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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없는 노동: 플랫폼 자본주의의 민낯과 미세노동의 탄생
WORK WITHOUT THE WORKER(2021)
필 존스 지음, 김고명 옮김, 롤러코스트 2022
서문
메커니컬터크: 미세노동의 탄생
자동화가 만드는 낙원은 어디까지나 환상에 불과하다. 검색 엔진, 앱, 스마트 기기의 배후에는 항상 노동자가 존재한다. 그들은 글로벌 시스템의 변방으로 밀려나 단돈 몇 센트를 받고 데이터를 정리하거나 알고리즘을 감독하는 일 말고는 달리 살아갈 방편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지금 우리는 기술적 경이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계가 체스로 인간을 꺾고, 노래를 작곡하고, 스스로 차를 모는 세상이다. 무인 매장에 가면 따로 계산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결제가 이뤄진다. 두뇌에 심어놓은 작은 칩으로 기계가 인간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 실리콘밸리가 앞장서서 만들고 있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이 유토피아는 지구라는 병든 행성을 치유하고 우리를 화성으로 이주시키겠다고, 영생을 실현하고 우리를 지긋지긋한 노동에서 해방해 신의 경지에 올려주겠다고 손짓한다. 그것은 풍요롭고 스마트한 세상, 편리함이 최고의 덕목으로 추앙받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 토대는 빈약하기만 하다. 거침없는 돌격에 가까운 과학의 진보는 극소수 IT 공룡 기업이 바라는 꿈일 뿐이다. 그들이 그리는 유토피아의 이면에 있는 디스토피아를 자각한다면 우리와 닮은 기계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환상에 결코 도취될 수 없다. 그 환상의 눈부신 껍데기를 들추면 그 아래에는 인간이 더욱 탄압받고 감시당하고 원자화되는 어두운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 닥친 경제 위기와 팬데믹 같은 세계사적 사건이 우리를 그 디스토피아의 한복판으로 더욱 거세게 떠밀고 있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비접촉형 미래”다.
코로나19가 세계를 뒤덮으면서 우리는 되도록 타인과 접촉을 피하라는 권고를 받으며 좀처럼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집이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사무실, 쇼핑몰, 피티니스센터, 병원, 영화관의 역할까지 하게 됐다. 사물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가 잠을 잘 때, 누군가를 만날 때, 우리의 심장이 박동할 때 그 모든 순간이 데이터화돼 어딘가로 전송되고 그 결과 우리는 각종 플랫폼을 통해 우리 삶에 최적화된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집 밖으로 나가면 “스마트 도시”라는 이름으로 더욱 광범위한 감시망이 가동 중이다. 이 감시망은 박탈당한 자들, 곧 피박탈자들을 위험 분자로 간주해 생체 인식과 안면인식 기술로 은밀히 검문한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알고리즘algorithm들이 우리의 신체와 공간과 사회를 칭칭 감고서 마치 생각하는 기계처럼 작동하고 있으니, 컴퓨터가 만들어낸 지능이 흡사 공기처럼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당연하게 취급된다.
이 의식조차 되지 않는 센서, 추적기, 카메라의 복잡한 연결망은 기계에 새로운 차원의 인지 능력을 부여하고, 자본은 이를 자유롭게 활용한다. 그리하여 개개인의 신체적 특성 같은 미시적 차원에서부터 기상 현상 같은 우주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생명과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가 나날이 교환의 대상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축적되는 데이터를 토대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계가 탄생한다. 자율주행차가 택시와 트럭 운전사를 대체하고, 알고리즘이 관리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AI가 의사보다 정확하게 환자의 암을 진단한다.
