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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둑제(纛祭)
정의
조선시대에 군중(軍中)에 세우던 군기(軍旗)인 둑(纛)에 지낸 제사.
개설
둑은 군대의 위용을 상징하는 군기로, 정벌 대상의 머리를 창에 꿴 그림을 그려놓았다. 둑제 때는 둑 4개를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게 배치하였다. 둑제는 정기적으로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에 지냈으며, 군대가 출병할 때에도 반드시 지냈다[『명종실록』 10년 6월 9일]. 헌관(獻官)은 병조(兵曹) 판서(判書)가 맡았는데 유고시에는 병조 참판(參判)이 대행하였으며, 전사관(典祀官)은 훈련원(訓鍊院) 주부(主簿)가 맡았다. 둑제에 참여하는 사람은 모두 갑옷과 투구를 갖추었다. 중앙의 둑소(纛所) 및 지방의 병영·수영 등에서도 둑제를 지냈다. 둑제는 조선시대의 사전(祀典) 체제에서 보기 드문 군사 관련 제의였으며, 이러한 특수성은 또 다른 군사 관련 제의인 마제(禡祭) 등이 조선후기에 이르러 거의 시행되지 않게 되면서 더욱 강해졌다.
연원 및 변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군례(軍禮) 서례(序禮)에는 둑에 대하여, ‘치우(蚩尤)의 머리와 같다.’고 하였다. 즉 강력한 적을 정벌한 뒤 그 위엄을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둑이 제사의 대상이 된 것은 1001년(송 함평 4) 무렵이며, 명나라 때에 이르러 기둑묘(旗纛廟)의 신을 모시는 정기적인 제사를 둑제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둑제는 고려시대에 도관(道觀)인 태청관(太淸觀)에 의해 시행되었으므로 도교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393년(태조 2)에 홍둑(紅纛)과 흑둑(黑纛)을 만들고 처음으로 둑제를 지냈다[『태조실록』 2년 1월 16일].
1393년 처음 둑제를 지낼 때는 어떤 음악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같은 해 7월에 정도전(鄭道傳)이 여러 악장을 지었는데, 그중에서 이성계(李成桂)가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를 물리친 일을 노래한 ‘납씨가(納氏歌)’와 위화도 회군을 찬양한 노래인 ‘정동방곡(靖東方曲)’을 이후 둑제에 사용하였다[『태조실록』 2년 7월 26일]. 그리고 다음 해인 1394년(태조 3)에는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이던 정도전이 둑제를 주관하였다. 정도전은 이 시기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2월에는 10위를 10사로 개혁하는 것을 비롯한 병제 개혁안을 상서하였는데[『태조실록』 3년 2월 29일], 이는 공신 및 왕자들의 사병을 크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둑제를 주관하였다는 것은 군권을 장악하였다는 의례적 상징성이 컸다. 정도전이 둑제를 지낸 다음 날 제의에 참여하지 않은 장수들에게 태형(笞刑)을 가한 것[『태조실록』 3년 1월 28일]도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징계였을 것이다. 군권의 향방이 중요하였던 조선초기의 정치 상황에서 둑제가 지닌 상징성은 여타 제의에 비해 훨씬 구체적인 것이었다.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봄과 가을에 지내는 둑제를 소사(小祀)의 규례로 확정하였다[『세종실록』 3년 7월 19일]. 1440년(세종 22)에는 예조(禮曹)에서 둑제 의주(儀註)를 정하였다[『세종실록』 22년 6월 13일]. 이 시기 의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둑제는 유교식 국가 의례로 정착하게 되었다.
