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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따이한 끝나지 않는 '思父曲' [김현재, 영산대학교 아세안비즈니스학과 교수]
거의 모든 베트남인의 집에는 조상의 영정을 모셔놓는 작은 제단이 있다. 아침에 제단 앞에 향을 피워 놓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차례와 제사를 거르지 않을 정도로 조상을 기리는 유교 전통이 철저하다. 혈육의 정 또한 끈끈하다. 이런 사회이기에 '아비 없는 자식’의 설움은 진할 수밖에 없다.
'라이 따이한’ 프엉(44.여)에게 2살 때 헤어진 한국인 아버지는 사진 속에만 존재한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10살 때였다. 이때서야 어머니가 건네준 사진속의 아버지와 '첫 대면’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군무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성장기에는 라이 따이한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남모르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베트남 통일 뒤 라이 따이한은 출신 성분이 가장 낮은 '반동 자녀’로 분류됐다. 진학과 취업에서 불이익을 당했다. 물론 다 지나간 이야기이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으면서 한국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직업학교에서 못 배운 한을 달랬고, 같은 출신 성분의 청년과 결혼도 했다. 남편과 함께 조그마한 이발소를 운영하면서 생활의 재미도 알게 됐다. 이제는 눈물도 말라가고, 다 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엉도 딸을 얻어 부모가 되고 나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원망스럽기만 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맹렬하게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군 베트남 참전용사들이 운영한다는 웹사이트를 통해 수소문해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혹시 아버지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리움을 삭이고 있다. 어머니가 재가하신 것처럼, 아버지도 가정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그가 가정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생긴 '슬픈 배려'인지도 모른다. 라이 따이한의 문제는 한동안 국내에서도 떠들썩하게 다루어졌다. 그러나 언론의 스폿 라이트가 비켜간 어둠 속에서 그들은 아직 서럽게 울고 있다. 국가적인, 개인사적인 '과거청산이 안 되는 상황에서 한국과 베트남은 과연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라이따이한(베트남어: Lai ??i Hàn/ 大韓)이란
한국이 경제적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1964년부터 참전한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인 병사와 현지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를 말한다. 파리 협정에 의한 한국군의 철수와 그 후의 남베트남 정부의 붕괴 이후 그들은 베트남 사회로부터 〈적군의 아이〉로서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라이(Lai)”는 베트남에서 경멸의 의미를 포함한 〈혼혈 잡종〉, “따이 한(??i Hàn)”은 〈대한(大韓)〉의 베트남어식 발음이다.
라이따이한의 정확한 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확실하지는 않다. 최소 5천 명(부산일보)에서 1만 명 이상 그리고 최대 3만 명까지 추산하고 있다. 그들은 부친에 대한 기억을 가지지 않고, 한국어를 하지 못하고, 사진만이 유일하게 남겨진 흔적이라고 하는 말하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 정부 차원의 정확한 조사를 하지 않은 채, 원조 단체가 지원을 주장했기 때문에, 수가 부풀려졌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수의 혼혈아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한국인 병사나 민간인에 의한 사실혼 관계, 매춘 또는 한국군 병사에 의한 강간 등의 이유로 태어났다.
전시 하의 베트남에 있어서는 미국 병사와 베트남인 여성 사이에서도 많은 혼혈아가 출생했다.(2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추산) 통일 후의 베트남에서 이들은 라이따이한과 같이 적국의 아이로 여겨 차별과 냉대의 대상이 되었으나 미국 정부는 1987년부터 혼혈아와 그 가족의 이주를 받아들였다.
SBS 스페셜 '2007 新 라이따이한의 눈물'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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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자료는 영산대 글로벌사회연구원 홈페이지 http://iems.ysu.ac.kr 자료실 / 웹메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