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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봉공과 입암서원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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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봉공께서는 영천 은하리에서 출생하시어 어릴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공부에만 전념하여 벼슬에는 뜻을 두지않고 오직 학문에만 연구하며 사시다가 어느날 영천 임고 우항리에 포은선생의 효자비를 새로 찾은바 다시 그 비를 세우는데, 그 기문을 영천선비 생원 오천정 거(王居)가 지었다,
그 기문의 문장을 본 권동봉께서 흠모하여, 선생을 따라 공부하며,정선생이 입암으로 이거 하니 권선생도 짐보따리를 싸 입암으로 들어가 공부하시니 정선생은 권동봉을 사위로 삼고, 주박에게 소개하여 공부를 더욱 전진하게 한다,
생원 정거는 인동에 형수친정에 심부름을 손자인 우헌 정사상에게 명하여 다녀오게 하는데, 정사상은 조부에 명을 받고 인동장씨 집에 찾아가니 큰할머님 친정집에서 고모의 시집에서 손님이 왔어니
대화할 상대를 장씨집안에 그래도 학식이 있다는 장현광을 불러 손님을 대접하니, 장현광은 정사상에게 대화를 하여보니,현광은 논어를 이야기 하니, 정사상은 모시(毛詩)로 답하고, 현광은 다시 모시로 말문을 여니 정사상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녹명지십(鹿鳴之什)에 대한 8장 4구의 논리를 거론하니,현광은 자세를 고쳐 무름을 꿀이고, 우헌에게 말하여 선생을 이자리에서 만나시니 반갑기가 이루 말할수가 없다 하며 두사람은 깊은밤이 새벽딹이 울때까지 정담을 나누며 서로간의 학문의 깊이를 알아보고 정사상은 장현광에게 말하기를" 선생깓은 분이 이런 촌구석에 그냥 늙음이 아까우니 저와 청송에 가서 서당을 열어 후학들을 길어 내심이 어떠하십니까? 하여 장현광을 청송 솔숲이 우거진 산아래서 공부를 하지만 청송의 선비들이 모이지만 정사상 같은 학자가 보이질 않으니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 소식을 접한 정사상은 안타까워 동생 수암 정사진을 현광에게 보내어 대려오게 하는데, 정사진이 현광에게 찾아가서 대적함에 현광이 시경에 대한 질문을 하니, 정사진은 모든 학문에 성리학에 줄줄 문의하니, 현광은 다시 한번 놀라서 정선생의 형재분은 어느 선생의 문도 이십니까? 라고 물어와 답하기를" 영천의 선비들은 모두가 퇴도선생의 학통이라, 나의 고모부가 권극림이요, 그분은 윤암손선생과 입암에서 공부를 하시니 장선생께서 함께 공부를 하신다면 크게 만족하실 것이니 저와함께 내려가시자고,권고하여 드디어 장선생은 입암에 찾아와 권선생을 만나서 대적하여보니, 과연 깊은 학식의 선비시라,공경하여 입암에 눌러앉게 된다, 여기서 입암의 선비 동봉 권극림,윤암 손우남,우헌 정사상,수암 정사진을 교우로 청하여 함께 공부를 하니, 영남에서 이름난 지산 조호익,창석 이준, 대암 최동집,채투암,박노계,곤봉 정사물,쌍봉 정극후,이러한 명현들이 줄비하게 찾아오니, 장현광은 비로소 공부하는 재미를 느껴서 흥하여, 후학들을 모우니, 영천,경주,청송,청도,달성,및 여러 고을에서 모여들어 문록들이 콱 들어찾다,