둑제의 제사 대상인 둑에는 대·중·소의 크기 구분과 홍둑·흑둑·청둑의 색상 구분이 있었다[『세종실록』 6년 9월 10일][『성종실록』 1년 9월 4일]. 둑제를 지낸 장소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하지만 둑제를 제대로 행하지 못한 지방의 병사(兵使)를 처벌하였다는 기록, 큰 군기[纛]가 있는 곳의 제사에는 병조 판서를 헌관으로 보내고 악장 역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쓴다는 기록[『정조실록』 17년 11월 6일] 등을 볼 때 군기가 있는 군영, 특히 병영(兵營)이나 수영(水營)에서 둑제를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둑제에 참여하는 무관들은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었다. 헌관들은 갑옷에 립(笠)을 썼는데, 1795년(정조 19) 병조 판서 심환지(沈煥之)의 건의로 헌관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갑옷에 투구를 쓰게 되었다[『정조실록』 19년 2월 25일]. 둑제는 조선말기까지 계속해서 시행되었으나, 1908년(융희 2) 둑신묘의 제사를 연 1회로 정한 뒤, 군대해산을 즈음하여 없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절차 및 내용
1440년(세종 22)에 예조에서 둑제의 의주(儀註)를 정하였다. 이 내용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에 반영되었다.
이에 따르면 둑제의 헌관은 소사의 규례에 따라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의 재계를 하며, 무복을 갖춘 여러 제관과 훈련원 관원들이 예에 참여한다. 먼저 집사자들이 네 번 절을 하는 사배례(四拜禮)를 하고 다음으로 손을 씻고, 술잔을 씻는다. 그 뒤 헌관과 배제관(陪祭官)들이 들어와 네 번 절하고 손을 씻는다. 집사자가 신위에 세 번 향을 올리는 삼상향(三上香)을 하고, 헌관이 정해진 폐백을 올리는 예인 전폐(奠幣)를 한다.
악생(樂生)들이 간척무(干戚舞)를 춘다. 이때 초헌례(初獻禮)를 행하는데, 초헌관(初獻官)이 술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다. 그 다음 간척무를 춘 악생들이 물러가고 궁시무(弓矢舞)가 이어진다. 아헌관(亞獻官)이 술잔을 올린다. 궁시무를 춘 무리가 물러가고 창검무(槍劍舞)를 춘다. 종헌관(終獻官)이 마지막 세 번째 술잔을 올린다.
음복(飮福)과 수조(受胙)를 행한다. 제기를 거두는 것을 상징하는 철변두(撤籩豆)를 한 뒤 헌관과 배제관이 모두 네 번 절한다. 헌관이 망예위(望瘞位)로 가서 축판(祝板)과 폐백(幣帛)을 묻는 것을 지켜보면 예가 끝난다.
마지막으로 제사 참여자들이 차례로 나가고 전사관이 제사 음식을 거둔다[『세종실록』 22년 6월 13일]
병조 판서 이하 훈련원 관원을 중심으로 거행되는 의례이자 무관들이 주도하는 유일한 의례였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따르면, 무관이 아닌 악공들도 둑제에 참여할 때는 무복을 입고 투구를 쓰도록 하였는데, 군사와 관련된 강력한 상징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 보이도록 한 것이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둑제는 조선말기까지 시행되었는데, 그에 따라 제사에 사용된 음악들도 오랜 세월 전승되었다. 특히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한 ‘납씨가(納氏歌)’와 ‘정동방곡(靖東方曲)’은 둑제와 함께 근대까지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둑제가 폐지되면서 전하지 않게 되었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김성혜, 「둑제의 음악사적 고찰」, 『음악과 민족』38, 2009.
김종수, 「둑제(纛祭) 재현을 위한 문헌 조사」, 『동방학』12, 2006.
이욱, 「조선전기 유교국가의 성립과 국가제사의 변화」, 『한국사연구』118, 2002.
멱(羃)
정의
제례에 사용하는 술병인 준(尊)과 뢰(罍)를 덮는 덮개.
개설
준과 뢰는 제사 의례에서 각종 술을 담는 데 사용하는 술병이다. 멱은 길례, 가례, 흉례의 여러 의식에서 술 항아리를 놓는 장소인 준소(尊所)나 혼전(魂殿) 등에 진설된 준과 뢰를 덮는 데 사용하였다.
1451년(문종 1)에 편찬된 『세종실록』「오례」에는 멱을 ‘멱준소포건(冪尊疏布巾)’이라 하여 성근 베로 만든 네모진 덮개를 도설로 제시하였는데, 멱과 준은 명칭만 다를 뿐 외관이나 용례는 동일하다.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십자형의 구름 문양을 넣은 멱의 그림을 수록하고 있는데, 구름 모양 장식이 들어가서 아무 문양이 없던 것과는 외관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쓰임새는 같았다.
