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의 겨울밤은 이슥토록 오가는 정담으로 열기가 식을줄 모릅니다. 숙소 팬션의 카페는 심야주점으로 바뀌어 부킹과 추억만들기, 내일 산행을 위한 강사진의 대책 회의가 이어집니다. 출입문 창을 통해 어스름 새어나오는 카페의 불 빛에 한 발 물러서 있던 어둠은 한참을 지나서야 슬금슬금 제자리를 메웁니다. 빠르게 흘러버린 새벽, 뜨거운 북어국으로 허한 속을 달래고 하늘끝, 바람의 고향 선자령으로 향합니다. 의외로 잔잔한 날씨에 “오늘 바람도 없고 날 좋은데요” 누군가의 말에 비 예보 걱정을 잠시 잊었지만 희망사항에 불과했다는 걸 불과 몇시간 후에 절감하게 됩니다. 선자령의 출발지점에서 장비 착용, 매무새 가다듬고 나름 비장한 다짐도 되뇌어봅니다.
드디어 선자령의 칼바람을 맞으러 출발합니다. 경험많은 날자반이 앞장서고, 차례로 놀자반, 알자반, 그리고 산행약자를 위해 긴급 편성한 ‘천천히반’이 후미에서 뒤따릅니다. 선자령에서는 개별 나무의 겨울눈 관찰 공부보다 긴 호흡으로 트레킹을 하면서 기후와 지형 등 환경에 적응한 숲생태계를 이해하는데 더 무게를 둡니다. 공부와 관찰의 부담을 덜어내라는 강사님의 말에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물넘고, 다리건너 앞으로 앞으로.. 하지만 강사님들은 틈틈이 걸음을 멈쳐 세웁니다. 허연 살을 드러내고 등산로 옆에 버티고 서 있는 자작나무 앞에서 어제 본 거제수나무가 소환되고 오늘 만날 사스레나무가 나무껍질의 색이 동정 포인트라는 팁과 함께 소개됩니다.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낮익은 데크가 나타납니다. 데크 아래 경사면에 조릿대가 눈속에서 영토를 넓혀가고 있고 곳곳에 속새가 추위를 피하려는 듯 우부룩하게 모여 있습니다. 속이 뻥뚫린 속새 줄기로 피리를 불었다는 말에 몇몇이 줄기를 잘라 시도해보지만 “쉿~ 쉿~ ” 헛바람만 새어나옵니다. 눈속에 구불구불 엉켜 있는 덩굴나무를 만납니다. 관찰대상인 미역줄나무입니다. 짙은 갈색의 어린가지가 모가 지고 작은 돌기가 보입니다. 얼핏 미역줄기처럼 보이는 게 이름의 유래가 짐작됩니다. 머지 않은 곳에 작은 가지들이 눈속에서 삐죽삐죽 올라와 있습니다. 어제 봤던 황벽나무입니다. 개성 강한 겨울눈을 느긋하게 들여다보며 기억을 확인해둡니다. 대관령 목장 길에 다다르니 바람이 격하게 맞아줍니다. 산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바람이 장난아닙니다. 바람길따라 한쪽으로 뻗은 가지가 이 곳의 상황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산등성이 지나 숲으로 들어섭니다. 잣나무가 빼곡하게 늘어서서 인사를 해옵니다. 풍해조림지입니다. 지난 2007년 순간 최대풍속 20~23미터의 회오리 강풍으로 당시 풍해방지용으로 조림해놓았던 능선의 잣나무 3천여그루가 꺽이고 쓰러지는 피해를 당해 이후 밀식조림하여 조성된 숲입니다. 실패와 좌절을 딛고 마침내 방품림으로 자리매김에 성공한 이 숲에 「대관령 영웅의 숲」이라는 호칭이 주어졌습니다. 인증샷을 남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겹겹이 서서 온몸으로 바람을 막아준 잣나무 덕에 운치 있는 숲길을 편하게 지납니다.
중간 중간 팀마다 발길을 쉬었다 갑니다. 놀자반의 한 조가 바람소리 닮은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길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겨울숲의 소리에 귀기울입니다. 강사님은 큰 여울을 흐르는 물에서 뇌파와 같은 알파파가 흘러나오며, 알파파가 긴장을 풀어주고 편히 쉬는 상태를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머지 않은 곳에 제법 굵은 자작나무가 보이고 그 앞에도 몇몇이 둘러서 있습니다. 하얀색 자작나무 껍질의 비밀을 들려주고 있는 중입니다.
