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창吳世昌 중명, 仲銘, 위창, 葦滄, 韙傖
1864. 7. 5, 서울 출생 |
1953 향년 90세 |
조선 대한제국 일본령식민지조선 대한민국 |
자 : 중명(仲銘) |
호 : 위창(葦滄, 韙傖) |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 최초 신문 <한성순보> 기자를 겸임했고, 농상공의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96년 독립협회의 간사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독립문·독립공원의 건조사업을 관장하는 임원으로 선정되었다.
1902년 6월 개혁당 사건으로 일본으로 망명해 손병희를 만나게 되면서 천도교에 입교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삼갑운동을 추진하는 등 천도교 교단에서 활동했다. 1919년 손병희·최린·권동진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고, 운동의 3대 기본노선을 대중화·일원화·비폭력으로 확정했다. 일제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른 이후 서화에 전념, 한국서화사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6·25전쟁 중 피난지인 대구에서 90세로 사망했다.
위창 오세창은 천도교의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들과 3.1운동을 기획하며 최남선 불교의 한용운 등과 독립선언서의 기틀을 잡았다.
오세창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 아버지는 중국어 역관으로 초기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던 오경석(吳慶錫)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20세에 역관이 되었으며, 김옥균·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과 접촉했다. 1886년(고종 23)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기자를 겸임했다.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96년(건양 1년) 독립협회의 간사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독립문·독립공원의 건조사업을 관장하는 임원으로 선정되었다. 1897년(대한제국 광무 1)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도쿄 외국어학교[東京外國語學校] 조선어 교사를 지냈다. 1902년 6월 개혁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 이미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고, 이후 손병희의 참모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여, 3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교육개발·식산흥업을 표방한 대한자강회를 조직했으며, 손병희의 후원하에 국민의 지식계발을 목적으로 6월에 〈만세보〉를 발간하는 등 계몽운동·언론활동에 주력했다. 대한자강회의 활동과 영향력이 커져 이에 불안을 느낀 통감부가 1907년 8월 신문지법을 적용하여 이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11월에 남궁억(南宮檍)·장지연·윤효정·권동진(權東鎭)·지석영(池錫永) 등과 더불어 대한자강회의 이념을 계승한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1909년 유길준(兪吉濬)과 융희학교(隆熙學校)를 설립하고, 장효근과 함께 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한 〈대한민보〉를 발간하여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삼갑운동(三甲運動)을 추진하는 등 천도교 교단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18년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당시의 세계정세와 국내동향으로 보아 일대 독립운동을 일으킬 시기라고 생각하고, 최린(崔麟)·권동진과 함께 독립운동 준비를 발의했다.
1919년 1월초 국내에 들어온 도쿄 유학생 송계백(宋繼伯)으로부터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계획을 듣고 손병희·최린·권동진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여, 운동의 3대기본노선을 대중화·일원화·비폭력으로 확정했다. 기독교계·불교계 인사 및 학생들과 비밀리에 접촉한 후, 손병희·최린·권동진과 더불어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제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서화에 전념하면서 은둔생활을 했다.
1918년 서화가들의 친목단체인 대한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한 그는 서화는 물론 그 감식(鑑識)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서화사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와 자신이 수집한 역대 서화가의 사적을 토대로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화가들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하여 편술한 〈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이래의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된 인장자료를 모아 집성한 〈근역인수 槿域印藪〉, 수집한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엮은 〈근역서휘 槿域書彙〉·〈근역화휘 槿域畵彙〉 등은 모두 서화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들이다.
글씨는 특히 전서·예서에 능했는데,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瓦當)·고전(古錢)·갑골문 형태의 구성적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 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의 두전(頭篆)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곳에 남아 있다. 8·15해방 후에는 〈서울신문〉 초대사장·명예회장, 민주의원, 대한민국촉성국민회장,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장 등 언론·사회단체의 원로로서 활동했다.
6·25전쟁 중 피난지인 대구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