연원 및 변천
중국 고대부터 있어온 것이나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다. 중국 고대의 삼례(三禮) 가운데 하나인 『주례(周禮)』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멱의 연원은 『주례』의 편찬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의 『세종실록』「오례」에 처음으로 도설(圖說)이 등장하였다. 이후 성종대의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정조대의 『춘관통고』, 대한제국 시기의 『대한예전(大韓禮典)』 등 역대 전례서(典禮書) 및 의궤(儀軌)에 다양한 도설이 수록되어 있다.
형태
대나무로 멱의 틀을 만들고 겉과 속을 베나 거친 갈포(葛布)로 싸는데, 겉은 검은색으로, 속은 붉은색으로 싼다. 중국 남송대 주희(朱熹)가 지은 『소희주현석전의도(紹煕州縣釋奠儀圖)』를 살펴보면, 옛날에는 멱에 씌울 베[布]의 폭을 2자 2치(약 67㎝)로 하고 둥그런 모양으로 하였으나, 지금은 베의 폭을 1자(약 30㎝)로 하고 네모나게 만든다.’라고 되어 있다. 또 『주례』에 의하면, “팔준(八尊)은 천지(天地)에 헌작(獻酌)하기 위해 거친 베로 된 건[疏布巾]을 사용하는데 이는 질박함을 숭상하기 때문이며, 육이(六彝)는 종묘에 관향(祼享)하기 위해 고운 베로 된 건[布巾]을 사용한다. 한편 멱에 십자형의 구름 문양을 넣은 것과, 국가 제사에서 희생으로 사용하는 송아지인 특생(特牲)을 담은 제기를 덮는 멱은 모두 거친 갈포를 쓴다.”라고 하였다. 준(尊)과 이(彝) 역시 제기로 준은 신위에 잔을 올릴 때 쓰는 술잔의 일종이고, 이는 강신(降神)을 할 때 울창주를 담는 용도로 쓰는 용기였다. 이것들에 모두 멱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춘관통고』에는 십자형의 구름 문양을 넣은 멱이 소개되어 있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종묘의궤(宗廟儀軌)』
『춘관통고(春官通考)』
『소희주현석전의도(紹熙州縣釋奠儀圖)』
명산대천제(名山大川祭)
정의
전국 각지의 산천 23개소에서 지내던 정기 제사 및 기우 등을 위한 비정기 제사.
개설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시행한 소사(小祀)로, 전국의 명산대천 23처에서 중춘(仲春)과 중추(仲秋) 초에 정기적으로 지냈다. 또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기우제였다. 산천 신의 힘을 빌려 비를 얻고자 한 것인데, 그 사례는 조선초기부터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태종실록』 5년 5월 8일][『태종실록』 15년 6월 3일]. 1474년(성종 5)에는 기우하는 공식 절차에 명산대천제가 포함되었으며, 이는 조선말기까지 이어졌다. 그밖에 왕의 외부 행차가 있을 경우, 경유하는 곳의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년 4월 17일][『중종실록』 20년 2월 28일]. 1729년(영조 5)에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발인을 앞두고 재궁(梓宮)이 지나는 곳에서 도로교량제, 명산대천제를 지냈다[『영조실록』 5년 1월 24일].
