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 왕상 3:16-28, 살후 2:13-15
이스라엘의 기브츠 농장 길에서 한 떼의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이 농장을 방문한 손님 하나가 길을 가다가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문제를 내면서 이것을 먼저 알아맟히는 아이에게 상(선물)을 준다고 했다. 질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아이들로서는 너무나 쉬운 문제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즉각 대답을 하지 않고 함께 구석으로 몰려가 저희들끼리 의논을 하다가 다시 와서는 일제히 ‘사울왕이요!’라고 대답을 하더란다. 그 손님은 꼼짝없이 아이들 모두에게 상을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아이들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그렇지요. 아마 우리나라 아이들 같으면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들며 서로 맞추겠다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서로 하나가 되어 대답한다는 하나됨의 힘과 지혜를 우리는 모르고 있다. 더불어 함께 가지 못하고 남보다 조금이라도 높아지기를 바란다. 또한 누구보다도 인정받기를 바라는 경쟁의식 속에서 갈등과 대립과 분열만이 있을 뿐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지역간의 대립, 그리고 남북분단 역시 이러한 우리의 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되는 것은 사실 커지는 것이다. 분열은 작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카나다의 뱅쿠버와 미국의 시애틀 사이에는 국경이 있다. 그러나 이 국경에는 삼엄한 군린들도 없으며,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두 나라 국민이 넘나든다. 이 국경에는 작은 문 하나가 있는데 그 문 위쪽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We are of the same mother.’ 우리는 같은 어머니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다민족, 다인종의 국가도 이러한데 우리는 어째서 한 조상, 한 핏줄이면서도 남북으로 갈리고, 동서로 갈라지고 있느냐는 말이다. 전세계가 냉전체제를 벗어나 평화를 향해 가고 있는데 우독 우리나라만이 지구상의 유이한 분단국가이다.(키프러스도 분단국가)
일본 사람들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유는 모래알이기 때문이란다.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만큼 분열을 잘하는 교회도 없을 것이다. 다른 교파도 마찬가지겠지만, 장로교를 예로들면 우리나라에 80여개나 된다. 장로교가 원래는 하나였다. 해방되면서 나누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러지를 않는다. 외국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이다. 한인교회는 세계 어디서나 쉽게 분열한다. 엡 4:3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의 사역은 하나되게 하는데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되지 못했다는 것은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됨은 생존의 원리이다. 보다 잘먹고 덜먹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죽고 사는 문제라는 것이다. 남북이 하나되지 못하면 단지 불행해진다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목숨이 위협받고 망한다는 것이다. 지역 대립이 심화되면 단지 지역 간에 사이가 나쁜 정도가 아니라, 나라 자체가 죽게 된다는 것이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많이 갖겠다고 팽팽하게 맞서기만 한다면 회사는 망한다. 회사가 망하면 노동자든 사용자든 둘 다 죽는다. 하나되는 것, 이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어느 가정에서 아버지가 사다 준 과자와 사탕을 두고 어린 형제들이 싸운다. 서로 더 많이 먹겠다고 말다툼을 한다. 형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형이니까, 그리고 나는 크고 너는 작잖니? 그러니까 내가 더 많이 먹어야지.’ 이런 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생이 반론을 제기한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내가 작으니까 더 많이 먹어야 형처럼 커지지, 형만 커서야 되겠어?’ 두 형제의 이야기가 다 그럴듯하다. 형은 커서 큰 것을 유지하느라고 많은 것을 먹겠다는 것이요, 동생은 작으니까 크기 위해 많이 먹겠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이유가 정당하다. 크면 큰대로 이유가 있고, 작으면 작은대로 이유가 있다. 저마다 명분있는 분배의 정의를 가지고 있다. 동과 서도 애향심이라는 정의가 서로 다르다. 과연 이 서로 다른 저으이가 어떻게 화해를 하며, 어떻게 하나를 이룰 수 있을까요?
의사들 파업, 어떤 정의냐?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소득층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파업? 그렇다면 이 땅은 가진 자들의 나라인가? 세계 어떤 국가에서도 생명을 담보로한 집단 폐업은 없었다. 이번 파업시 의사들이 골프장으로 갔다는 말도 들린다.
오늘 본문인 왕상 3:16절 이하에 나타난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이라는 이 사건은 분단과 지역 감정의 대립 등 우리 시대의 반목과 갈등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귀한 말씀이라고 여겨진다. 창녀인 두 엄마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한 아기를 가지고 솔로몬에게 찾아왔다. 솔로몬왕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이 두 엄마에게 아이를 칼로 갈라 서로 공정하게 나누어 가지라고 말한다. 이에 친엄마는 차라리 아이를 저 가짜 엄마에게 주라고 말하면서 아이를 죽이지 말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가짜 엄마는 아이를 나누어 주라는 솔로몬의 판결에 동의(찬성)한다. 이에 솔로몬이 진짜 엄마를 가려낸다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 재판은 결코 단지 진짜 엄마를 가려주는 솔로몬의 지혜, 또는 재치를 알려주는 재판이 아니다. 이 재판은 소유자가 누구냐, 또는 어떻게 그 소유를 공정하게 분배하고 처리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솔로몬의 이 재판은 소유권 또는 분배의 문제로 처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재판인 것이다. 그러기에 솔로몬은 먼저 의도적으로 칼을 가지고 아이를 둘로 나누라고 말한다. 분배가 초점이다. 본문 25절에서 솔로몬은 말한다.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 솔로몬은 공정하게 딱 둘로 똑같이 아이를 나누어주라고 말한다. 공정한 배분을 말한다. 26절에서 진짜 엄마는 솔로몬에게 말한다.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솔로몬은 공정하게 나눌 것을 말했지만, 진짜 엄마는 죽여 나누지 말고 차라리 가짜 엄마에게 그 아이를 주라고 말한다. 솔로몬은 소유의 분배를 말했고, 가짜 엄마는 그에 찬성하였지만, 아이의 친 엄마는 생명을 말하고 있다.
