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시감상
「송박희령환향」 김안국
[ 送朴希齡還鄕 金安國 ]
(上略(상략))
記誦自膚末(기송자부말) 기송은 저절로 부차적인 것이요
詞章靡織組(사장미직조) 사장은 짜 맞춤에 쏠리네
俗士不探原(속사불탐원) 속된 선비 근원을 찾으려 않고
支流徒鹵莽(지류도로망) 지류조차도 거치네
矧是利祿輩(신시리록배) 하물며 이익만 따지는 무리들
貿貿安足數(무무안족수) 어리석어 어찌 일일이 헤아릴 수 있겠는가?
(下略(하략))
〈감상〉
이 시는 박희령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는 시의 일부분으로, 기송(記誦)이나 사장(詞章)에 그친 문장보다는 근본, 즉 도(道)를 중시하는 김안국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김안국이 신용개(申用漑)에게 써 준 글인 「이요정집서(二樂亭集序)」에, “이른바 문장이라는 것은 그 시문의 아름답고 공교로움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도리에 근본하고 덕행에 근원하는 것이 마음속에 가득해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다(所謂文章者(소위문장자) 非謂其詞翰之藻艶工贍而已(비위기사한지조염공섬이이) 必根理道本德行(필근리도본덕행) 弸乎中而彪乎外(봉호중이표호외)).”라 하여, 문장은 아름다움이 목적이 아니라 도(道)에 근원하고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고봉선생속집(高峰先生續集)』에 의하면, “김안국은 경상도 의성현 사람입니다. 공희왕을 섬겨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습니다.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하여 선비들의 사범이 되었습니다. 호는 모재 선생이라 합니다(金安國(김안국) 慶尙道義城縣人(경상도의성현인) 事恭僖王(사공희왕) 官至左贊成(관지좌찬성) 學問精博(학문정박) 爲儒者師範(위유자사범) 號慕齋先生(호모재선생)).”라 하여, 김안국의 문학이 당시에 영향을 얼마나 미쳤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주석〉
〖膚末(부말)〗 사물의 부차적인 부분. 〖靡〗 쏠리다 미, 〖組〗 짜다 조, 〖鹵莽(로망)〗 거침. 〖矧〗 하물며 신,
〖貿貿(무무)〗 생각이 주도면밀하지 못함.
각주
1 김안국(金安國, 1478, 성종 9~1543, 중종 38):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으며, 조광조·기준(奇遵) 등과 사귀었으며, 당시 시를 잘 지었던 시인으로 알려졌고 회문시(回文詩)나 율시(律詩)를 잘 지어 상을 받기도 했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고, 150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한 뒤 홍문관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지냈다. 이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각 향교에 『소학(小學)』을 나누어 가르치게 하였다. 같은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사사(賜死)되고, 김정(金淨)·김식(金湜)·김구(金絿) 등은 절도안치(絶島安置), 윤자임(尹自任)·기준 등은 극변안치(極邊安置)되었다. 이때 김안국도 아우 김정국 등 32명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 고향인 이천의 주촌(注村)과 여주의 폐천녕현(廢川寧縣) 별장에서 20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대개의 지배층 관료가 그러했듯이 김안국도 재지(在地)의 사회경제적 기반 위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과 시와 술을 즐기고, 학문을 강론했다.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린 그의 문인 44인 중 상당수는 이 시기에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그 뒤 정광필(鄭光弼) 등이 그를 다시 기용할 것을 거론했으나 기묘사화를 주도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집권하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김안로(金安老)가 집권하고 있을 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안로가 사사된 뒤인 1538년 홍문관 등의 현직(顯職)은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벼슬길에 다시 올랐다. 이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지냈다.
「제성거산원통암창벽」 남효온
[ 題聖居山元通庵囱壁 南孝溫 ]
東日出杲杲(동일출고고) 동쪽 해가 눈부시게 떠오르고
木落神靈雨(목락신령우) 신령한 비처럼 낙엽이 떨어지네
開囱萬慮淸(개창만려청) 창문 열자 온갖 생각 맑아져서
病骨欲生羽(병골욕생우) 병든 몸에 날개가 돋으려 하네
〈감상〉
이 시는 성거산에 있는 원통암 창 벽에 쓴 시이다.