명산대천제를 지내는 23처는 1414년(태종 14)에 정해졌는데, 경성(京城)의 목멱(木覓), 경기도의 오관산(五冠山)·감악산(紺岳山)·양진(楊津), 충청도의 계룡산(雞龍山)·죽령산(竹嶺山)·양진명소(楊津溟所), 경상도의 우불신(亐弗神)·주흘산(主屹山), 전라도의 전주 성황(全州城隍)·금성산(錦城山), 강원도의 치악산(雉嶽山)·의관령(義館嶺)·덕진 명소(德津溟所), 풍해도(豐海道: 현 황해도)의 우이산(牛耳山)·장산곶이[長山串]·아사진(阿斯津)·송곶이[松串], 영길도(永吉道: 현 함경도)의 영흥 성황(永興城隍)·함흥 성황(咸興城隍)·비류수(沸流水), 평안도의 청천강(淸川江)·구진 익수(九津溺水)등이었다[『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연원 및 변천
명산대천제는 개별 산천에 지낸 제사로, 중사(中祀)인 산천제(山川祭)와 구분된다. 산천제는 국내의 산천 일반을 추상화하여 대상으로 삼은 제사로, 서울의 풍운뇌우산천성황단(風雲雷雨山川城隍壇)에서 지냈다. 산천단은 처음에는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었는데, 1406년(태종 6)에 남산 양지 쪽 율현(栗峴) 서동(西洞)으로 옮겼다[『태종실록』 6년 1월 28일].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사전(祀典) 체제를 답습하다가, 주로 태종~세종 연간에 명산대천제의 의례를 정비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사전을 개정하였는데, 이때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거하여 산천의 봉작을 일제히 삭제하였으며, 그에 따라 각 산천의 사당에 그 신의 처첩·자녀·생질 따위의 신상(神像)을 설치하여 제사하던 것도 모두 폐지하였다. 또한 산천에 지내던 제사를 정비하여 악해독(嶽海瀆) 13처에는 중사를, 명산대천 24처에는 소사를 지내도록 규정하였다[『태종실록』 13년 6월 8일].
여러 산천에 명산대천제라는 이름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국가에서 선정한 제사처가 아닌 곳에 지내는 제사를 ‘음사(淫祀)’로 규정하여 탄압한 것은 종교 생활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를 천명한 것이었다. 따라서 명산대천제는 산천에 대한 제사를 유교의 틀 안에 포섭하는 방향으로 개편이 이루어졌으며, 의례의 내용 또한 무속적인 면을 없애 유교적인 제의로 변모시켰다. 세종 때는 각지의 산천 단묘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산천단묘순심별감(山川壇廟巡審別監)을 각 도에 파견하였고, 예조(禮曹)에서 그 조사 결과와 일차적인 개혁 사항을 보고하였다[『세종실록』 12년 8월 6일]. 좀 더 본격적인 개혁안은 1437년(세종 19)에 발표되었는데 이를 보면, 신위판(神位版)의 제도 등을 개혁하는 데 『홍무예제』를 준용했음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19년 3월 13일].
명산대천제는 단순히 각 지역의 산천신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낸 데 그치지 않았으며, 기우처로서 중요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태종~세종대의 명산대천제 개편과 유교식 제의 도입만으로 각 산천신에 대한 무속적 신앙이 완전히 포섭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영험한 산천을 찾는 경향이 잔존하기는 했지만 점차 제장(祭場)이 설치된 산천에 대한 제사는 지방관 주도로 행해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의 산천 제사는 중사인 악해독, 소사인 명산대천, 그 이하 등급의 소재관 치제소로 나뉘게 되었고 그 밖의 산천에 지내는 제사는 음사로 규정하여 배척하게 되었다.
절차 및 내용
명산대천제를 지낼 때는 해당 신위(神位)를 설치하되 한가운데에 있게 하고, 남쪽을 향하게 하며,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서례 신위].
헌관(獻官)은 소재관 수령(守令)이 맡는다. 소사의 규례에 따라 재계는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 등 총 3일간 행하며, 찬실(饌實)은 영성(靈星)과 같이 한다. 제사 하루 전에 찬만(饌幔), 의례를 거행하는 자리 등을 마련해 둔다.