하지만 자동화가 만드는 낙원은 어디까지나 환상에 불과하다. 검색 엔진, 앱, 스마트 기기의 배후에는 항상 노동자가 존재한다. 그들은 글로벌 시스템의 변방으로 밀려나 단돈 몇 센트를 받고 데이터를 정리하거나 알고리즘을 감독하는 일 말고는 달리 살아갈 방편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폭력적인 콘텐츠를 자동으로 식별해서 삭제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포르노나 혐오발언을 선별하는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안면인식 카메라가 군중 속에서 특정인의 얼굴을 포착하고, 자율주행 트럭이 인간의 개입 없이 도로 위를 달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실상을 말하자면 기계학습이라는 이름의 마법은 데이터에 라벨을 지정하는 고된 노동의 산물일 뿐이다. 자동화를 신비화하고 숭배하는 문화가 실리콘밸리에 만연해 있지만 그 이면에는 혐오 발언을 가려내고 이미지를 주석화하고 알고리즘에게 고양이 식별하는 법을 가르치는 노동자의 노고가 숨어 있다.
이 책의 골자는 오늘날 디지털화된 삶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흔히 생각하듯이 알고리즘이 아니라 푼돈을 받고 육체를 갉아먹는 노동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건 한마디로 미세노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단돈 몇 센트로 사진 속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을 맡길 수 있는 거죠.” 세계 최초이자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미세노동microwork” 중개 사이트인 아마존 메커니컬터크Amazon Mechnical Turk가 공식적으로 문을 연 날 제프 베조스Jeff Bezos가 세상 사람들에게 고한 말이다.
메커니컬터크 같은 사이트에서는 인공지능을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미지 속의 사람에게 태그를 붙이는 일과 같은 단 몇 분, 몇 초 안에 끝나는 초단기 작업을 중개한다. 작업 시간이 아무리 길어봤자 한 시간이 채 안 된다. 이런 사이트를 이용하면 의뢰인은 하나의 하나의 대형 작업을 다수의 초소형 작업으로 나눌 수 있다. 메커니컬터크에서는 이 같은 초소형 작업을 “인간지능 작업human intelligence task, HIT”이라고 부른다. 의뢰인이 메커니컬터크에 HIT를 등록하면 수많은 노동자, 일명 “터커Turker”의 화면에 그 초단기 작업이 표시되고, 그러면 터커들은 그것을 한 건이라도 더 따내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이때 플랫폼이 취하는 수수료는 건당 20퍼센트다. 작업이 원격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메커니컬터크 노동자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각자의 아바타만 볼 뿐이다.
매커니컬터크는 자본에게는 각성제요, 노동자에게는 마취제와 같은 21세기형 노동의 효시다. 애픈Appen, 스케일Scale, 클릭워커Clickworker 등의 경쟁 업체들도 메커니컬터크의 모델을 모방해서 정제된 데이터와 저렴한 노동력을 배합한 아찔한 칵테일을 현대 자본의 총아인 페이스북과 구글을 포함한 기업계는 물론이고 학계에까지 제공하고 있다. 이 사이트들은 노동 차익거래labor arbitrage(타 지역에서 더 저렴한 노동력을 구하는 행위-옮긴이)의 중개자로서,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가 말한 ‘잉여 인간’, 곧 경제의 분류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찾아 거대 IT 기업들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한다. 이때 노동자들은 의뢰받은 작업을 수행하는 짧은 시간 동안만 고용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취업과 실업 상태를 오가면서 하루 동안 많으면 수십, 수백 개 회사를 위해 일하기도 한다.
이처럼 고용 상태의 변동성이 크지만 해당 사이트들은 이것을 유연성이라는 말로 미화하며 자신들이 새로운 노동계약의 수호자로서 사회의 진보를 위해 선의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새로운 노동 계약이란,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면 직업 안정성이나 든든한 임금보다 “독립성”을 더 중시하는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계약의 진짜 수혜자는 표준적인 고용에 따르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의뢰인들로, 주로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같은 IT 대기업이다.
