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쉽게 쓰는 법 / 이훈
글을 쓰고 싶은데도 손이 잘 안 간다. 어렵게 생각해서다. 그래서 친구에게 말하듯이 하면 된다고 권한다. 글에 비하면 아무래도 말은 쉽게 나오기 때문이다. 읽거나 쓰는 것은 인류의 진화사에서 아주 최근의 일이므로 당연하다. 더군다나 우리 교육 현장에서는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선생도 학생도 독서 경험에서 얻은 짐작으로 스스로 알아서들 한다. 교육의 핵심은 글쓰기여야 하는데 큰일이다. 인공지능 시대에서는 더 절실한 요구가 되었다.
그런데 글을 쓰려면 문장에서 시작해야 한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발을 떼기만 하면 어떻게 하든지 걸을 수는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한 글자라도 적으면 문장이 나오고 이게 이어지면 글이 된다. 결국 문장이 문제다. 어떻게 하면 쉽게 쓸까? 글과 다를 게 없다. 말하듯이 쓰면 된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먼저, 일상생활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우리 교육 현장에서 글쓰기가 일상화되지 못해서 연필을 들게 되면 긴장해서 손이 굳어지게 된다. 다른 일에서도 잘하겠다는 마음을 의식하게 되면 뜻과는 정반대로 잘 안 되는 일을 많이 겪는다. 그러므로 친구와 이야기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시작하면 된다. 늘 만나는 사이인데 굳이 잘난 척할 필요는 없다. 그러자면 쓸데없이 힘만 들고 집에 오면 피곤해져서 괜히 만났다고 후회하게 된다.
친구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쉬운 말로 한다. 어려운 한자나 외국어는 입에 안 올려도 된다. 글쓰기를 가르쳐 달라고 오는 이가 가장 많이 보이는 예가 문어체다. 시장에 가서 뭘 사고는 ‘구매했다’고 한다. 요즘 들어 익숙하게 된 마스크도 ‘착용한다.’ 이 말은 마스크뿐만 아니라 옷에도 쓰는데 이런 데 익숙해지면 낱말에 잘 어울리는 말을 고르는 힘이 없어진다. 풍부한 우리말이 덩달아 가난해지고 만다. 그런데도(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한자말을 고집한다. 오늘부터라도 마스크는 쓰고, 옷은 입거나 걸치며, 안경은 쓰거나 끼고, 목도리는 두르고, 양말이나 운동화는 신고, 안전띠는 매자.
앞에서 나온 ‘그런데도’도 글에서는 잘 보기 어렵다. 이제는 대화에서마저도 이 대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흔히 듣는다. 우리말의 특징은 조사와 어미에 있다. 이들을 제대로 쓰면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된다. 이 점을 바로 느끼려면 글쓰기를 공부하겠다는 사람에게 꼭 추천하는 책에서 옮기는 게 좋겠다.
1. 굉장히 바쁨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와주었다.
2. 굉장히 바쁜데도 일부러 와주었다.
1.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
2. 거짓말을 해서 처벌을 받았다.
1. 비록 실패한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
2. 실패할망정 포기하지 않겠다.
1. 막 나서려고 할 때 키 작은 노파가 열린 상자를 가리킨다.
2. 막 나서려는데 키 작은 노파가 열린 상자를 가리킨다.
이희재, <<번역의 탄생>>, 교양인, 2009, 174쪽.
2번에서 밑줄을 친 어미가 문장을 깔끔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우리말을 어려서부터 익힌 사람은 바로 알 수 있다. 입에는 익었으면서도, 평소에는 잘 걷다가도 제식 훈련을 받으면 같은 쪽의 손과 다리가 함께 나가는 식으로, 종이에는 1번으로 적는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거꾸로 되어서 이야기하면서도 곧잘 올리게끔 되어 버렸다.
입말에서는 나오지 않는 문어체로 ‘나의’를 예로 들고 싶다. “이 분 누구니?”라는 물음에 “응. 나의 엄마야.”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중학교에서 영어를 처음 배우면서 ‘이것은 나의 책입니다.’라는 번역에 익숙해져서 글에서는 자연스럽게끔 되었다. 요즘은 아기 때부터 영어를 시작하는데 이 ‘나의’가 그대로 살아 있는지 궁금하다.