제사 당일에는 축시(丑時) 5각(刻) 전에 제사 음식을 차리고 신위판을 올려둔다. 3각 전에 헌관과 집사관들이 각기 알맞은 옷을 갖춘다. 찬자(贊者)와 알자(謁者)는 미리 네 번 절한다. 1각(刻) 전에 집사관들이 절하는 자리[拜位]에 나아간다. 집사관이 모두 네 번 절하고 손을 씻은 뒤 잔을 씻는다. 헌관이 들어와 네 번 절하고 손을 씻은 뒤 신위에 세 번 향을 올리는 삼상향(三上香)을 행한다. 그 후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린 다음 내려와 자리로 돌아간다. 헌관이 다시 신위 앞에 나아가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를 행하고,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와 종헌례(終獻禮)도 같이 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길례」에 따르면, 음복(飮福)과 수조(受胙)를 한 뒤 네 번 절하고 철변두(撤籩豆)를 한다. 헌관이 네 번 절한다. 헌관이 망예위(望瘞位)로 나아가 축판과 폐백을 묻는 것을 보고 나면 알자가 모든 의식이 끝났다는 뜻에서 ‘예필(禮畢)’이라고 한다. 헌관이 나간다. 집사관들이 네 번 절하고 나간 뒤 장찬자(掌饌者)가 신위판을 보관하고 제사 음식을 치운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오늘날 산천에 대한 제사는 그 양식 면에서 지역별로 큰 편차를 보인다. 바닷가나 강가의 부군당굿은 해양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굿놀이 양식을 고수하여 무속적인 성향이 강하게 남아 있지만, 산신제 계열의 경우 굿판을 벌이는 경우가 매우 드물며 대개 유교식 제례로 치러진다. 산천을 비롯한 자연물에 대한 신앙을 유교적 사전 체제 안으로 포섭하려던 조선시대 지배층의 시도는 자연환경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박흥주, 『서울의 마을굿』, 서문당, 2001.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작과비평사, 2009.
이욱, 「조선전기 유교국가의 성립과 국가제사의 변화」, 『한국사연구』118, 2002.
허흥식, 「조선전기 경상도의 산천단묘와 그 특징」, 『민족문화논총』28, 2003.
모혈(毛血)
정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제향에 쓰던 짐승의 털과 피.
내용
모혈(毛血)은 종묘나 사직의 제향 때 희생물을 잡고 나서 제일 먼저 올리는 제물이다. 이 제물은 신이 내려와 제향을 받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올리는 것이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제사 하루 전에 전사관(典祀官)이 재인(宰人)을 거느리고 난도(鑾刀)로 희생(犧牲)을 베면 축사(祝史)가 반(槃)에 털과 피, 즉 모혈을 받아 찬소(饌所)에다 두고 희생을 삶는다고 하였다. 모혈은 제사가 끝나면 묻는다. 피에는 고유(告幽)의 뜻이 있고 털에는 고전(告全)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용례
禮儀使導上入自東門 詣版位北向立 因請行事 瘞毛血 軒架作景安之樂烈文之舞 樂八成 上四拜 在位者亦拜 而承史例不拜 拜訖 樂止[『영조실록』 25년 4월 11일]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모혈반(毛血盤)
정의
제사 때 도살한 희생의 털과 핏덩이를 바칠 때 사용하는 쟁반.
개설
중국의 고대 제사는 가축을 살해하여 바치는 희생제였기 때문에 희생(犧牲)을 다루고 올리는 절차가 제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희생제의 전통은 중국과 한국의 국가 제사에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국가 제사 중 단오나 추석, 설날 등에 지내는 속제(俗祭)를 제외한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에서는 반드시 소, 양, 돼지 등의 희생을 사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대사 또는 중사 중 국왕이 직접 제사를 드리는 친제(親祭)의 경우 도살한 소의 털[毛]과 핏덩이[血]를 신에게 올렸다. 핏덩이를 올리는 것은 희생을 도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털은 희생이 순색의 온전한 것임을 나타낸다. 모혈반은 이렇게 모혈을 올릴 때 사용하는 쟁반[槃]을 가리킨다.
연원 및 변천
고대 중국에서 희생제를 지낼 때 털과 핏덩이를 담는 그릇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남북조 시기 남조(南朝)의 최초 왕조인 송(宋)나라에서부터 질그릇으로 만든 두기(豆器) 모양의 그릇에 담았다. 당나라에서도 모혈을 올릴 때 두(豆)를 사용하였고,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려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송 신종(神宗) 때부터 모혈을 쟁반에 담았으며, 조선에서는 이를 따랐다. 모혈반은 향을 올리고 폐백을 드리는 전폐례(奠幣禮)의 절차가 끝나면 신위(神位) 앞에 올린다. 성종대에 간행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나 숙종대에 편찬한 『종묘의궤(宗廟儀軌)』에서 모혈반의 위치는 신위 바로 앞쪽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제상의 오른편 앞쪽, 곧 두의 오른편 남쪽으로 위치가 바뀌었다. 제상에 올려진 모혈반은 희생의 삶은 고기를 드리는 궤식(饋食)의 절차에 앞서 철거되었다.