미세노동 사이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순전히 이런 기업의 편의를 위해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프리랜서” “독립계약자independent contractor”(개인사업자 신분으로 계약을 맺고 용역을 제공하는 노동자로, 용역 수행에 필요한 비용을 본인이 부담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특수고용직과 유사하지만 원칙적으로 고용주의 감독을 받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옮긴이), 심지어는 황당하게도 “플레이어”(데이터 라벨링 플랫폼 플레이먼트Playment에서 노동자를 플레이어로 지칭한다-옮긴이)로 분류되어 법에 명시된 권리나 보호 장치는 물론이고 일말의 협상력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이처럼 플랫폼 자본이 일으키는 야만적 지각변동으로 인해 가뜩이나 살풍경한 전 세계의 노동환경이 초단기 임시직 노동으로 점철된 불모지로 전락하고 있다. 그런데 미세노동에 관한 여러 문헌을 읽고 나면 그런 데이터 노동이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 클라우드”“서비스형 인간”“적시 고용”(노동력이 요구되는 시점에만 일시적으로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옮긴이)을 당당히 운운하는 자들은 이제 우리가 뻔한 노동의 시대를 넘어 “기계와 인간의 혼합 노동”이 대세를 이루는 멋진 신세계로 과감히 도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제프 베조스가 말하는 “인공적 인공지능Artificial 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표현에는, 노동자가 첨단 기술을 이용해 알고리즘과 협업하는 것이 “신경제”의 폭발적 성장을 견인할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연유로 세계은행과 같은 기관에서는 범남반구Global South(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등 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저개발 국가를 통칭하는 말로, 반대되는 개념은 범북반구다-옮긴이)에서 비공식 노동(공식적인 고용 계약으로 보호되지 않는 노동-옮긴이), 가계 부채, 빈민가의 증가로 서서히 멸망하는 경제를 구원해줄 후보군의 긴 대열 끝에 미세노동을 합류시켰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미세노동이 범남반구의 재건자가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전 지구적 노동의 위기를 더욱 꼬아버리는 문제아라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미세노동이 탄생한 배경에는 성장 정체, 프롤레타리아화, 노동력에 대한 수요 감소라는 요인이 복합적으로 존재하며, 이것은 인도, 베네수엘라, 케냐 등지에서 비공식 노동이 팽창한 이유이기도 하다. 1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미세노동 사이트의 가입자가 늘어나는 것을 자본주의의 성공 신화라고 평가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오히려 공식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 날로 증가하는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비극이다. 그들은 주로 감옥, 난민촌, 빈민가에 거주하며 완전한 실직 혹은 불완전한 취업(자신의 시간이나 기량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는 취업-옮긴이)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로, “잉여 인간”의 슬픈 예시다.
그러고 보면 미세노동 사이트의 가입자가 폭증한 시기가 2008년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장기화된 경제적 부진과 겹치는 것이 단순히 우연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확한 통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근 추정치를 보면 전 세계적으로 미세노동 종사자가 약 2000만 명에 이르고, 그중 상당수는 범남반구,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인도반도에 분포해 있다. 여기에는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공식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꽤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고학력 불완전 취업자의 수는 범북반구에서도 증가 중이다. 한 설문조사에서 영국의 생산가능 인구 중 약 5퍼센트가 미세노동 사이트를 일주일에 1회 이상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주로 총 노동시간을 늘리고 정체된 임금을 보충하기 위한 부업의 차원에서 미세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자면 많은 사람이 미세노동을 본업으로 삼고 있다. 국제노동기구의 설문조사에서 36퍼센트의 노동자가 주 7일간 규칙적으로 미세노동을 수행한다고 응답했다.
각각의 미세노동 사이트에서 밝히는 수치를 종합해보면 실제 종사자의 수는 현재의 추정치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년 사이에 클릭워커는 가입자가 200만 명을 돌파했고, 그보다 작은 애픈 같은 사이트도 현재 가입자가 100만 명 이상이다. 만일 이 노동자들을 모두 종업원으로 분류한다면 이 사이트들은 몇 개국 정부와 월마트 정도를 제외하면 고용 규모로는 세계 최대 수준일 것이다. 중국의 크라우드 워크 플랫폼 주바지에Zhubajie의 경우에는 가입자가 자그마치 1200만 명 이상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세계 최대의 고용주라 할 만한다.
