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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무엇으로 얻는가? / 신 30:9-14, 눅 10:25-37
오늘 읽은 눅 본문은 누구나 잘 아는 비유의 말씀이다. 아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서 이 이야기의 가르침보다 인류 역사에, 그리고 교회사에 위대한 영향을 남긴 교훈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 말씀에 충격을 받고 전세계의 수많은 병원 사역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자선사업 기관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말씀 앞에서 도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봉사와 선교와 헌신으로 그들의 인생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교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 비유가 오늘날 우리의 삶에 아무러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우리가 이 비유의 교훈을 알지 못하는 것이 비극은 아니다. 문제는 이 비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비유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의 삶에 새로운 각성을 위해서 이 비유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수께서 이 유명한 비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시작한 배경은 이렇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질문은 귀한 것이다. 질문이 없이는 해답을 알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던지는 질문 가운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질문도 있다. 그것은 질문을 위한 질문일 경우에 그렇다. 이런 질문에는 순수하지 못한 다른 의도나 동기가 숨어있는 경우가 있다. 오늘 본문의 질문도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이란 무엇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질문을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 이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배경과 마음의 밑바탕을 우리는 좀더 깊숙이 꿰뚫어 보아야 한다. 28-29절상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 말씀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 사람은 자기 의에 상당히 도취되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좋은 일도 하고, 이런 선한 일도 하고, 나의 행함은 하나님 나라에 가기에 합당한 것이라는 생각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깨우쳐 주시려고 하신 말씀을 주목해 보기 바란다. 25하-29절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자기를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논동자를 피하면서 그는 추상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기는 쏙 빠져나가려고 한다. 인간은 그가 난처한 궁지에 빠지면 논쟁을 시작한다. 이는 자기를 숨기기 위한 변장일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된 의도에서 하는 질문일지라도 그런 질문을 통해서 그 사람의 문제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중요한 말씀을 시작한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그래서 이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사람은 자기의 의, 자신을 옳게 보이려는 생각으로 도취된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죄인인지를 정직하게 발견하고 성찰하는 노력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에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동기가 어디에 있나?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시도하는 이 사람, 옳지 못하면서 자신을 옳다고 착각하는 이 사람, 자기는 언제나 옳은 일을 하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를 마땅히 인정하셔야 하며,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없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이 사람, 이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비유가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죄인된 모습을 발견해야 환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의 일차적인 목적이다. 여기에 우리가 잘 아는 여리고 길의 희생자가 있다. 여리고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나 쓰러져 거의 죽게 된 불쌍한 희생자의 모습이 이제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이 사람의 곁을 세 유형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우리는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 곁을 지나가는 무리 속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첫째는 바로 이 사람을 이렇게 여리고 길에 쓰러뜨려 놓았던 강도들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차라리 사회에서 없어져야 했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다. 그들은 그의 곁을 그대로 무심코 지나간다. 우리는 이들을 있으나마나한 사람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강도 만난 이 사람에게 꼭 있어야만 했던 사람이 그 곁을 지나가고 있다. 그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다.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을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이들은 왜 여리고 길에서 사람을 때려 눕히는 강도짓을 했는가?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한다면, 무엇보다 이 강도들은 인간을 목적으로 다루는 안목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의 도구나 수단에 불과했다. 그들은 사람을 섬겨야 할 대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용하도록 물질을 주셨다. 그러고 사랑하도록 사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대신 물질을 사랑하기 위해서 사람을 이용하기 시작할 때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깨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비유 앞에서 놀라야 할 일이 있다. 이 강도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놀라야 한다. 