이렇게 되어 여헌 장현광은 인동의 촌늙은이가 입암에 와서 명현들을 만나면서, 유명하여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니, 다시할 하자면 권동봉 같은 높은 선비가 한 인물을 만들어 낸 샘이다,
그러하니 인동사람들이 여헌선생이 있어서 입암의 많은 선비가 낳다하고 억지로 우기면 참 곤란합니다, 조선시대 때에 임고서원 배향을 장선생을 모시려 하는데, 임고서원은 포은선생의 주(主)
배향인데, 당시 군수 장,아무게와 인동의 장여헌 후손들이 여헌선생도 포은선생과 동등 배향을 고집하여 배향하자고 우기니, 당시의 임고서원 원장이 양계 정호인의 4촌 동생 명계 정호의,였었다, 당시에 서원의 권세는 임금을 능가하는 권력이라, 영천의 선비들이 반발하여, 장군수 따위가 건방지지 못해 도가 넘친다하여 군수를 쫓아버린 사건까지 일어났다, 물론 이사건으로 현재까지도 왈가부락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이럴 둬고 내 잘못은 모르고 남탓만 하고 있으니, 아쉽고도 아쉬운 일이 아닐수 가 없지 않겠습니까, 임고서원의 배향은 포은선생과 영의정 지봉 황보인, 두분만이 배향되고 있답니다, 어떤자료에서 여헌 장현광선생도 배향된다고 하지만 잘못된 정보이며, 여헌선생은 입암서원에 배향되지요,
만약에 여헌선생을 입암에 대려오지 않았다면 여헌장선생은 인동의 촌늙은이로 이름도 없이 자취가 감춰졌을 것이란 생각이 들며, 대신 권동봉공께서는 쿠게 이름을 떨쳐져서 유명 하였지 안았나 싶군요, 물론 동봉공의 사후에도 여헌선생이 당당하였던 여파가 있지만,말입니다,
동봉공의 처조카가,우헌 정사상 수암 정사진이요, 생원 정거의 형님 손자가,곤봉 정사물과 쌍봉 정극후,이랍니다, 그렇다고 동봉공의 처가집 오천鄭가들의 자랑질은 아니오니, 오해는 하지마세요,
*쌍봉 정극후,가 공부하시던 성산서당(聖山書堂)과 쌍봉공이 거처하시던 수재정(水載亭) 사이에 있는 계곡,
왕자사부 쌍봉공의 집,
수재정,
동봉공의 자료가 부족하여 동봉공의 詩세계를 적지 못함을 부끄럽습니다,
곤봉공과 쌍봉공의 詩와 양계 정호인의 詩를 답아봅니다,
먼저 여헌선생이 장마를 만나 걱정한다는 편지에 수암 정사진이 답한 글 입니다,
타는듯한 무더위 오래되어 쇠를 녹이는 듯하다
가을이 오니 장맛비에 다시 물이 넘치네,
강가 나무들도 놀란 물결에 솟구치고
바위 위 초가집도 성난 파도에 휩쓸리네
우뢰같은 소리 사방에 진동해 온 골짜기 무너뜨리니
기세 꺽인 산봉우리에 온 수풀이 잠기네
이같은 장관 끝이나자 근심이 가득하니
상심한 마음 누구와 함께 술잔 기울일까,
수암 정사진은 이 詩에서 장마로 인한 불어난 물과 홍수로 온 산하를 집어 삼킬듯한 광경을 너무나 잘 표현하여 피해를 묘사 하면서 시 구절에 말 미에 더욱 재미난 말은...
내 상심도 이러한데 스승 마져 오지 않으면 나는 누구와 근심을 나누리오 하여 스승 여헌을 회롱하며 회유책을 묘사 했다, 이때 여헌선생이 잠시 인동에 휴가를 가고 장맛비 때문에 꼽작도 못한다는 여헌선생의 편지를 받고 정수암은 선생을 조롱한 답 글이다,
又 정수암의 詩2수
5월 무더위 속에 바위 위에 누우니
여울물 소리 솔바람에 묻혀 늦바람을 보내네
분수에 편안 하자던 옛 시 읆조리가 마치니
돌아오는 구름에 산은 고요하고 물은 거울 같네,
又
무심한 소나무 무심한 鶴을 벗하며
말없는 산 말없는 사람만 살고있네
말 없음 무심함 그대 비웃지를 마소
말 많고 有心한 그대 보다는 나으리....
