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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호소 / 욥 38:1-11, 막 4:35-41
절망(낙심)이란 말은 호감을 주는 말이 아니다. 절망은 희망이 끊어지고 소망이 없어진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인간의 현실생활 중 가장 큰 불행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절망은 불행과 직통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애써서 절망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려 하고, 우리에게 절망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도전하게 되고, 우리에게 절망을 주는 환경과 사정(형편)과 더불어 싸우게 된다. 절망에 대하여 몇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해 보자. 1) 누가 절망 속에 있느냐 라는 질문에 대하여 모든 사람은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는 절망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2) 어떤 것이 절망이냐 라는 질문을 한다면, 사람마다 절망에 대한 설명을 한다. 제각기 자기가 절망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절망에 대한 설명을 자신있게 말한다. 3) 사람이 왜 절망하게 되느냐 하고 물어보면, 누구나 그 절망의 이유를 자신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자신에게서 온 절망, 운명, 또는 신에게서 온 절망 등을 어렴풋이 분류해 보기는 하지만, 어디서 왜 절망이 인간에게 왔는지를 분명히 설명하지 못한다. 4) 마지막 질문으로, 사람은 자기의 절망을 어떻게 해결할 수있느냐 라고 물어보면 역시 자신있는 답을 하는 사람은 없다. 누가 어떻게 자기의 절망을 없애 줄 것인지 알지 못하여 사람들은 안타까워 하고 불안해 한다.
절망의 철학지인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절망을 병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우리 육체의 병과 같이 고칠 수 있는 것도 있고, 고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 있다고 했다. 우리의 문제는 절망 그것이 아니라, 없앨 수 있는 절망을 가졌느냐, 그렇지 않으면 고칠 수 없는 병처럼 죽음으로 이끌고 나가는 절망을 가졌느냐 함이 문제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절망이란 병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논하는 가운데서 인간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절망이란 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가 주는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기독교에서는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힘, 또는 지혜를 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절망이 인간 자신 속에 있는 악의 경향성과 유약성을 모르는 죄라고 해도, 기독교는 그 죄의 문제 곧 인간 자신의 절망성을 해결시켜 줄 수 있다고 하며, 또한 인간 자신의 육체 문제나 가정 또는 사회, 나아가서는 이 현실 세계에서 오는 절망이라도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그 절망을 이겨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가 과연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어떤 힘과 지헤를 줄 수 있을까?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본문에 다라 생각하고자 한다. 막 4:38절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말씀은 여러분들이 아는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를 지나갈 때에 큰 광풍을 만나 물결이 배에 부딪혀 파선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이 자기들의 생명의 마지막 순간, 그 마지막 애원과 호소로써 예수님에게 부르짖은 것이다. 제자들의 판단으로는 이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사경에 임박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말로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말했다. 배를 타고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여기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는 이 고백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경험이 없는 분들은 소설 등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겠다. 일본 기독교 소설가인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을 읽어보면 마지막 부분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는 장면이 있다. 이 풍랑은 1954년 9월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명히 자기들의 죽음을 바라보고, 다시 더 생명을 연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 절망상태에서 하나님께 호소했다. 이러한 호소는 일생동안에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일생에 한번이나 두번 할 수 있는 호소이다. 그러나 그 한번 하는 호소는 언제나 생명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위험한 절망적인 순간이다.
교회의 설교는 결코 어느 한두 사람의 경험을 자랑하거나그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형식이어서는 안된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절망의 경험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각자가 해 보아야겠다. 우리가 비록 폭풍 속에서 위험한 항해는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절망의 경험을 가지고 거기에서 호소하고 있는 일이 없느냐 하는 반성이다. 기독교는 낙관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비관이나 절망 같은 것은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 기독교는 어떤 일에도 절망이나 비관하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다. 비관하거나 절망할 때 우리는 믿음이 없거나 약한 증거라고 스스로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여러 가지로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서로 사정과 경우가 다르다고 해도 자신의 생명이나 생활이 이제는 마지막이로구나 하게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한 제자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절망에서 한 호소는 몇가지 뜻이 있다. 재자들이 예수님께 그 호소를 한 심리와 그 정신을 분석해 보면, 절망을 넘어서는 몇가지 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1. 이 호소는 인간 자신의 무능을 고백한 것이다.
만일 제자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그 강풍에 밀리고 있는 배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면 이 호소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위기를 극복하고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기술과 능력과 지혜는 제자들에게 없었다. 자기라는 인간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 그 마음이 이 절망의 호소이다. 아직 인간 자신에 의하여 어떤 길이 발견되고 인간 스스로가 누구의 도움없이 자기 갈 길을 계속하거나 개척할 수 있으면, 그는 아직도 절망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인간에게는 두가지 면에서 절망을 가장할 수 있다. 절망 아닌 것을 절망인양 호소하는 경우가 둘이다. 하나는 아직도 자기에게 남아있는 힘으로도 그의 체력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의 지혜나 지식의 힘으로 자기 길을 계속할 수도 있고, 또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과 자기를 아끼는 이기심과 평안한 것을 즐기는 안일에 대한 생각 때문에 절망 아닌 것을 절망인양 호소한다. 또 하나는 자기의 힘으로 무엇을 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힘으로 자기 욕구를 채우려는 사람이 종종 자기의 상태를 절망적이라고 호소한다. 절망을 호소함으로 다른 사람의 원조를 무상으로 받아보자는 의타심 또는 의존심이다. 그러나 자기의 여력을 두고도 태만과 안일 때문에 절망을 호소하는 것이나, 남을 의지하는 마음 때문에 가지는 절망의 호소는 참된 의미에서 절망의 호소가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광풍을 만나 부르짖은 그 절망의 호소는 그러한 위장된 호소는 아니었다.
