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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항목명 | 도기 |
한자항목명 | 道器 |
유형 | 개념 |
출전 | 『주역(周易)』 「계사전상(繫辭傳上)」 |
<요약>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에 관한 철학적 범주.
<설명문>
도는 무형의 법칙을 가리키며 기는 유형의 사물을 가리킨다. 이 말은 『주역(周易)』 「계사전상(繫辭傳上)」의 “형이상자(形而上者)를 도라 하고 형이하자(形而下者)를 기라 한다.”에서 유래하며 도는 역(易)의 도리, 기는 기물(器物)‧시책(蓍策)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여졌다. 그러나 철학적 해석이 가해지면서 도와 기의 관계는 추상적 도리와 구체적 사물간의 문제로 다루어져 송대(宋代) 이후에는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정호(程顥)는 기가 또한 도이고 도가 또한 기, 즉 현실 그대로가 곧 도리의 세계이며 도리 그대로가 현실이라는 전제 위에서 인(仁)사상을 전개하였다. 정이(程頤)는 일음일양(一陰一陽)하는 소이(所以)를 도라 하고, 주희(朱熹)는 도를 이(理)와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여 가치론적으로 기의 상위에 두었다. 이에 대해 장재(張載)로부터 왕부지(王夫之)‧대진(戴震)에 이르는 기철학(氣哲學)에 있어서는 도와 기의 가치론적 차별은 부정되고 오히려 기가 중시되었다. 특히 왕부지는 기가 없으면 도 또한 없다고 하여 유기론(唯器論)을 주장하였다.
청말(淸末)에는 중학(中學)은 도, 서학(西學)은 기에 대한 학문이라고 하여 주자학적 입장에서 중학을 상위에 둠으로써 서학 도입을 촉진하려는 이론적 근거로 쓰여지기도 하였으며, 정관응(鄭觀應)은 도본기말론(道本器末論)을 주장하여 도는 중국의 윤리, 기는 서양의 과학 기술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급진적 변법론자(變法論者)인 담사동(譚嗣同)은 체용론(體用論)으로 도기를 말하여 변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
<참조항목>
동도서기론, 이기론
도량형(度量衡)
한글항목명 | 도량형 |
한자항목명 | 度量衡 |
유형 | 개념 |
한국 시대 | 삼국시대/고구려 |
중국 시대 | 선진 시기 |
<요약>
길이‧부피‧무게, 혹은 그 단위의 총칭.
<설명문>
도는 길이를 재는 자, 량은 양을 되는 그릇, 형은 무게를 다는 저울을 가리킨다. 이 도량형은 문화의 발전에 비례하여 발달되어 왔는데, 중국 황하(黃河) 유역의 고대 문화는 B.C.4000년경 당시의 천문 역수나 화폐, 또는 토목‧건축물 등의 기술로 미루어 어느 정도의 도량형이 갖춰져 있었고, 그것이 후대 도량형의 원형이 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B.C.1000년을 전후한 은주(殷周)시대에는 주척(周尺)이라는 도량형 기구가 유행하였는데 그것은 오늘날 척관법의 시초이다. 주척은 굽은자로서 7치 6푼[七寸六分]에 해당한다. 성문법으로 도량형을 통일, 반포한 사람은 진시황(秦始皇)이며, 한(漢)은 진의 제도를 이어받고 당(唐)은 한의 제도를 답습하여 크고 작은 두 가지 종류의 도량형을 공인하게 되었다. 그 후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에 의해 재정비된 것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척관법이다. 척관법에서는 길이는 척(尺), 무게는 관(貫), 넓이는 평(坪), 부피는 승(升)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오래 전부터 척관법을 사용하였으나 시대에 따라서는 척관법에 근거한 고유한 도량형 제도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35.51㎝를 1자로 하는 고구려척(高句麗尺)을 사용하였고, 신라는 20.45㎝를 1자로 하는 주척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고려는 0.45cm를 기준으로 하는 고유한 고려척(高麗尺)을 사용하였다. 이 고려척은 일본에 전개되어 일본 도량형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세종(世宗)은 길이‧부피‧무게뿐만이 아니라 해시계와 같은 시간을 측정하는 독자적인 도량형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고종(高宗)은 도량형 제도를 법제화하였고, 1905년에는 대한민국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 후 1961년에 서양의 도량형을 받아들여 계량법을 시행함으로 현재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도량형 제도가 완비되었으나, 아직도 민간에서는 이전의 척관법이 적지 않게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도사(道士)