이처럼 초단기 데이터 노동에 생계를 의탁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상을 두고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1989년에 정치경제학자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on이 제시한 정책 권고안으로, 미국식 시장경제를 확산해 개발도상국의 경제위기를 해결하는 것을 골자로 하며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대명사가 됐다-옮긴이)의 찬동자들은 그런 노동자들이 바로 AI 시대의 수혜자라고 말한다. 이런 논리는 자동화로 인해 대량의 희생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꾸준히 지적하는 언론 보도에 반박하기 좋은 편리한 핑곗거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희생자와 수혜자를 가르는 경계선이 그리 선명하진 않다. 예컨대 챗봇의 위협을 받는 콜센터 노동자와 무인점포의 위협을 받는 계산대 직원은 21세기 자본의 폭풍우에 떠밀려 다니다가 결국 다른 방도가 없어 온라인 노동이 만들어낸 어두운 피난처에 정착할 공산이 크다.
미세노동을 옹호하는 이들은 아직도 일자리가 존재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시급 2달러에도 못 미치는 “터커”의 평균 임금을 고려하면 자동화로 인해 노동자가 소멸하진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생존이 벼랑 끝에 내몰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같은 세태는 이 책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주제와 맞닿아 있다. 잉여 인구가 2등 인간으로 취급되고 야만적인 국가 정책에 시달리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실리콘밸리 엘리트들이 벌이는 실험에서 인간 이하의 존재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메커니컬터크를 “인공적 인공지능”으로 소개하는 제프 베조스의 말은 따지고 보면 노동자를 인간이 아니라 연산 인프라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요청자와 작업자를 연결하는 수단을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라고 하는데, 여기서 작업자는 곧 컴퓨터를 뜻한다. 그런데 미세노동 사이트에서 요청자, 즉 의뢰인이 일을 맡기는 대상은 컴퓨터로 가장한 인간이다. 이렇게 기계가 드리우는 긴 그림자 속으로 노동자가 모습을 감춘 덕분에 미세노동의 요청자들, 특히 대형 플랫폼들은 그들의 마케팅 전략을 멀쩡히 유지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페이스북(메타Meta로 개명-옮긴이), 구글, 아마존 같은 대기업은 물론이고 거액의 투자금을 유치하고자 하는 수많은 스타트업도 자신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노동이라는 위험천만한 영역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 복잡한 알고리즘에 의해 운영된다고, 그래서 군더더기를 최대한 줄인 모델이라고 교묘한 말장난을 친다.
그들은 19세기에 카를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대전환이 이 시대에 비로소 완료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즉, 자본의 생산수단 중에서 노동이 차지하고 있던 중심부를 과학과 기술이 대신 차지할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많은 플랫폼 기업이 그 대전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폭스콘Foxconn이 운영하는 암울한 사탄의 공장(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산업혁명의 폐해를 상징하는 말로 썼으며, 여기서는 폭스콘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비유로 사용됐다-옮긴이)이나 “사람을 잡아먹는 산”이라 불리는 볼리비아의 세로리코Cero rico 주석 광산만 봐도 아직은 그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랫폼들은 노동을 외주화함으로써 노동자의 존재를 장부에서 지우고, 이용자와 투자자, 고객들에게 철저히 숨기면서 실제보다 더 복잡한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 척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데이터 노동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데이터가 플랫폼의 생명줄임에도 우리는 데이터가 생성되는 과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우리가 아이폰을 볼 때 그 하드웨어는 눈앞에 실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폰의 소프트웨어 속에 흐르는 데이터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래서 데이터 역시 생산의 대상이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데이터라는 비가시적이고 불가해한 성분이 하드웨어와 마찬가지로 인간 노동의 산물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의 손과 정신이 만들어낸 것을 영리한 기계의 작품으로 착각한다.