우리가 절망을 호소할 때는 내게 있는 모든 힘은 다 무용지물이 된 때이다. 인간은 스스로 만능이라고 교만을 떨지만, 때로는 그 자랑하는 인간이 다음 날에는 그 목숨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을 본다. 눅 12장에 나오는 부자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는 자기의 부를 자랑하여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진지하게 질문한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여기 가르치는 교훈은 인간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자기 힘을 자랑할 만치 강한가? 지헤로운가? 무엇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이 만능이냐? 오늘과 같이 인간 자신의 힘이 극도로 발달되어 우주 정복의 꿈이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우주에서 몇 달씩 살 수 있고, 서로 만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만하면 인간은 만능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간에게 절망이 있을 수 없다고 하겠다. 절망을 하는 인간은 가장 나약한 자요, 비굴한 자라 조롱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정말 절망이 없을 정도로 자기 실력을 다 갖추고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마음 속에 일어나는 죄악의 생각을 없이 하거나, 그 본래적인 인간 경향성을 인간이 마치 기계를 조절할 수 있음과 같이 인간 자신의 양심과 그 생각을 조절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사람은 없다. 우주를 과학의 힘으로 정복하는 능력 많은 인간은 되었지만, 자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죄는 정복할 수 없는 인간이다.
아직도 인간은 사도 바울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부르짖는 탄식을 되풀이 해야 하겠다. ‘오호라. 니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이것이 인간의 무능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죄를 이기는 힘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으면 좋을텐데, 이 늙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는 막아내지 못한다. 우리나라 시조 중에 늙음을 막을 수 없다는 고백이 있다. 고려시대의 시조 한 수를 읽어보겠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하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늙는 것을 막지 못하는 무력만이 아니라, 인간은 자기 죽음을 막지 못하는 무능자이다. 오늘의 인간 지혜와 기술이 사람의이 생명을 전보다 오래 살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인간은 자기 죽음 앞에 지극히 무력한 자가 되어 있다. 죽음이 오면 다만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에게 있는 생명이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몇가지 인간의 힘으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사항들이 있다. 이런 것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의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 제자들은 이 절망을 넘어서게 할 확실한 능력자를 알고 있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한 이 호소를 들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여기 인간의 절망을 극복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라는 솔직한 고백이 나타나 있다. 현대 지성인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가장 큰 원인의 하나는 기독교가 무엇이나 다 해결해 주는 만능의 종교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는 모두 종교로서는 열등하고, 인간의 모든 문제를 무엇이나 해결해 주는 종교가 기독교 밖에 없다 함에 싫증을 느끼고 반발하고 있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책임이 기독교가 대화의 종교가 되지 못하고 권위의 종교가 되어 았기 때문이며,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두 권위의식과 하나님의 은혜의 독점의식으로 인한 복종과 무조건의 신앙을 강요만 했지, 인간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풀어보려는 이해심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의 기독교가 지성인들과 과학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있는 이유는 기독교의 무엇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과 오래 믿었다는 산저들, 그리고 교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직분자들이 그 신앙으로 교만하고 거만함을 부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신앙, 내 신앙을 남에게 강요하기 보다는 내가 믿는 예수님을 친절하게 올바르게 그리고 진실하게 증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다. 더욱이 인간고에 시달려 눈물을 흘리며 자기 삶이 절망의 순간이 다가왔다고 삶의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절망을 이기게 하시는 분임을 알려야 하겠다. 믿는 사람 자신의 말과 생활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절망을 이기게 하시는 분임을 증거해야 겠다. 여기 광풍을 만난 제자들, 죽음의 길 밖에 없어 호소하던 제자들에게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명령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고, 그 성난 바다를 조용하게 하셔서 그 절망적인 위기를 이기게 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우리 자신들부터 가져야 할 것이다.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이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는 그 책망을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하겠다. 믿음이 부족하다는 책망을 달게 받는 사람이 정말 잘 믿는 사람이다. ‘내가 믿는대로 믿으십시오’ 하고 자기 신앙을 자랑하는 사람보다 잘못 믿는다고 책망을 듣는 사람이 더 잘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절망을 극복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절망을 이기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어떤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에게 우리의 절망적인 사정을 호소하는 것이 우리 신앙이다. 제자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물리쳐 주신 예수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들의 절망도 물리쳐 주신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십니까?’ 하고 호소할 때, 예수는 우리 삶에 일어나고 있는 온갖 폭풍과 광풍을 잔잔하게 하여 주신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우리의 문제는 절망, 그것이 아니라 절망에서 그것을 이기게 하신 예수님께 호소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달려 있다.
위니 샬만이라는 화가가 그린 ‘예수는 선장’이란 유명한 그림이 있다. 여러분들도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그 그림은 노도광풍이 일어난 바다에서 배의 키를 잡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다. 이 젊은이는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굳세게 키를 잡고 앞만 바라보고 있다. 그 굳센 용기는 그의 배후에 그려진 검은 구름 속에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나 있고, 예수님이 왼손은 젊은이의 어깨 위에 두어 힘을 주며, 오른손은 젊은이가 바라보아야 할 목표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 검은 하늘 한편 구석에 푸른 하늘이 보이도록 하여 폭풍이 사라지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그림은 방향감각을 잃고 사나운 물결이 삶을 위협하고 있는 바다와 같은 인간 세계에서 순간순간이 위기이지만, 자기 배후에 예수님이 손을 잡고 계시고, 그가 지시하는 대로만 굳세게 나가면 폭풍도 가시고 푸른 하늘 밝은 태양이 힘차게 나타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현실이 절망이지만, 우리는 이를 극복하실 수 있는 예수님에게 이 사정을 아뢰고 그의 도움과 지시를 받고 용기있게 나가는 성도들이 되자. (1995-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