한글항목명 | 도사 |
한자항목명 | 道士 |
유형 | 개념/관습 |
중국 시대 | 위진남북조 시기 |
출전 | 「답삼파론(答三破論)」, 『춘추번로(春秋繁露)』 |
<요약>
도교(道敎)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
<설명문>
엄격한 계율을 지켜 여러 가지 종류의 수행을 실천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선인(仙人)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육조시대(六朝時代) 이전에 이들은 승속(僧俗)‧방사(方士) 등으로 통칭되다가 육조시대 때부터 구별되기 시작하여 승(僧)은 도인(道人), 이들은 도사라고 칭해졌다. 기록상으로 이 말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남제(南齊) 때 승순법사(僧順法師)의 「답삼파론(答三破論)」에서이다. 이후 구겸지(寇謙之)가 스스로를 천사(天師)라고 하고 제자를 도사라고 부르면서부터 이 말은 도교의 전유물이 되었다.
민간에서는 이들이 신들과 의사를 교환할 수 있는 영력(靈力)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부록(符籙 : 부적)을 부탁하는 등 이들에게 방재초복(防災招福)을 의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 도교 자체가 쇠퇴하고 이들의 종교생활도 문란해져 오히려 여러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 말이 도의를 체득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될 때도 있었는데,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春秋繁露)』에 나오는 “옛날 도를 체득한 사람의 말이 있다.(古之道士有言)”라는 기사의 용례가 그것이다.
도심(道心)
한글항목명 | 도심 |
한자항목명 | 道心 |
유형 | 개념 |
출전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序文), 『주자대전(朱子大全)』 「답정자상서(答鄭子上書)」, 『상산어록(象山語錄)』, 『전습록(傳習錄)』, 『퇴계집(退溪集)』 「답기명언논사단칠정(答奇明彦論四端七情)」, 『율곡전서(栗谷全書)』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답성호원(答成浩原)」 |
<요약>
천지 만물과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이(理), 혹은 성(性)에 입각한 마음이 인욕(人欲)‧물욕(物欲) 등에 방해받지 않고 나타난 것.
<설명문>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인심(人心)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심은 미약하기만 하다.(人心惟危 道心惟微)”라는 기사에서 유래한 말로 인심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인심과 함께 송대(宋代) 이후로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는데, 특히 주희(朱熹)의 해석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序文)에서, 형기지사(形氣之私)에서 발생한 것을 인심, 성명지정(性命之正)에서 발생한 것을 도심이라고 하였으며, 『주자대전(朱子大全)』 「답정자상서(答鄭子上書)」에서는, 인욕에 입각한 것이 인심임에 대하여, 이(理)에 입각한 것이 곧 도심이라고 하였다.
『주자대전』 「황사의록(黃士毅錄)」에 의하면, 형기지사란 인간의 신체에서 발생하는 기포(飢飽 : 굶주림과 배부름)‧한난(寒暖 : 추위와 따뜻함) 등과 같은 것으로 타인이 간섭할 수 없는 것을 뜻하며, 『주자어류(朱子語類)』(卷4)에 의하면, 성명지정이란 순수한 이(理)에서 나오는 것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천성지심(天性之心), 또는 의리(義理)로서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 등 사단(四端)을 말한다. 『주자어류』(卷61)에서 주희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그는 입에 대한 맛, 눈에 대한 색, 귀에 대한 소리, 코에 대한 냄새, 사지에 대한 안일(安逸) 등과 같은 물성(物性)을 인심이라고 정의함에 대하여, 부자 관계에 있어서의 인(仁), 군신 관계에 있어서의 의(義), 빈주(賓主) 관계에 있어서의 예(禮), 현자(賢者)에 있어서의 지(智) 등 의리적인 것을 도심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인심이 악(惡)으로 흐르기 쉬운 반면, 도심은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이며 인심을 이끌어 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작용까지 겸한 것이라고 하였다(『朱子語類』 卷62).