이 재판은 모든 것을 소유권이나 양적인 분배의 문제로 돌리려는 시각으로부터 생명의 문제로 시각을 바꿀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문제는 생명이다. 어떻게 양적으로 공정하게 나누었나, 또는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살리는 문제요, 생명의 문제이다. 이제 초점을 달리하자. 양적인 분배의 문제가 아니다. 내 몫이니 네 몫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내것, 네 것을 말하기 전 생명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생명이 죽는 문제라면 소유권도 의미가 없다. 아무리 정의로운 분배라 할지라도 생명이 죽는 문제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26절에서 가짜 엄마 스스로가 말하듯이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는 모두를 죽이는 꼴이 된다. 죽고 사는 생명이 걸린 문제 앞에 소유권이나 분배의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솔로몬의 재판은 이스라엘의 남과 북, 분단, 그리고 강대국에 의한 멸망이라는 뼈아픈 역사의 행로를 그린 역사이다. 분단이 얼마나 비참한 종말을 가져왔는가를 깨달으며 쓴 것이 바로 열왕기라는 역사이다.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갈라졌다. 각 지파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분단된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가 정통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서로 으르렁대며 살아왔다. 분단 후 서로 미워하며 싸우다 급기야는 서로 강대국의 힘을 빌려 서로 침공을 하며 국력을 소진하였다. 그 결과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분단현실이다. 이념이라는 솔로몬의 칼로 우리도 둘로 나뉘었다. 강대국의 이해관계라는 칼로 우리도 나뉘었다. 이념이라는 칼로 전쟁을 일으키고 형제를 서로 죽였다. 과연 이념이라는 칼로 나눈 이 분단의 현실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현실인가? 이 나라의 두 동강난 현실, 바로 이것이 솔로몬에게 찾아온 두 엄마요, 산 아이는 바로 우리 민족이다.
최근에 믿을만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60% 이상의 젊은이들이 전쟁만 없다면 이대로가 좋다고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남한의 경제문제마저 위태로울 것이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주춤해 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가짜 엄마처럼 아이를 나누라고 하는데 찬성한다. 그것이 공정한 분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것도 네 것도 아닌’ 아이의 죽음이요, 우리 자신의 파멸을 말한다. 분단이 점점 고착화 되어가는 우리 현실이 안타깝다. 나아가 이것도 모자라 동서가 서로 갈라져 나라를 두 조각이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가고 있다. 더욱이 이와 같은 분열과 대립의 상황에서 우리는 회개하지 않는다. 한 형제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현실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서로 자신이 옳다고, 자신이 정통이라고 우기고 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남과 북으로 분단된 이스라엘은, 남유다는 예루살렘에, 북이스라엘은 벧엘과 단에 성소를 두고 서로가 정통 야웨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형제만 갈라진 것이 아니고 신앙도 갈라졌고, 하나님도 갈라버렸다. 이제 하나님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었다. 아버지라고 불리는 하나님도 둘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 분단의이 현실, 두 동강난 현실에서 남북한 누가 서로를 정통이라고 주장한다는 말인가? 하나라는 민족의 동질성을 거부할 때 정통성은 없다. 하나일 때만 정통은 성립된다. 분열과 반목의 둘은 서로를 죽일 뿐이다. 진정으로 친엄마라면 본문 26절처럼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라고 말하며, 차라리 아이를 가짜 엄마에게 주라고 할 것이다.
이제 6.25전쟁이 일어난지 50년이 된다. 50년이면 성서에 의하면 희년이기도 하다. 빚을 탕감해 주고, 노예를 자유롭게 한다. 하물며 형제인 우리는 왜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걸까? 아직도 정통이라고 자기 자신의 의와 몫만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분명 창기이다. 우리는 강대국이 그어놓은 38선이 모자라 우리는 서로를 죽이는 전쟁과 함께 휴전선을 긋게 하였다. 우리 몸을 두 동강낸 것이다. 가족을 죽이고 생명을 죽였다. 이념의 칼로 죽였다. 저 38선이, 저 휴전선이 서로를 위한 공정한 선인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 선이 모두를 죽이는 선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원수된 것을 상기하는 6.25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반목과 대립의 지난 날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참회하는 희년의 6.25가 되어야 할 것이다.
너와 내가 하나될 때만 비로소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될 것이다. 교회는 남과 북의 하나됨을 위해 절실하게 기도해야 할 것이며,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 민족이 ‘하나’임을 확인할 때 비로소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게 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해 모처럼 남과 북이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이번에는 남들이 마련해 준, 4강이 마련해 준 화해의 자리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제안하고 응한 자리이다. 이념보다는 이산가족이 먼저 만나는, 가족의 생명을 살리는 자리가 우선일 것이다. 기아에 허덕이는 형제를 살리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의 하나된 동질성이 먼저 회복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어떻게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0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