여기는 안강 대동리에 있는 직천서원(稷川書院)으로 수암(守菴) 정사진(鄭四震)1567~1616년 을 모시기위한 서원으로 영천 우항리에 고천서원에 있었으나, 숙종37년에 세웠다가 대원군 서원 회철로 헐린 것을 1979년 경주 후손들이 다시 세워 우헌 정사상,수암 형제분을 묘신 서원이다,
또 당시에 선비들이 詩로서 화답 한 것을 보면 그 선비들의 마음을 알수 가 있다,
그 詩들 중에 곤봉공과 쌍봉공에게 지어 보낸 양계 정호인의 마음은 비록 몸은 고을 관아에 있으나
낙향하여 함께 학문을 연구를 하고파 하는 심정을 엿볼수 있다,
장난삼아 읊어 덕연 주인께 보내다,
영천 덕연에는 곤봉 정사물이 기거하여 있었다,
獨步詞壇交白戰.독보사단교백전, 詩壇의 독보로서 백전을 사귀니
慫橫筆陳掃千兵.종횡필진소천병, 종횡으로 휘두르는 필진에 당할 상대 없도다
醉來搥碎將軍石.취래추쇄장군석, 술에 취해 장군석을 깨뜨리니
日莫驚風動水城.일막경풍동수성, 황혼녘에 놀란 바람이 물가의 성을 뒤흔든다,
鄭好仁
덕연의 유거에 표제하여
翠壁丹崖暎水濱.취벽단애영수빈, 푸른절벽과 붉은 낭떠러지가 물가에 비치고
短松曄竹護高人.단송엽죽호고인, 나지막한 소나무와 긴대나무가 고고한 은자를 보호하다
閑中玩物詩曜稿.한중완물시요고, 한가롭게 만물을 완성하니 시고가 많아지고
靜裏賴神道與隣.정리뢰신도여린, 고요히 정신을 가다듬어 도덕을 수양한다
專酒百年皆醉日.전주백년개취일, 술마시며 백년토록 취하였는데
韶顔七十更留春.소안칠십갱류춘, 소안이 70에 다시 젊어온다
從來快意斯眞樂.종래쾌의사진락, 옛부터 기분 상캐함이 참된 즐거움이라
優目雲山興不韻.우목운산흥부운. 운산이 눈에 가득 들어오니 흥취가 넉넉하여라,
정호인
덕연잡영에 차운하여,
東溪卜築一茅廬.동계복축일모려. 동쪽 시냇가 띠집 한칸 세우니
林取端宜隱者居.림취단의은자거. 숲과 골짜기는 은자가 살기에 들판의 나무가 낮아지고
廉捲炬光低野樹.렴권거광저야수. 주렴을 걷어니 연기빛에 들판의 나무가 낮아지고
臺高來氣自郊擧.대고래기자교거. 마루가 높으니 상쾌한 기운이 들판으로 부터 들어오네
忽驚熊識朝衙後.홀경웅식조아후. 홀연히 아침 조회를 마치고 오는 수레에 놀라고
卵整筽巾牛夢餘.란정오건우몽여. 게을리 닞잠 나머지에 오건을 바룬다
留得山公酩酊醉.유득산공명정취. 산공과 더불어 취하도록 마시니
習池風時塾鷹酥.습지풍시숙응소. 습지의 옛 풍류가 남은 듯도 하여라,
정호인
池上偶逢山簡酒.지상우봉산간주. 못가에 우연히 산간의 술을 만나고
盤中尺有季鷹蓴.반중척유계응순. 쟁반 가운데 계응의 순채만 있도다
德淵義號符賢主.덕연의호부현주. 덕연의 아름다운 이름 어진 주인에 어울리니
勝地由來必待人.승지유래필대인. 유명한 땅은 옛부터 인물을 기다린다오,
註
1.시단 = 시인의 동지, 시인마을, 덕연의 주인을 말함,
2.백전 = 무기없이 맨손으로 싸우는 것,
3.필진 = 시인들이 글짓는 것을,,, 시와 문장이 웅건함,
4.장군석 = 웅장한 筆力을 말함, 칼날보다 붓끝이 더 날카롭다는 말을 인용하여, 여기에서는 붓끝이
5.웅식 = 한나라 때 산공 列候의 수레 앞 곰을 그려 넣은 데서 연유함,
6.오건 = 은자가 머리에 쓰는 검은 두건,