주희의 이러한 주장은 성리학에 있어서는 정론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육구연(陸九淵)과 명대(明代)의 왕수인(王守仁)에 의해 비판‧부정되었다. 즉 그들은 『상산어록(象山語錄)』‧『전습록(傳習錄)』 등에서, 인간의 마음을 인심과 도심으로 2분하는 주자학적(朱子學的) 태도를 비판하고 또 그 근원으로서의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둘로 나누는 데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황(李滉)은 주희의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여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결부시켜 이것을 논하였다. 즉 그는 형기(形氣)에서 나온 것을 인심이라 함에 대하여 성명(性命)에서 나온 것을 도심이라고 전제하고, 전자를 칠정(七情), 후자를 사단(四端)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 『퇴계집(退溪集)』 「답기명언논사단칠정(答奇明彦論四端七情)」에서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입각하여 인심은 기가 발한 것임에 반하여 도심은 이가 발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존천리알인욕(尊天理遏人欲 : 天理를 保存하고 人欲을 억제함)의 원칙에 입각하여, 인심에 비해 우위에 있는 도심으로써 인심을 절제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구체적 실현 방법으로서 거경(居敬)을 중시하였다. 이이(李珥)는 『율곡전서(栗谷全書)』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답성호원(答成浩原)」 등에서 인심이나 도심은 일심(一心)에 근거하고 있으며, 다만 그것이 식색(食色)을 위해서 발하는가, 의리(義理)를 위해서 발하는가에 따른 구분일 뿐이라고 하였다.
즉 그는 처음에 성명지정에서 나온 도심이라 하더라도 사욕에 가리게 되면 인심이 되고, 인심이라 하더라도 절제를 통해 정리(正理)에 일치하게 되면 도심이 된다고 하여 인심과 도심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의 근원에 대하여 그는 「인심도심설」에서 인심과 함께 천리, 즉 성(性)이라고 간주하였고, 「답성호원」에서는 인심이라고 하더라도 도심의 명령을 따르면 곧 도심이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인심이 도심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의작용(意作用), 즉 의(意)의 계교상량(計較商量)에 있다고 하여 이황이 마음의 정일(精一), 즉 거경을 중시한 점과는 대조적으로 성의(誠意)를 중시하였다.
<참조항목>
인심, 인심도심, 인심도심론, 인심유위도심유미
도참(圖讖)
한글항목명 | 도참 |
한자항목명 | 圖讖 |
유형 | 개념/문헌/학설‧논변 |
중국 시대 | 진한 시기/전한 |
<요약>
왕자(王者)의 운명이나 인사(人事)의 미래를 예언한 기록.
<설명문>
‘도(圖)’와 ‘참(讖)’은 거의 같은 뜻이지만, ‘도’는 도서(圖書)‧도화(圖畫) 등의 말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실과 실물(實物)을 떠나서 어느 정도 추상적이고 함축적으로 미래의 특징을 표시하는 것이고, ‘참’은 은미(隱微)한 말과 문자로써 미래의 일을 예언 또는 암시하는 것이다. 이후 도와 참은 도참이란 말로 연용되어 미래의 사상(事象), 특히 인간 생활의 길흉화복(吉凶禍福)‧성쇠득실(盛衰得失)에 대한 징조 또는 예언이라는 뜻이 되었다. 또 복희(伏羲) 때에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하도(河圖)의 ‘도’와 ‘참’이라는 글자가 합쳐진 말이라는 설(說)도 있다.
