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깨어있는 지혜 얻는 명상
3년간 죽음명상 꾸준히 정진해
수다원과 체득한 직조공 딸처럼
태어난 자, 반드시 죽음 깨닫고
죽음 숙고해 목숨 집착 말아야
진시황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장수와 영생을 원했다. 아마 현생만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100세에서 120세까지 장수하는 것이 정말로 행복일까? 우 조티카 사야도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게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또 어떤 연예인은 “나는 언제 죽어도 호상이야”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의 사고방식이 유연하고 당당하고 멋지다. ‘언제 죽어도 호상’이라며 죽음을 수용하는 마음이 있으면, 죽음에 대한 미세한 두려움과 불안이 단번에 정리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난번에는 ‘청정도론’에서 설명하는 죽음명상 방법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죽음명상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붓다와 한 소녀간에 나눈 대화인데, 너무나 지혜롭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열여덟 번째 안거가 끝난 후 붓다는 제따와나정사에 계셨다. 그로부터 3년 전 붓다는 알라위 지방에서 죽음명상을 가르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문을 들은 것으로 끝났지만, 한 직조공의 딸은 3년간 꾸준하게 죽음명상을 닦았다. 그런데 드디어 수행의 결실인 법을 얻을 때가 되었음을 붓다는 알았다. 그래서 수많은 비구대중과 함께 알라위를 다시 방문했다. 알라위 사람들은 붓다와 승가를 환영하며 점심공양을 올리고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 있었다. 그런데 붓다는 법문을 하지 않고 계속 침묵하고 계셨다. 왜냐하면 오늘의 주인공인 직조공 딸이 그 자리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직조공의 딸도 붓다께 빨리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심부름을 먼저 하고 가려고 했다. 여러 개의 실을 다 감은 후 아버지 공장으로 가는 길에 소녀는 멀리서 붓다를 쳐다보게 되었다. 그때 붓다께서도 소녀를 바라보셨다.
“어디서 왔느냐.”
“모릅니다. 부처님.”
“어디로 가느냐.”
“모릅니다 부처님”
“모르느냐.” “압니다. 부처님.”
“아느냐.” “모릅니다. 부처님.”
말라위 사람들은 직조공 딸이 매우 맹랑하고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웅성거리며 떠들썩하자 붓다는 다시 소녀에게 질문을 했다.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너는 왜 모른다고 했느냐?” 소녀는 대답했다. “일체지를 갖추신 부처님께서는 제가 집에서 왔다는 사실은 이미 아신다고 생각했고, 전생에 어떤 생에서 이생으로 태어났는지 그걸 아느냐고 묻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생에 어디에서 어떤 존재로 있다가 이생에 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릅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붓다는 다시 질문했다.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을 때는 왜 모른다고 대답했느냐?” “부처님께서 ‘죽고 나서 어디에 태어나는지 아느냐?’라고 묻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모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붓다는 다시 또 질문했다. “그러면 내가 ‘모르느냐?’라고 물었을 때 왜 ‘안다’고 대답했느냐?” “제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압니다. 그래서 ‘압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붓다는 또다시 질문했다. “내가 아느냐고 물었을 때 왜 모른다고 대답했는가?” “제가 죽는다는 사실은 알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모르기 때문에 ‘모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직조공 딸의 대답에 “선재, 선재, 선재라”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시자, 소녀는 성자의 첫 번째 단계인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한다.
그렇다. 태어난 자는 모두 죽는다. 다만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지 어디에 태어날지는 모를 뿐이다. 때문에 죽음 혹은 죽음명상과 친숙해질 필요가 있다. 목숨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으면서 현재 이 순간의 삶에 온전하게 깨어있을 수 있는 살아있는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일중 스님 동국대 강사
첫댓글 初期佛敎瞑想 - 28. 죽음瞑想(死念) ③ 온전히 깨어있는 智慧 얻는 瞑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