한걸음 앞서 출발했던 날자반은 바람에 꺽여 쓰러진 잣나무 앞에 모여 있습니다. 몇발자국 떨어진 곳에 잔가지들이 부러져 사방에 흩어져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기후와 나무, 숲의 생태에 대한 거시담론이 오갑니다. 물푸레나무 군락 근처 알자반의 주제는 나무들의 소통입니다. ‘나무들은 향기 즉 화학물질로 대화를 하고 뿌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린 나무 혹은 따로 떨어져 있는 나무와 자연적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나무는 생태가 다르다. 어린 나무는 일단 살아남고 커야 하기 때문에 생사를 건 경쟁이 우선인데 비해 성목군락은 서로양보, 협조하며 함께 사는 삶을 모색한다.’ 이곳에서도 고담준론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겨우살이 서식 구간을 지나 발목까지 쌓인 눈길에 삐끗 삐끗 미끄러지며 한발 한발 내딛어 드디어 선자령에 올라섭니다. 휘이익~ 바람이 이리 저리 몰려 다닙니다. 어허~ 예상은 했지만 바람 세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선자령 정상 아래 들판은 겨울등산객들로 울긋불긋 사람꽃이 피어 있습니다. 서둘러 바람피할 곳을 찾아보지만 마땅치 않습니다. 그나마 나은 곳을 골라 자리를 잡습니다. 준비해온 간식과 컵라면으로 점심식사를 전쟁같이 치러냅니다. 잠깐 사이 맑고 파랗던 하늘이 금방 잿빛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비예보의 확률이 높아지고 있음을 감지하고 하산을 서두릅니다. 즉석 협의를 통해 늘 오르던 정상길 대신 지름길을 선택합니다. 인증샷도 빨리 빨리, 호랑버들도 루페관찰은 생략하고 눈으로만 신속하게 훑어 봅니다.
선자령을 정상부근에 다다르자 칼바람이 몰아닥칩니다.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한 강풍입니다. 혼자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체 기념 사진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도 용감한 조는 그 어렵다는 공중부양 사진을 시도해봅니다. 소리도 안들리고 몸이 바람에 밀려 뛰어지지도 않습니다. 몇 번을 뛰어보지만 어째 엉성합니다. 찍힌 사진을 보니 보이진 않지만 바람을 찍은 것 같습니다. 제목은 ‘바람’이 더 어울릴 듯 합니다.
머물고 싶은데 바람이 등을 떠밀어 산에서 내려보냅니다. 손에 손잡고 깍지끼고 주춤 주춤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람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립니다. 잠시 눈감고 귀기울여 들어봅니다. ‘후~욱’ 머리 위로 큰 바람 덩어리가 빙빙 돌며 지나가면, 산아래에서 ‘호이~ 휘-익’ 하며 기마부대 달려오듯 긴 바람뭉치가 발목부터 허리를 휘감고 빠르게 스칩니다. 바로 이어서 ‘짜~락, 짜~락, 짜즈즈 ~ ’ 나무가지 사이를 헤치며 작은 눈알갱이가 얼굴을 후려칩니다. 따금하고 얼얼합니다. 이건 칼바람이라기 보다 모래바람, 돌바람입니다. 그런데 벌건 얼굴을 하며 내려오는 대부분 사람들의 표정에 희열의 표정이 보이는 건 착각일까요? “너무 너무 재밌어요” 칼바람 걱정에 참여를 망설였던 어떤 교육생이 “괜찮냐”는 물음에 짜릿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중턱으로 내려오면서 바람은 세력을 잃었지만 이제는 등산로를 꽉 메운 등산객들에게 치입니다. 앞사람을 따라 나란히 나란히 걷습니다. 몇 키로를 이어진 물푸레나무 군락 지를 지나 황벽나무 군락도 만납니다. 스치며 눈인사하고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시간 내 안전하산이 우선입니다. 얼마나 내려왔을까요? 등산객이 뜸한 곳에서 우리 식구들을 만납니다. 수피가 거칠거칠한 나무 앞에 모여 있습니다. 갈매나무입니다. 긴 가지끝이 가시로 변하고 짧은 가지가 발달하는 특징을 기억해둡니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고 안전한 도로에 다다릅니다. 차례로 내려오는 식구들과 원점으로 이동해 버스에 올라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뭔가 엄청난 일을 해낸 느낌입니다. 한참동안 바람 소리가 귓전을 맴돕니다. 휘이~~ 서—언 자~ 아 려~엉…
첫댓글
재미있는 단어들
천천히반도 잼났어요~~^^
보고 또 보고 싶은 멋진 후기로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
뭔가 엄청난 일을 해낸 느낌입니다.~
내 몸 하나 건사하느라 일단 섕각없이 걷기만 하느라 남은 기억이 별로 없었는데
후기를 읽으니
걷는동안 간간히 보았던. .
뒤통수 할퀴던 파도바람소리. . 가
다시
생각나네요~
감사합니다
못내 아쉬운 1인입니다~ㅎ
후기 덕분에 상황판단 끝.ㅎ
고맙습니다~^^
후기 생생하게 잘 보았습니다. 그날이 감동이 되살아납니다. 공중부양이 어설프지만 제2조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야~~ 공중부양 정말 아쉬운데요ㅎ 내년에는 꼭 해야겠어요!
선자령 칼바람보다 더 재밌는 후기 잘 읽었습니다^^
기억을 소환 해 주는 실감나는 글입니다.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보고 찍고 느끼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화를 쓰신 작가님께 감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