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모곡 사야도의 12연기 강론 / 강의 ; BBS불교방송 - 묘원 상좌 불교 한국 명상원 원장 |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범부는 알아차리지 못해서 과거에 머물러 후회를 하고 미래의 걱정으로 날을 지셉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대상을 알아차려서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압니다.
수행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직 현재에 머물기 때문에
후회가 지혜로, 걱정이 희망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 없이 살다가 죽는 것보다 보람된 일을 하고 죽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좋은지 알고 마는 것은 단지 생각에 그치는 것입니다.
알아서 실천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기보다 관용으로 받아들여야하며,
화를 내는 것보다 자애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지 않고 지혜를 가지고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만약 죽음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면,
현재에도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야하고, 미래에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른 삶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수행이란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길 외에 더 잘 사는 방법이 있는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없다면 수행을 계속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길은 선택이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난 유일한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또한 미래로부터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현재에 있는 대상을 알아차릴 때만이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을 사띠(sati)라고 말합니다.
알아차림을 크게 두 가지 뜻으로 나누어서 말하는데, 하나는 기억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알아차림, 주시, 의식, 한문으로는 념(念)이라고도 말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보다, 이해하다, 안다, 느낀다 하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어쨌거나 싸띠(sati)라고 하는 알아차림의 뜻은
첫째는 기억이고 둘째는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알아차림이 첫째 기억이라는 의미가 주는 뜻은 매우 심오합니다.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에 항상 알아차리는 것을 기억하라는 그런 뜻의 기억을 말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기억의 기본 바탕위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과거를 회상하는 기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과거의 기억을 전부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전하는 기억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의식상태에서
깨어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그런 기억을 말합니다.
이때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의 모든 조건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상태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억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기억은 알아차림을 지속시키는 연속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는 깨달음의 요소인 알아차림을 할 때
나에게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는
나에게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성취되면 그것을 올바로 알아차린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알아차림의 의미는 위빠사나 수행의 전 과정을 거쳐서 가장 강조되는 말이며,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말입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이란 말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에서 제일 처음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알아차림은 8정도에서 정념이라고 하는 바른 알아차림에도 적용됩니다.
8정도에서는 정견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 바른 알아차림입니다.
또한 알아차림은 수행자가 갖추어야할 다섯 가지 덕목을 말하는 오근에서도 나타납니다.
오력, 오근 이라고 말하는 것은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를 말할 때,
오근의 하나로 여기에도 알아차림이 포함됩니다.
여기서 알아차림은 알아차림과 집중과 노력의 균형을 이루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 다섯 가지의 요소 중에서
어느 것도 다 지나치면 문제가 있지만, 오직 알아차림 하나만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균형이 깨지면 수행을 하기가 어려운데, 이 알아차림 하나가 오근의 균형을 잡아줍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다익선이라고 말합니다.
자! 저희 쉐우민 사야도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알아차림을 하면 악업을 짓지 않게 되고, 알아차림이 없으면 악업을 짓게 되는데,
손가락을 한 번 튀기는 1찰나간에 커테떼떼인이 일어난다.
커테떼떼인은 천만 곱하기 10만인데,
한 찰나 간에 이렇게 많은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그래서 알아차림도 그렇게 많이 일어날 수가 있다.
만약 한 찰나 간에 내가 나쁜 생각을 한다면 커테떼떼인의 많은 악업을 짓게 된다.
만약 알아차림이 있어서 좋은 생각을 하게 되면 그만큼 많은 선업을 짓게 된다.
그러니 한 순간이라도 알아차림을 놓쳐서는 되겠는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교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위빠사나 수행자라고 한다면 아마 알아차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불교를 한마디로 요약할 때 자비라고 말했다면
그 수행자는 사마타 선정수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는 알아차림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수행자가 아닌 다른 경우에도 다르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수행자에게 있어서 알아차림이란 이토록 절대 절명의 것입니다.
이것은 저희 스승들이나 경전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내용들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행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경전이 바로 ‘사띠빠타나 수타’입니다.
그 뜻은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경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가장 중요히 여기시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수행 중에 스승이 말하는 모든 면담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거의 알아차림이란 한 마디로 귀결됩니다.
어떤 질문을 해도 어떤 인터뷰를 해도 스승들은 알아차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항상 같은 말인데도 알아차리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와 듣지 않았을 때가 또 다릅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라서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알아차리는 새로운 습관을 길들여야합니다.
우리는 많은 세월 동안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감각적 욕망과 게으름, 혼침,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무지와 갈애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무지와 갈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알아차리는 그 순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새로운 습관을 우리는 길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수행에서는 오직 집중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오직 알아차림을 통해서 모든 대상을 맞이합니다.
알아차림은 오온 중에서 마음의 작용인 행온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것 자체가 선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계율을 지키는 것이며,
고요한 마음의 집중에 이르게 하고, 그래서 지혜가 나도록합니다.
알아차리는 동안에는 탐진치라는 번뇌가 붙지 않게 때문에
그 순간에 온전하게 계율을 지키는 셈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수행자들은 특별히 계율을 지키려는 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알아차림을 통해서 바른 견해를 갖고, 독선에 빠지지 않고,
모든 위험과 사고를 예방합니다.
이것은 알아차림이 갖는 특성의 하나로,
계율의 측면과 사고의 측면에서 모든 위험을 막아서 보호해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육문의 문지기가 되어 도적을 막아줍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도둑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합니다.
알아차림은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무엇이나 받아들입니다.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에서는 못 받아들일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에는 사물의 성품을 꿰뚫어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에는 다툼과 불목이 없습니다.
알아차림에서는 탐진치가 없으며, 알아차릴 때만이 관용 자애 지혜가 생깁니다.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이 있는데,
아는 마음은 선업이고 알아차림이며,
모르는 마음은 악업이고 알아차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아는 마음은 알아차리는 마음이라서 깨어서 알지만,
모르는 마음은 무지의 마음이므로 혼돈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대상을 이성적으로 투명하게 보게 하며
객관적으로 알게 해서 항상 모든 것에 대해서 공평무사합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에 머물게 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현재에 머무는 것은 행복의 제일 조건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번뇌가 없고 행복이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비현실적인 꿈으로부터 언제나 현실로 돌아오게 하여
항상 건강하고 밝고 온전한 정신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갈 때 땅이 닿는 점은 언제나 하나이듯이
알아차려야할 대상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현재만큼 가장 실질적이고 진실한 대상은 없습니다.
인생이나 세월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현재는 과거에 의해서 생긴 결과이며, 현재는 미래를 만드는 원인입니다.
이것이 모두 알아차림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수행은 원대한 목표가 있으되 바라는 것이 없어야하는데,
실제 수행에서 목표가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이상은 있으되 바라는 것이 없어야합니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바라는 것이 없어야합니다.
그냥 바보처럼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서 알아차릴 뿐이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병이 났을 때도 병을 나으려고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병을 나으려고 알아차릴 것이 아니라,
병이 났을 때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그냥 알아차려야합니다.
물론 병이 나면 병원에 가야합니다.
알아차림은 몸의 병을 나으려는 이런 물질적 현상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병을 통해서 몸과 마음의 실체를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도 알아차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댓글 初期佛敎 - 12緣起와 위빠싸나 25. 알아차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