참위(讖緯)‧도위(圖緯)‧위도(緯圖)‧위참(緯讖)이라고도 한다. 참위의 ‘위’는 원래 경(經)에 비교되는 것으로서 경에 의부(依附)하여 어떤 일을 서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서(緯書)에는 도참‧상서(祥瑞)‧역운(歷運)‧부명(符命) 등 신비한 요소가 많이 있으므로 ‘위’와 도참을 연칭하여 참위라고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서에는 도참의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위서는 칠경위(七經緯 『易緯』‧『書緯』‧『詩緯』‧『禮緯』‧『樂緯』‧『春秋緯』‧『孝經緯』) 외에 하도‧낙서(洛書)‧『상서중후(尙書中侯)』‧『논어참(論語讖)』을 총칭한다. 그 성립 시기는 분명하지 많지만 방사(方士)류의 예언자나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에 입각한 금문학(今文學) 계열의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것이 위서로서 종합‧정리된 것은 후한말(後漢末)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참을 비결(祕訣)‧비기(祕記)‧비사(祕詞)라고 하며, 결(訣)이라고도 부른다.
중국에서 참위설(讖緯說)이 유행한 것은 양한(兩漢)시대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앞서 『사기(史記)』에는 진참(秦讖)이란 것이 있는데, 진책(秦策)이라고 하였다. ‘참’과 ‘책’은 거의 같은 내용의 것으로 모두 신탁(神託)‧몽조(夢兆)‧부참(符讖) 등의 뜻이다. 『사기』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는 주(周)의 태사(太史) 담(儋)이 진(秦)의 헌공(獻公)을 만난 자리에서 “진나라가 처음에 주나라와 합치고, 합쳤다가 떨어졌는데, 500년 후에 다시 합치게 되어 그 때부터 17년이 경과하면 패왕(霸王)이 나올 것입니다.”라고 도참을 진언한 말이 보이는데, 이것이 도참설의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또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記)」에는 도사(道士) 노생(盧生)이 바다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입니다”라고 도참을 얘기 했다는 기록도 있다.
진시황은 그 말을 믿고 군사를 보내어 흉노족을 격파하고 북쪽 국경에다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또 전한(前漢) 말기에 왕망(王莽)이 득세했을 때에, 우물 속에서 꺼낸 흰돌에 “안한공(安漢公) 망에게 알린다. 황제가 되리라.”라는 도참에 관한 글이 쓰여 있었는데 왕망은 이것을 근거로 야심을 성취하였고, 그 후부터 제왕이나 제왕이 되려고 하는 자가 이것을 많이 모방했다. 정현(鄭玄)‧가규(賈逵) 등은 경전의 해석에 도참설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도참설의 내용은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면이 많고, 혁명사상과도 연결되는 점이 있어서 후한 말부터 위진(魏晉)에 결쳐 비판과 금압(禁壓)이 행해졌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특히 수(隋) 양제(煬帝)의 금압에 의해 서적들이 망실되고 그 학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당(唐)의 『오경정의(五經正義)』 등에는 많은 위서가 인용되어 있어서 단편적이지만 위서가 통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망실되었던 위서의 자료는 명(明) 손곡(孫穀)의 『고미서(古微書)』나 청(淸) 교송년(喬松年)의 『위군(緯攟)』에 의해 다시 모아지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일찍부터 점성술이 발달되었고, 그에 따라 점몽(占夢)‧무복(巫卜) 등의 징험사상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류의 도참은 삼국시대부터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도참설에는 중국의 도참가인 승려 보지(寶誌)의 영향이 일정 정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것은 양(梁)의 무제(武帝)가 총애한 그에게 고구려에서 면모(緜帽)를 보내 공양하였다고 하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南史』 「陶弘景」). 고구려 말기에는 도교와 도참사상이 습합(習合)하여 평양성을 용언도(龍堰堵), 혹은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고 찬미하는 설화가 있었다. 이것을 보면 도교와 비기(秘記)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백제에도 도참이 있었다고 하지만 상세히는 알 수 없다.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崔致遠)의 참설이라고 전하는 “곡령송청계림엽황(鵠嶺松靑鷄林葉黃)”이라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풍수설(風水說)과 도참설을 결합한 불승 도선(道詵)의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은 고려 일대를 통하여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도학이 발달했던 조선시대에는 도참의 부정적인 측면을 경계하였으므로 적어도 공개적으로 도참설이 횡행하지는 않았다. 도참은 여러 가지 징조를 천문(天文), 복서(卜筮) 등에 의하여 신비적‧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미래기(未來記)로서, 시대가 혼란한 틈을 타서 인심을 자극하여 여러 가지 이해 득실을 빚어냈다. 그리하여 ‘도’나 ‘참’을 천의적(天意的)‧자연적인 표출이라 표방하고, 심지어는 인위적 조작을 마치 천의적‧자연적인 것같이 가장하게 되는 문제점이 노정되었다. 도학의 풍모가 강했던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사회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도참이 공식적으로 허용될 수 없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도참이 풍수지리설과 함께 유행되기도 하였다.
