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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나라 바로알기 조동일 칼럼 [한일고금비교] 6) 대장경 주고 받기... 선진이 보여주는 포용력 <대학지성에서>
상현달 추천 1 조회 56 25.06.10 13:37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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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5.06.10 13:42

    첫댓글 고려에서 1074년에서 1082년까지 <初雕大藏經>(초조대장경) 1,067부 5,048권의 규모로 만들 때 시작되었으나, 1232년에 몽고란 때문에 불탔다. 1236년부터 1251년까지에 현존 <高麗大藏經>(고려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 <高麗大藏經>은 宋版을 받아들여 기본으로 하고, 遼版 등의 다른 자료도 보태 한문본 불경을 집대성하고 총정리한 성과이며, 교정을 철저하게 해서 완벽을 기했다. 1,516부 6,815권이고, 경판은 81,258매이다. 그 전부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현존 최고의 대장경이다. 그 인행본을 일본이나 유구에서 다투어 얻어갔다.

    일본 국왕이나 왕족이 30회 청구해서 22회 받아가고, 大內(오우찌)라고 하는 유력한 지방통치자가 17회 청구해서 13회 받아가고, 對馬島主(대마도주)가 4회 청구해서 3회 받아가고, 다른 여러 지방의 통치자가 도합 15회 청구해서 5회 받아갔다. 모두 합치면 66회 청구해 43회 받아갔다.

  • 작성자 25.06.10 13:50

    일본에서 大藏經을 얻어가는 관습은 임진왜란과 더불어 사라졌다. 그때 관계가 악화되어 일본에서 대장경을 요청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대신에 일본에서 판각을 해서 대장경을 인쇄해냈다. 목판인쇄의 기술자를 대거 납치해갔기 때문이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약탈전쟁을 진행한 대가를 인쇄와 도자기 기술 확보에서 얻었다.

    조선의 대장경판을 얻어가려고 애쓰고, 무력으로 탈취할 계획을 세우기까지 한 일본에서 임진왜란 때에 대장경판을 그대로 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해인사를 점거하지 못했거나 대장경판을 가져가는 일이 너무 번거로워 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장경판을 가져가는 대신에 목판인쇄 기술자 刻手(각수)들을 납치해 가는 것이 수고는 적고 효과는 커서 훨씬 현명한 방책이었다.

    인쇄기술을 확보하면 대장경뿐만 아니라 다른 책을 찍어내는 데도 널리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의 인쇄문화가 크게 일어났다.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인쇄물은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훨씬 번창했다. 소설 출판업이 발달한 것이 그 때문이다. 일본이 세계 전체에서 크게 앞서나가는 인쇄와 출판의 나라가 되는 시발점을 그때 마련했다.

  • 25.06.10 19:31

    대장경 주고받기의 역사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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