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다. 그러나 각박한 이국땅에서 겪는 나날의 노동은 육신의 허기를 채워줄 뿐 제도적 정규학교의 꿈은 그곳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경야독하는 삶은 뒷날 인간 존재의 의의를 헤아리는 체험적 예지로 열렸습니다. 1925년 이국땅에서 쓴「뱀새끼의 무도」가 모국의『신소년』에 발표된 일은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 얻어진 문학적 예지라면, 1928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우리 교포 자녀가 우리말 우리글을 잃어가는 실정이 안타까와 양인환씨와 근영학원을 설립하여 교사노릇을 한 것은 나라와 겨레의 내일을 염려한 실천 의지였습니다.
1929년에는 모국의『조선일보』에 보냈던 단편소설 가난한 사랑이 입선된 그해 고국으로 돌아오니 아동잡지『신소년』에서 편집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신소년』은 경영이 지극히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요, 동화, 동극은 물론 표지화, 컷, 삽화, 만화까지 혼자서 하는 노력과 재능을 발휘하여 어린이의 꿈을 살려갔습니다. 그는『신소년』 편집에 그치지 않고 소설, 시, 희곡, 시나리오 등을 국내 잡지에 발표하면서 우리나라 현대문학 초창기를 열어갔습니다.
1936년에는 종합문예지『풍림』창간에 동참하여 편집을 맡고, 1939년에는 잡지『영화·연극』편집을 주간하고, 1940년에는 잡지『신세기』의 편집장으로 일했습니다. 그 당시 일제가 우리말 우리글의 말살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가 되어 그는 일본경찰의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있었습니다. 마침내 1945년 봄 서울에서 체포되어 거창검사국에 수감되었습니다. 감방에서 풀려난 것은 1945년 8·15광복 다음날인 16일이었습니다. 풀려난 그는 배재중학교(당시는 5년제 중학) 교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연극운동과 창작활동을 병행해왔습니다.『초등국사』를 발간하여 일제로 해서 상실한 우리의 국사교과서를 되살렸습니다.
1947년에는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 동래중학(현 동래고교) 교사, 1949년에는 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연극운동과 문학의 저변 확대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이 문화의 불모지 부산이란 그때였습니다. 그의 창작은 아동문학, 시, 소설, 희곡, 평론, 시나리오 수필, 중국고전의 번역 등 문학 전 영역으로 펼쳐지면서 회화와 서예에까지 그 재능을 발휘하였습니다.
1966년에는『문학시대』를 창간하여 문화의 불모지 부산은 물론 한국문학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부산에서 활동한 햇수는 40년이었고 일본과 서울에서 활동한 해수를 합하면 60년이 됩니다. 60년 동안의 문학과 일반교양 저서는 각 출판사의 기획출판으로 중복된 것까지 합하면 200권 정도가 될 것입니다.
선생의 작품을 각 장르별로 평한 평가들의 평은 인간성의 옹호와 회복을 위한 휴머니즘의 세계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1957년 제1회 부산시문화상, 1962년 제1회 경상남도문화상, 1963년 제1회 부산대학 학술공로상, 1968년 눌원문화상, 1979년 대한민국예술상, 1983년 대한민국문화훈장 1984년 대한민국문학상, 1987년 3·1문화상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향파 이주홍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지 19년이 되는 올해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에 시민의 정성을 모아 문학제를 여는 것은 선생이 남긴 업적을 기리고 선생의 문학정신인 인간주의를 이어받아 물량위주로 삭막해져가는 오늘날에 인간적인 여유와 폭으로 원초적 청정세계를 열어가자는 뜻입니다. 시민 여러분의 동참을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