<참조항목>
위서, 풍수지리설
도통(道統)
한글항목명 | 도통 |
한자항목명 | 道統 |
유형 | 개념 |
한국 시대 | 조선 |
중국 시대 | 송원 시기 |
출전 | 「원도(原道)」,『성문사업도(聖門事業圖)』 |
<요약>
성인의 도(道)가 전수되어 온 맥(脈).
<설명문>
일반적으로는 체계적인 사상이나 철학의 지주로서 시대를 뛰어 넘어 계승 발전될 만한 가치를 보편적으로 승인받고, 또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중요 관념을 일컫는다. 이 말은 송(宋) 이원강(李元綱)의 『성문사업도(聖門事業圖)』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도통론적 발상의 단서는 맹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군자의 창업(創業)과 수통(垂統)은 후손이 계승할 수 있게 해야 한다.”(『孟子』 「梁惠王下」)라고 한 경우의 ‘수통’은 창업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명확히 도통 관념으로 발전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진 것이었다.
또한 그는 구체적인 도통에 관해서 황제의 덕성(德性)과 사람됨에 있어서는 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으로(『孟子』 「離婁下」), 일치일난(一治一亂)의 역사관에 있어서는 요(堯)‧우‧주공‧공자(孔子)로(『孟子』 「滕文公下」), 오백년마다 반드시 왕자(王者)가 나온다는 설에 입각해서는 요‧순(舜)‧우‧탕‧문왕‧공자로(『孟子』 「盡心下」) 분석하기도 하였다. 사실상 도통설은 당대(唐代)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서 형성된다.
그는 거기에서 도를 요‧순‧우‧탕‧문‧무‧주공‧공‧맹이 전수한 것으로 보고, 그 도는 윤집궐중(允執厥中)하고 백성에게 그 중(中)을 베푸는 지덕(至德)으로서 시중군자(時中君子)의 도임을 밝혔다. 주희(朱熹)는 이 개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그것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그는 유학에 있어서 도의 근원을 요가 순에게 주었다는 윤집궐중의 가르침에서 구하고 그 깊은 뜻이 자사(子思)의 『중용(中庸)』에 의해 해설되고 문헌적으로 정착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구체적인 도통에 대해서도 그는 공자 후에 증자(曾子)와 자사 두 사람을 더하고 그들로부터 맹자에게로 이어졌으며, 특히 송의 이정(二程)에게 전해졌다고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규경(李圭景)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 「동국도학전통도변증설(東國道學傳統圖辨證說)」에서 한국 유학의 도통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 의해 제시된 도통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권상하(權尙夏)‧윤봉구(尹鳳九)로 이어진다.
정몽주에서 조광조에 이르는 일련의 유학자들은 윤리적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정치적 경국제민(經國濟民)의 도를 존숭했으며, 이언적에서부터 송준길에 이르는 동안은 도학이 이학(理學)으로 전이(轉移)된 일대계기(一大契機)를 이룬 시기였고, 그 이후는 한국 성리학의 난숙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로서의 ‘중(中)’의 도, 전인적 인격으로서의 사유(士儒)의 도를 궁리‧실천한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도통이 확립됨으로써 공자 이전 요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도의 역사성과 불변한 가치가 입증되었으며, 정학(正學)과 위학(爲學)의 구별이 뚜렷해졌다. 또한 사상사적으로 볼 때 도통의 확립은 송대 성리학 전개의 한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