이진순(李眞淳)이 반 필을 줄이자고 하였고, 양역청에서도 반 필만 줄이는 방안을 개진하였다. 그러나 반 필을 줄이는 방안은 너무 소극적인 방안이라 양역변통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점차 1필을 줄이자는 방안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후 영조는 1742년(영조 18) 임술사정(壬戌査正)을 단행하여 모속자(冒屬者)를 색출해 내었다. 이듬해에는 『양역총수(良役摠數)』를 간행하여 더 이상 역총(役摠)이 마구 늘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1748년에는 『양역총수』를 보완하여 수정한 『양역실총(良役實摠)』을 간행하였다[『영조실록』 24년 6월 20일]. 그러던 중 1750년 전염병이 널리 퍼지고 기근이 심해져 5월에만 호적 인구로는 12만여 명, 실제로는 30만 명가량이 사망하였다.
영조는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래도록 끌어오던 양역변통 논의를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그래서 양역을 폐지하고 호포(戶布)를 징수할 구상을 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의 논의 끝에 호포 징수는 포기하였다. 대신 2필을 1필로 줄이고 나머지 1필은 호포로 징수하는 감필호포가 구상되었으나 그마저 포기하였다. 결국 영조는 1750년 7월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도록 하고 감필로 인한 재정 결손을 해결할 방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결과 결미, 선무군관포, 어염선세, 은여결 등의 여러 가지 세목이 새로 지정되어 균역법이 완성되었고, 이 법은 1751년부터(영조 27) 시행되었다.
참고문헌
김용섭, 「조선후기 군역제 이정의 추이와 호포법」, 『성곡논총』 제13집,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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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식, 「균역법의 시행과 그 의미」, 『한국사』 32, 국사편찬위원회, 1997.
정연식, 「17·18세기 양역균일화정책의 추이」, 『한국사론』 13, 1985.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