서늘한 가을 아침, 동쪽으로 맑은 해가 눈부시게 솟아오르고 있고, 신령스러운 비처럼 낙엽이 아침에 떨어지고 있다(힘없이 저녁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을 아침인데도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창문을 열자 온갖 근심들이 맑아져 병든 몸인데도 날개가 돋아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다.
〈주석〉
〖聖居山(성거산)〗 직산현(稷山縣) 동쪽 20리 지점에 있음. 고려 태조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주필(駐蹕)하여 동으로 산 위를 바라보니 오색의 구름이 있어 신이 있다고 여기고 제사를 지냈으므로 붙여진 이름.
〖囱〗 창 창, 〖杲〗 밝다 고
각주
1 남효온(南孝溫, 1454, 단종 2~1492, 성종 23): 조선 전기의 문신이고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의령,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이다.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낸 일이 늘 마음에 걸려 있던 그는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나타나서 아들을 죽인 것을 책하자, 세조가 물가로 옮기게 한 소릉(昭陵, 현덕 왕후의 능)의 복위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임사홍(任士洪)·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상을 등지고 가난 속에서 농사를 짓거나 의기로 합한 친구들과 어울려 시문(詩文)으로 심사를 달래기도 하고 유랑 생활로 인생을 마쳤다. 죽은 후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고 폐비 윤씨의 복위를 주장했다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 그가 저술한 「육신전(六臣傳)」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숙종 때 간행되었다. 『추강집(秋江集)』이 있다.
「차김대유(굉필)상필재선생운」 오수 김일손
[ 次金大猷(宏弼)上畢齋先生韻 五首 金馹孫 ]
其四(기사)
空山花落月如氷(공산화락월여빙) 빈산에 꽃잎 지고 달은 얼음 같은데
蜀魄聲中哭未能(촉백성중곡미능) 두견새 소리에 통곡도 할 수 없네
自是無心人世事(자시무심인세사) 이로부터 세상일에 뜻이 없어져
帝鄕何處白雲乘(제향하처백운승) 제향이 어디인가? 백운 타고 가련다
〈감상〉
이 시는 김굉필이 필재 선생에게 올린 시에 차운한 시이다.
텅 빈 산에 꽃이 지고 달도 얼음처럼 차가운데, 두견새 울음소리를 듣고도 통곡할 수 없다(두견새 울음은 원통하게 죽은 단종(端宗)의 울음이요, 이 울음소리를 듣고도 통곡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시의 허탈한 상실감을 의미함). 이로부터 세상사에 뜻이 없어져 현실을 등지고, 흰 구름을 타고 제향으로 가고 싶다(흰 구름을 타고 제향으로 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곡조차 할 수 없는 시대 상황이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의미).
『해동잡록』에 그의 생평(生平)이 아래와 같이 간략히 실려 있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계운(季雲)이요, 호는 탁영자(濯纓子)인데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다.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성종(成宗) 병오년에 사마시에 장원급제하고 같은 해 갑과(甲科)에 올라, 문장과 기절(氣節)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연산 때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권경유(權景裕)·권오복(權五福)과 함께 죽었다. 세상에 간행된 문집이 있다(金海人(김해인) 字季雲(자계운) 號濯纓子(호탁영자) 首露王之裔(수로왕지예) 受業於佔畢齋門下(수업어점필재문하) 我成廟丙午(아성묘병오) 中司馬壯元(중사마장원) 登同年甲科(등동년갑과) 以文章氣節名世(이문장기절명세) 燕山戊午史禍起(연산무오사화기) 與權景裕權五福同死(여권경유권오복동사) 有集行于世(유집행우세)).”
〈주석〉
〖蜀魄(촉백)〗 두견새. 〖帝鄕(제향)〗 =선향(仙鄕)
각주
1 김일손(金馹孫, 1464, 세조 10~1498, 연산군 4):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소미산인(少微山人). 17세까지는 할아버지 극일(克一)에게서 『소학』·『통감강목』·사서(四書) 등을 배웠으며, 뒤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갔다.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올랐다. 14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주서(注書)·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世祖纂位)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제화선」 이승소
[ 題畵蟬 李承召 ]
香燒古篆坐蕭然(향소고전좌소연) 향을 고전 향로에 사르고 쓸쓸히 앉아
讀盡黃庭內外篇(독진황정내외편) 『황정경』의 내외 편을 모두 읽었다
一味天眞無與語(일미천진무여어) 천진의 한 맛 더불어 말할 이 없어
畫中相對飮風仙(화중상대음풍선) 그림 속에서 서로 대하니 바람을 마시는 신선일세
〈감상〉
이 시는 매미를 그린 그림에 쓴 제화시(題畵詩)로, 이승소의 탈속(脫俗)한 모습이 잘 드러난 시이다.