만일 우리가 내 인생의 길에서 지나치는 어떤 사람을, 그를 섬겨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어떤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기 시작할 때 바로 내가 그 강도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놀라야만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사람은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성서가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선한 목적은 반드시 선한 수단을 동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올바른 목적과 올바른 동기를 가진 것도 그것이 잘못된 수단을 통해서 진행될 때 그 목적은 합리화 될 수가 없다. 공동묘지의 무덤 중에 이유없는 무덤이 없듯이 강도들도 자기들이 강도짓을 해야먄 했던 어쩔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와 변명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올바른 동기뿐 아니라 올바른 수단이 결핍되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그의 선한 목적과 궁극적인 동기조차도 의심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여리고 길이 비극이다. 만일 이 강도에게 그 앞을 지나가던 나그네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었던 안목이 있었더라면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는 안목을 가진 자였더라면, 그가 과연 칼을 들 수가 있었겠나? 만일 우리가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졌다해도 그 목적을 위해서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강도가 걸은 그 길을 자신이 똑같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라. 이 강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가장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다시 율법사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막힘없이 대답할 수가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나?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배 정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드리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영광과 존귀와 찬양과 그리고 모든 것을 받기에 합당한 분임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 앞에 엎드려 그분을 경배한다. 경배한다는 것은 드리는 것이다. 내 마음을, 내 애정을, 내 생각을, 나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
예배 정신이 잘못 변질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리려는 것보다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더 많은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두 개의 별개의 사건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형제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는 네 형제를 사랑하라. 네 아내를 사랑하라. 네 남편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변질될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이웃을 섬기기보다, 이웃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생각하기 보다 저 사람에게서 무엇을 어떻게 뻬앗아 올 수 있을까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리고 길에서 강도의 모습으로 변신하기 시작한다. 내 인생관이 잘못될 때, 성서에 대한 적용이 잘못될 때, 내 삶에 대한 분명하고 바른 적용이 없을 때에 우리도 이 강도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사처럼 나는 올바른 사람이라고 외쳐도 내 심장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도 강도일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야 한다. 이것이 성서의 신랄한 도전이다.
여기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제사장이고 레위인들이다. 성서는 이들이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그대로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씀한다. 이들은 사회의 지도자들이다. 종교적인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여리고 길에 이런 강도가 출몰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에 앞장섰어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아니면 최소한 희생자가 발견되었을 때 그를 돕는 일에 앞장섰어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피하여 지나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도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 ‘저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바쁜 길을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오늘 우리들도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내가 해야 할 의무에서 빠지려고 할 때가 있다. 이것이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의 문제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오해되고 있는 신앙생활의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예배이다. 예배의 목적이 무엇인가? 한번 물어보자. 여러분은 지금 왜 예배를 드리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예배를 드렸다, 1년 52주 동안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주일예배 시간에 꼭 출석했다는 말들을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주일성수를 강조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예배에 빠지지않고 참여했다는 그 사실만으로 자랑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의 목적이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나는 듣는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내 삶에 대한 변화를 하나님 앞에서 강요당하게 될 것이다. 예배는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가 예배를 얼마나 잘 드렸는가 하는 사실은 예배를 드리고 교회 문을 나선 후의 우리의 삶의 변화에 따라 판정되는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만나는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말하고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이 진리를 내 삶을 통해서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얼마나 예배를 잘 드렸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예배를 드린다는 그 사실만으로 변화를 요구받게 된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달라져야 한다.
