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1 주일설교
체험보다 말씀에 근거하여 믿으라
마태복음 12:15~21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확실하다는 뜻이지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 체험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성경적으로, 신앙적으로도 맞는 부분도 있고 맞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부분에서 맞고 또 어떤 부분에서 맞지 않을까요?
성경에서 직접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후 친구 나다나엘을 만나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했습니다. 나다나엘은 그게 누구냐고 물었고 빌립은 나사렛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합리적인 질문을 했는데, 나사렛에서 어떻게 메시아가 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는 매우 합리적인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구약)에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며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고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면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헤롯이 율법 학자들을 불러 메시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학자들은 즉시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가 5:2에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메시아는 베들레헴 사람이어야 하는데 나사렛 사람 예수가 메시아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쉽게도 빌립은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빌립이 한 말이 “와서 보라”였습니다. 헬라어로 Ἔρχου καὶ ἴδε, 영어로 Come and See입니다.
하지만 ‘와서 보라’라는 말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빌립이 “와서 보라”라고 한 이유는 자기는 나다나엘의 학구적인 질문을 충족시킬 준비가 안 되어있으니 예수님께 와서 궁금한 것을 직접 질문하라는 뜻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떤 분이 예수님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할 때 목사님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라고 안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에 체험은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직접 체험하는 것은 신자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면 계속해서 기도할 의지를 강하게 됩니다. 또 십일조를 잘해서 하나님이 내 삶은 책임지는 것을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말라기 3장에서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는 것을 경험하라고 하셨습니다. “경험해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더라.” “순종해보니 목사님의 말씀이 맞더라.” 이런 체험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혹은, 부정적인 면에서도 체험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인본주의적 방법으로 인생에 성공해보려고 하던 사람이 하나님이 자기 앞길을 막는 것을 체험하면 다시는 잔꾀를 부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생활은 체험만능주의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단회적인 사건이므로 사람마다 체험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의 모든 면을 다 체험하겠다고 덤비면 자칫 신비주의나 체험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지 보는 것에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신 것처럼 꼭 본인이 체험하지 않았어도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에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개인의 체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마태복음에서도 체험에 매달리지 말고 말씀에 근거해서 믿으라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이 회당에서 나오시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병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 이것에 대해 소문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만일 내가 기도해서 감기라도 낫게 했다면 여러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런 소문을 내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다음 중 어느 쪽일까요?
1) 그런 일이 처음도 아닌데 뭘 자꾸 소문내겠니?
2) 나는 수줍음이 많은데 유명해지는 것이 부담스럽구나.
3) 자꾸 사람들이 찾아오면 내가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4) 이것이 알려지면 바리새인들이 싫어하고 내가 위험해져.
5) 이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다. Yes, 이것이 정답입니다.
17절에 그 이유가 나오는데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메시아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마태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임을 증명했습니다. 너희의 체험보다 성경이 말하는 메시아가 맞으면 예수님을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내 병은 안 고쳐주시는지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21절 끝의 “이루려 하심이라”가 17절 끝에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18~21절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했는데 이사야 42장에서 이사야는 메시아에 관해 뭐라고 예언했을까요?
이사야가 말하는 여호와의 종(메시아)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원인: 메시아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며 하나님이 영을 부어준 사람이다. 2) 메시아는 미슈파트(מִשׁפָּט, 정의, 공의, 심판)을 베푸는 분이다. 3) 메시아는 격노하여 시끄럽게 떠들지 않는 분이다. 4) 메시아는 가망없어 보이는 사람도 버리지 않는 분이다. 5) 메시아는 미슈파트(심판, 정의)를 세우기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이다. 6) 결과: 이방인들이 그의 이름을 소망한다.
이 말씀에서 보는 메시아의 모습은 첫째로 성령이 충만한 분이십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하기에 원수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와 여러분이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님을 닮기를 축원합니다.
최근에 제가 조금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습니다. 제가 맡은 직책이 여러 가지인데 그중에 한 가지 직책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약간 당황하면서도 하나님이 나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맡기려고 이 직책을 내려놓게 하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람들이 일 처리를 무례하게 하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그냥 직책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될 텐데 직책을 빼앗아가는 행동에 속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밤에 청계산에서 기도하면서 내가 처음에 가진 생각이 하나님의 마음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더 큰 일을 맡기려고 지금 직책을 내려놓게 하시는데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내려놓게 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 귀한 길로 인도하실 때 사람들도 여러분에게 꽃가마를 태울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요셉이 애굽으로 갈 때 처음에는 노예로 팔려갔고 다음에는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요셉이 총리가 되는 치트키였습니다. 만일 요셉이 과거 시험을 봤더라면 총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될 텐데 팔려가면 어떻고 옥살이를 하면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성령이 충만하여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메시아의 두 번째 모습은 정의와 공의를 베푸는 분이며 공의를 세우기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가 공의를 베푸는 것은 또한 세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정의, 공의, 심판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가 바로 미슈파트(מִשׁפָּט)입니다. 미슈파트를 베푸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할 길을 가지 않고 옳은 길을 갑니다.
제가 요즘 조영길 변호사가 성경권위수호협회(모든성경의신적권위수호운동협회) 만드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수협에 발기인으로 혹은 주제발표자로 요청받은 목사나 교수 중에 즉시 응답하지 않고 망설이는 분도 있고, 처음에 동의했다가 중간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분을 볼 때 저는 생각나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78:9, 『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싸우지 않는다면 유명한 목사이면 무엇하며 신학대학교 교수이면 무엇합니까?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비평신학을 가르치며 성경의 신적 권위를 공격하는데 이것을 막아내는 전투에서 물러가려면 활은 왜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손에 활을 주셨을 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성혁명 세력이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를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는데 이 일에 무관심한 목사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울처럼 물리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다윗에게 그 자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슬프게도 대법원 재판 하나를 졌습니다. 남성동성애자 커플이 부부도 아니면서 직장건보료 피부양자 자격을 요청했는데 이것을 인정해주면 동성혼 합법화로 나가는 디딤돌이 될 것을 우려해서 우리는 매일 기도했고 매주 대법원 앞에 나가서 기자회견을 하고 성명서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대법관들이 결국 동성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성명서에 있습니다.
하지만 재판 하나가 졌다고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싸울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너무 힘들어 지쳐 있을 때 그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가 상복을 입고 나왔다고 합니다. 누가 죽었느냐고 묻자 “하나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이렇게 지쳐서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루터가 용기를 내었고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지었습니다. 이 찬송은 1절만 부르면 안 되고 2~3절까지 불러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메시아가 미슈파트를 추구하는 모습에 하나님 모르는 이방인들도 예수 이름을 바라고 믿고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기적으로 질병을 고쳐주셨는데 그것을 소문내지 말라고 하신 목적이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마태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42장이 말한 메시아의 모습은 성령이 충만하고 미슈파트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제 성도는 자기의 개인 경험이나 영적인 신비한 체험, 자기가 이룬 것이나 소유한 것에 연연하며 거기에 믿음의 근거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전능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비해 사람의 경험, 신비 체험, 소유나 능력, 주변 사람의 인간관계는 얼마나 알량합니까? 내가 신비한 것을 경험했으니 하나님은 분명히 계신다, 내가 병이 나았으니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내가 성공했으니 하나님은 선한 분이다... 이런 것은 좋은 말인 것 같지만 무한하신 하나님을 내 체험에 가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개인의 알량한 체험과 경험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를 두시고 굳건하게 서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생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은 자신의 경험, 체험, 소유와 능력에 믿음을 걸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