성현(成俔)의 「제삼탄집후(題三灘集後)」에서, “내가 후배로서 문하에 노닐며 훌륭한 광채를 입고 남은 향기를 마신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공의 행동거지는 한아하고 자태는 옥과 눈처럼 맑아 완연히 신선 중에 사람 같았다. 사람들이 그를 공경하고 사모하여 짧은 글이라도 얻은 자는 정밀한 금과 아름다운 옥덩이같이 하여, 읊조리며 완상하여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予以後進(여이후진) 遊于門下(유우문하) 承休光而挹餘馥者非一日(승휴광이읍여복자비일일) 公擧止閑雅(공거지한아) 風姿玉雪(풍자옥설) 宛如神仙中人(완여신선중인) 人敬慕之(인경모지) 得片言隻字者(득편언척자자) 如精金美璞(여정금미박) 吟翫而手不能釋焉(음완이수불능석언)).”라고 언급했는데, 위의 시에서 이러한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주석〉
〖蟬〗 매미 선, 〖黃庭(황정)〗 도교의 경전인 『황정경(黃庭經)』을 이름.
각주
1 이승소(李承召, 1422, 세종 4~1484, 성종 15):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윤보(胤保), 호는 삼탄(三灘). 1447년(세종 2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문과중시에도 합격했다. 부교리를 거쳐 145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1454년(단종 2) 장령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한 뒤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1457년(세조 3) 예문관응교로 『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옮겼고, 이듬해에는 예조참의로 『초학자회언해본(初學字會諺解本)』을 지어 바쳤다. 1459년 사은사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의·예문관제학·충청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으며, 예조판서 겸 지경연사를 지냈다. 이때 경연에서 사서(史書)의 간행·보급 및 교육의 강화와 불교 탄압을 주장했다. 그 뒤 우참찬을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이조·형조 판서를 지내면서 신숙주(申叔舟)·강희맹(姜希孟) 등과 함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했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예악(禮樂)·병형(兵刑)·음양(陰陽)·율력(律曆)·의약(醫藥)·지리(地理) 등에도 능통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영현암 몽자당」 남효온
[ 靈顯庵 夢慈堂 南孝溫 ]
遠客辭親四浹旬(원객사친사협순) 먼 나그네 어머님 떠나온 지 사십 일이 되니
破衫蚤蝨長兒孫(파삼조슬장아손) 찢어진 적삼엔 벼룩과 이들 새끼까지 자랐네
裁書付僕重重語(재서부복중중어) 편지 적어 종에게 보내며 거듭거듭 이르노니
魂先歸書到蓽門(혼선귀서도필문) 꿈속 영혼이 편지에 앞서 사립문에 닿았도다
〈감상〉
이 시는 그의 나이 29세 되던 해인 1482년에 지은 것으로, 영현암에서 어머니를 꿈꾸며 지은 것이다.
남효온은 소릉(昭陵) 추복이 좌절된 후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걱정을 듣고 부근의 영현암에 들어가 친구와 함께 과거(科擧) 공부를 다시 시작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영현암을 나온다.
〈주석〉
〖浹〗 일주 협, 〖衫〗 적삼 삼, 〖蚤〗 벼룩 조, 〖蝨〗 이 슬, 〖裁書(재서)〗 편지를 씀. 〖付〗 주다 부, 〖蓽〗 사립짝 필
각주
1 남효온(南孝溫, 1454, 단종 2~1492, 성종 23): 조선 전기의 문신이고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의령,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이다.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낸 일이 늘 마음에 걸려 있던 그는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나타나서 아들을 죽인 것을 책하자, 세조가 물가로 옮기게 한 소릉(昭陵, 현덕 왕후의 능)의 복위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임사홍(任士洪)·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상을 등지고 가난 속에서 농사를 짓거나 의기로 합한 친구들과 어울려 시문(詩文)으로 심사를 달래기도 하고 유랑 생활로 인생을 마쳤다. 죽은 후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고 폐비 윤씨의 복위를 주장했다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 그가 저술한 「육신전(六臣傳)」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숙종 때 간행되었다. 『추강집(秋江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