예배를 왜 드리는가? 왜 기도하는가? 왜 성서를 읽고 공부하나? 여러분이 예배시간을 참석한 것 그것 외에는 아무런 다른 의미가 없는 예배라면 그 예배는 단순한 종교적인 감상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모든 인간관계에서 우리의 삶은 변해야 된다. 우리가 해야할 가장 긴급한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긴급한 일이 반드시 중요한 일은 아니다. 내가 그것을 빨리 해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으 아니다. 불행한 사실은 우리의 삶이 의미없이 바쁘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쁘기는 한데 그 바쁜 것이 하나도 생산성이 없고 의미가 없다. 그저 바쁘기만 하다. 우리의 인생의 우선순위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정해져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중요한 것이 먼저 와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말하겠나? 이러한 가치관에 따라 내 인생의 길을 재조정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말씀에 의한 삶의 변화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제사드리는 것 때문에 그냥 지나쳤나? 사실은 귀찮아서 그랬지 않았을까?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간섭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그래서 옛날에 사람들이 싸우면 옆에서 말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냥 지나쳐 간다. 요즘엔 이런 일도 있다고 하다.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 난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냔 지나치기가 무엇해서 도와주었단다. 그러데 교통사고 낸 사람이 증인이 없으니까 경찰이 조사할 때 도와준 사람을 향해 당신 때문에 사고났다고 하며 바가지를 씌운단다. 그러면 꼼짝없이 당하는 수가 있다고 한다. 사실 제사장과 레위인이야말로 여리고 길에 쓰어진 사람에게 가장 가까웠어야 할 이웃이다. 그러나 잘못된 의식 때문에 그들은 가장 먼 이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이웃이 누구이지 알고 그 사람에게로 관심을 쏟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그는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 아니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꼭 있어야 할 사람이다. 없어서는 절대 안 될 사람이다. 이 사람이 지금 지나가고 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그 당시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왜 그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 사람은 가장 경멸을 받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상대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축복이나 은총이 전혀 임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사마리아 사람, 사실 이 사람에게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당시의 통속적인 사회관념을 깨뜨리신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적인 선언이다. 사실 길에 쓰러진 희생자를 도와야 할 사람은 제사장이고 레위인이지 사마리아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왜 이 이야기를 하시나? 하나님은 우리의 신분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내가 목사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지 않는다. 내가 장로이고, 내가 권사이고, 내가 집사이고, 내가 교회를 20년간 출석했고, 모태 때부터 믿어왔다는, 과거의 이런 화려한 경력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높이 평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명함이나 지위나 경력에 관심이 없으시다. 그분은 현재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동기로 일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계신다.
다시 이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자. 성서는 말한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이 불쌍한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그에게 있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에게는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가슴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그는 행동할 수 있는 발이 있었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그는 섬길 수 있는 손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려는 결의가 있었다. 그는 자기 짐승을 사용했고, 주막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두 데나리온을 지불했다. 사랑은 값비싼 것이다. 돈이 들지 않고 사랑할 수가 없다. 시간이 들지 않고는 사랑할 수가 없다. 우리가 내 근처에 있는 구체적인 한 이웃과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돈도 써야 하고, 자기희생을 하여야 하고,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희생이 아까워서 사랑을 거절한다. 이것이 여리고 길의 비극이며 우리의 비극이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언제 남에게 관심을 가지며, 또 성서 그대로 살 수가 있나? 성서는 내 삶을 등한히 하고 외면하면서 이웃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라고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가정에 대한 우리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잘 아신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그러나 성서의 선언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성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갈 6:10상) 주님께서 우리에게 도전하신다. 두꺼운 이기심의 껍질을 깨뜨릴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내 이익, 내 가정, 내 손에 들어온 물질, 내 삶의 영역, 이 껍질을 깨고 이제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이웃을 향해 뛰쳐나갈 수 있겠나? 내 이웃의 상한 발을 씻길 수 있는 물수건을 준비하고 있나? 공간적으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이웃은 아니다. 현대인이 고독은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있는 비극이고, 교회 속에서도 있는 비극이다. 내 곁에 살기 때문에 이웃이 아니다. 한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이웃이 아니다. 내 상처와 눈물과 외로움과 아픔을 어루만지며 싸매줄 수 있는 사람이 이웃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이웃이 되어보려고 한 적이 있나?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얼굴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찾아오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눈물과 고통과 외로움과 모든 질병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셨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압도해 오고 있다면 내가 이 사랑에 취하여 연약하지만, 내 물질이 아까운 것을 알지만, 자신을 찢어내는 노력을 통해서 이웃의 형제자매를 붙들고 눈물과 외로움과 상처와 신음소리를 듣고 그를 끌어안고 내 삶의 주막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나? 몇 년전 미국 LA의 어느 교회 대학부 학생 한 명이 자살한 일이 있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교회에 나가도 아무도 나를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다’라는 글이 씌여 있었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때문에 자살한 것이다.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이 되어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 방법이다. 이웃을 사랑함으로 영생을 얻는 갈보리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