7.산공 = 山簡을 가리킴,
8.습지 = 습가지는 호북소 양양현에 있는 양양의 호족인 습씨 집에 아름다운 원지가 있었는데 , 여기서 인용하여 씀,
9.산간 = 산간은 중국 진나라 죽림 7현의 한사람의 아들로 혼란한 시대를 걱정하여 醉하였다고함,
10.계응 = 진나라 장한(張翰)의 字로 그는 고향의 명산인 순채국과 농어회를 먹어려고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고 하는데, 고사 성어로 표현함,
양계문집에 살펴 보면 덕연의 종노(宗老) 곤봉공은 양계 정호인이 벼슬을 던지고 낙향하면 언제나
하인을 보내어 종질(宗姪) 호인(好仁)을 불러 詩도 주고 받으며,술잔을 나누었다고 적고있다,
그중 재밋는 시 구절을 보면, 수재정 쌍봉공은 호인을 불러서 뒤산에 올라가서 소나무 아래 버섯(송이버섯)이 많이 나오므로 주인노인은 나를위해 안주를 따려가고, 나는 다리꼬아 턱고아 시를 읆조리면 노인은 송이버섯 전으로 술상을 가져온다는 정호인의 재미난 시 구절이 있다,
왕자사부와 정호인은 친가에서는 종숙질 간이요, 또 입암에서는 쌍봉공의 고종4촌 동갑인 숙인권씨의 장남인 호인의 학문을 특별히 아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곤봉공 정사물의 공부하던 이의정,으로 안강 대동리에 후손이 지었다, 그러나 덕연정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첫댓글 入鄕祖 克立할배[1558~1611]의 자는 强哉, 호는 東峯이며 文節公 權仲和의 6세손이시고 증조이신 司正 權勻 할배부터 영천에 사셨고, 조부 司直 權弼臣, 父 通訓郞 蔚山訓導 權楷이며, 母는 昌寧成氏로 訓導成烈)의 따님. 1558년 3월 24일 천미촌[경북 永川 堰下里]에서 탄생하셨고, 부인은 貞夫人 迎日鄭氏로 생원(生員) 정거(鄭琚 - 동봉할배의 스승)의 따님이다. 공부를 좋아하셔 스승을 따라 立巖에 터를 잡으셨고, 스승의 사위가 되셨음을 알겠네요. 旅軒 張顯光, 東峯 權克立, 愚軒 鄭四象, 守庵 鄭四震, 綸菴 孫宇男의 朝鮮中期 嶺南五賢을 입암서원에 배향하게된 내력도 감사합니다. 제 外家인 언하리 지명은 우럴못 아랫동네란 뜻입니다
jeongyong님께서 우리 입암문중 入鄕祖와 관련된 좋은글을 많이 올려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貴門과 우리문중은 屢代로 좋은 婚脈으로 맺어오던 집안으로 저의 어머니께서도 貴門에서 오시어
친정이 노실입니다.
東峯祖께서 입암을 世居地로 삼으신 계기도 貞夫人 烏川鄭氏 할머니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되고
특히나 壬亂後 光海 14年 1622年 壬戌 3月에 東峯할아버지께서 宣武原從功臣으로 錄勳받으시는
데에도 貴門의 名賢들 께서 啓告에 많이 힘써 주셨으리라 짐작이 됨니다.
앞으로도 貴門과는 永世토록 좋은 인연이 이어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