형태
조선전기에 사용된 모혈반의 모습이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종묘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놋쇠로 만들었고, 지름이 1자 1치(약 33㎝)인 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깊이는 1치 3푼(약 3㎝)이다. 아래에 둥근 받침대가 있는데 지름이 7치 8푼(약 24㎝)이고 높이가 2치 2푼(약 7㎝)이다.
참고문헌
『사직종묘문묘제기도감의궤(社稷宗廟文廟祭器都監儀軌)』
『선조의인왕후부묘도감삼방의궤(宣祖懿仁王后祔廟都監三房儀軌)』
『종묘의궤(宗廟儀軌)』
민충단(愍忠壇)
정의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와서 싸우다가 죽은 명나라 장사(將士)들을 추모하는 제단.
개설
원래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전사한 자국의 군사들을 위하여 전장(戰場)에 세운 제단으로, 흔히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라고 불렀다. 조선 조정은 전쟁 중에는 그 제사를 시행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대주는 방식으로 관여하였지만,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제사를 직접 이어받아 시행하였고 조선말기까지 이를 유지하였다. 민충단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의 병부(兵部) 상서(尙書)형개(邢玠)와 경리(經理)양호(楊鎬)를 제사하는 사당인 선무사(宣武祠)와 더불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워 명군을 추모한 대표적인 제사 장소였다.
위치 및 용도
민충단은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전몰장병이 많았던 지역에 주로 설치되었다. 도성 근처에는 홍제원(弘濟院)에 있었고, 평안도의 평양, 경기도의 벽제(碧蹄), 경상도의 안강(安康) 등에도 설치되었다. “전장 근처에 대략 땅을 닦고 나무를 세워 ‘칙사민충단(勑賜愍忠壇)’이라 쓰고, 우선 국명(國命)으로 그 옆에서 제사한다.”[『선조실록』 26년 윤11월 24일]는 기록으로 볼 때, 제단의 형태는 인귀(人鬼)를 모시는 묘(廟)가 아니라 자연신을 모시는 단(壇)의 형태를 취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제단의 형태는 사묘(祠廟)로 건립된 선무사와는 다른 방식이다.
변천 및 현황
민충단에 대한 제사는, 1593년(선조 26) 윤11월에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평양·벽제·왕경 등에 제단을 설치하고 진중(陣中)에서 죽은 명군을 제사한다고 전하자, 이에 대응하여 조선 조정에서 전장 근처에 나무를 세우고 ‘칙사민충단’이라는 글을 내려 제사하도록 조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제사는 조선에 파견되어 있던 명나라 장수가 주관하거나 명나라 조정에서 따로 관리를 보내 지내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명나라에서 별도로 제관(祭官)을 파견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조선 조정이 이어서 제사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전에 제사는 일시적으로 폐지되었다.
1657년(효종 8) 6월, 전국에 여역(癘疫)이 성행하자 경외(京外)의 산천, 성황 및 북교 등에서 여제(癘祭)를 지냈는데, 이때 민충단에도 관리를 보내 여제를 시행하면서 제사가 재개되었다. 여제는 원래 억울하게 죽었음에도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들에게 지내는 제사인데, 제사의 대상에 ‘전장에서 국가를 위해 죽은 자’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민충단에서도 제사를 지낸 것이다. 1679년(숙종 7) 5월에는 가뭄이 심해지자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제 및 기우제를 시행하게 되면서 민충단은 전몰장병에 대한 추모라는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현종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편 1704년(숙종 30)에는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하는 대보단(大報壇)이 창덕궁 후원에 설립되었는데, 이후 민충단의 제사는 대보단의 제사와 함께 거행되었다. 대보단과 민충단의 제사가 결합된 것에 대해 1775년(영조 51) 당시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였던 유의양(柳義養)은, 민충단이 임진왜란 때 신종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설립된 것이기 때문에 신종을 모시는 대보단의 제사와 뜻이 같다고 설명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춘관통고(春官通考)』
김문식·한형주·이현진·심재우·이민주, 『조선의 국가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이영춘, 「朝鮮後期의 祀典의 再編과 國家祭祀」, 『한국사연구』118,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