이런 몰이해는 무인 드론의 배후에 있는 데이터 라벨링 노동자의 존재나 콘텐츠 피드의 배후에 있는 검열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데이터를 숭배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은밀한 자동화 장소”(마르크스가 사용한 “은밀한 생산 장소”를 차용한 표현-옮긴이)가 은폐된다. 말했다시피 그 은밀한 장소란 번듯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기계 학습을 돕는 초단기 작업으로 연명하는 노동자 군단이며, 그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19세기 공장의 실태를 분석한 것처럼, 이 책은 자동화의 실상을 파헤치기 위해 21세기 들어 급속도로 지배력을 키운 경제 모델인 플랫폼 자본주의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그 골목을 주름잡는 아마존,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구글), 애플은 2019년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전 세계 1~5위의 기업을 나란히 차지했고, 중국 플랫폼인 알리바바, 징동, 바이두의 시가총액도 그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이들 기업이 급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가공할 만한 연산 능력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플랫폼들은 사용자에게 만남과 거래와 소비의 장으로 디지털 인프라를 제공하면서 우리의 온라인 활동, GPS 좌표, 우리가 SNS와 시리 앞에서 하는 말을 토대로 방대한 분량의 개인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리고 데이터의 축적량이 늘어날수록 인공지능에 투입할 수 있는 데이터도 늘어나기에 더 고차원적인 자동화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자동화의 “최종 단계”에 진입했다고 하더라도 그 단계가 완료되기까지는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머잖아 기적 같은 기술의 도약으로 실리콘밸리의 꿈이 실현되어 실리콘밸리의 구리 공급처인 콩고의 광산, 완제품 컴퓨터의 조립적인 포스콘 공장, 자율주행차의 학습적인 우버 택시가 모두 자동화되는 날이 온다고 해보자. 여기에 사용되는 기술은 대부분 데이터 처리(라벨링, 분류)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 데이터 처리 작업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알고리즘이 작동하려면 정제된 데이터가 필요하고,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동안에도 지속적인 감독과 개선 작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릴리 이라니Lilly Irani는 “인간 노동이 없이는 다른 형태의 제품이 등장하거나 새가 공장으로 날아드는 것 같은 세상의 변화에 맞춰 자동화 기술이 재설정되고 재조정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자본주의라는 실리콘밸리의 꿈은 문자 그대로 꿈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럼에도 마치 망령처럼 21세기를 붙들고 있다. 21세기는 금융 위기와 만성적 경기 침체 속에서 태어나 민주적 제도가 속속 붕괴하고 시시로 기후 재앙과 긴축재정에 시달리는 시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상상 속 유토피아와 이 현실 속 디스토피아가 서로 파트너가 되어 파국으로 향하는 기괴한 춤을 추고 있다.
챗봇이 성행하는 시대에도 캘리포니아에서는 해마다 대형 산불이 발생하고 있다. 컴퓨터가 체스로 인간을 이기는 시대에도 수많은 사람이 괴이한 인수공통감염병에 희생되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꿋꿋이 전진해야 할 인류는 오히려 역사의 주도권을 놓아버린 채, 번개가 그치지 않는 밤을 스마트 택시가 고요히 가르는 미래와 마주하고 있다(베네수엘라의 카타툼보강 유역에 연중 약 150일간 야간에 10시간 연속으로 번개가 치는 구간이 존재한다-옮긴이) 기상이변과 팬데믹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난민, 재소자, 경제적 유배자가 되어 경제의 본류에서 터전을 찾지 못하고 호구지책으로 자신을 소프트웨어 코드로,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존재로 실리콘밸리에 팔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잉여로 취급되는 사람들이 모두 순순히 투항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일사 항전을 불사하며 곳곳에서 전선을 형성 중이다. 어쩌면 이들의 싸움이 더 나은 세상을 여는 기폭제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미세노동자들만 놓고 보자면 아직 자본에 실질적 타격을 입힐 만큼 조직화되진 못했다. 하지만 이 플랫폼 노동자 군단이 다른 피박탈자 집단들과 연합하고 있다고 볼 만한 사건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런 변화에 대한 조심스러운 기대가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할 것이다.(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