말이 나왔으니 이 소유격 조사에 두 가지 얘기를 덧붙이고 넘어가자. 하나는, 이 조사가 ‘내가 가진 책’이나 ‘내가 할 일’과 같은 말을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게 줄이는 청소부라는 점이다. 그냥 ‘내 책’ ‘내 일’이라고 하면 되는데 저렇게 군말을 쓰는 사람이 이외로 많다. 또 ‘저희 나라’라든지 ‘저희 학교’라고는 제발 하지 말자. 제정신이고서는 이래서는 안 된다. 과공비례의 전형이다. 사실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해야 하지만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당연히 ‘우리나라’, ‘우리 학교’여야 한다.
글에 동원되는 문어체의 병폐로 번역 투 말도 들어야 한다. ‘-에 대해(대한)’ ‘-기 위해’ ‘-을 통해’ ‘-에 의해’ ‘-로 인해’ 들이 있다. 특히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동원한다. 저 외국어에서는 대개 전치사로 이런 뜻을 담는데 이 품사를 의식해서 이에 해당하는 말을 따로 만들어 내는 탓이다. 말하면서는 잘 쓰지 않는다는 데서도 이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저 말이 기계적인 생각의 결과라는 데 있다. 문맥에 따라 더 적확한 말이 있는데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공식에 따르는 것처럼 하게 되면 생각이 굳어져 버린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글을 잘 쓰려면 낱말 하나 하나를 의식적으로 대해야 한다. 그래야 말의 자질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할 수 있다.
대표적인 번역 투 말 몇 개를 우리말답게 고쳐 보자. 참고로, 이 예는 다 신문에 실린 글에서 뽑은 것이다.
독재에 대한 투쟁을 통해 - 독재와 싸움(투쟁함)으로써
복당한 사람들은 진정한 국민에 대한 사과와 자신들의 과오부터 반성하고 나서 다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 복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부터 반성하고, 국민에게 진정으로 사과하고 나서 다음의 일을 이야기해야 한다.
설조 스님의 단식이 대중들로부터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승가 공동체의 내부에서 불교적 방식을 통한 문제 해결을 고민하고 제시할 때 비로소 대중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 설조 스님의 단식이 대중을 설득하려면 승가 공동체 내부에서 불교적 방식으로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조선왕조 이래 우리의 역사를 엮어온 영예와 치욕의 사건들이 단단히 묶여 있는 상징적 공간인 광화문 광장에서 직접행동에 의한 위대한 ‘촛불시민혁명’을 진행 중이다. - 우리는 지금 조선왕조 이래 우리의 역사를 엮어 온 영예와 치욕의 사건들이 단단히 묶여 있는 상징적 공간인 광화문 광장에서 행동으로 위대한 ‘촛불시민혁명’을 진행하고 있다.
또 ‘세계의 창고’ 네덜란드로 흘러들어온 온갖 진귀한 물건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의 표출과 동시에 그 욕망을 견제하고 겸손한 삶을 요구하는 바니티스 회화(인생의 허무함을 주제로 삼는 그림)가 등장했다. - 또 ‘세계의 창고’ 네덜란드로 흘러들어온 온갖 진귀한 물건을 좇는(탐내는) 세속적인 욕망을 표출하면서도 그것을 견제하고 겸손하게 살라는 바니티스 회화(인생의 허무함을 주제로 삼는 그림)가 등장했다.
이때 재정정책의 핵심은 경기후퇴에 대한 신속하고도 적절한 개입을 통해 불황이 장기화되고 고착화되는 것을 예방하는 데 있다. - 이때 재정정책의 핵심은 경기 후퇴에 신속하고도 적절하게 개입하여 불황이 장기화되고 고착화되는 것을 예방하는 데 있다.
그는 실력이 없어도 관심이 있는 학생들을 모아 댄스스포츠를 연습시키고, 이를 통해 정체성과 성취동기를 부여해 사회에 나가는 바탕을 마련해준다. - 그는 실력은 없지만 관심이 있는 학생을 모아 댄스스포츠를 연습시킴으로써 정체성과 성취 동기를 부여해 사회에 나가는 바탕을 마련해 준다.
‘가지다’도 흔하게 만나는 번역 투 말이다. 영어에서는 이 동사를 구체적인 것은 물론 추상물에도 쓰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다.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하지 않고 ‘돈이 많다’,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 대신에 ‘능력이 있다’고 한다. 오늘 아침에 읽은 구절을 옮겨 보자.
나아질 거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준비조차 하지 못했던 그때와 달리 우리는 지난 1년의 경험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는 경험을 했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6227.html)
‘가지다’와 함께 ‘-을 통해’도 보인다. 저 문장을 아래처럼 고치라고 하고 싶다.
나아지리라고 막연히 기대해서 준비조차 하지 못했던 그때와 달리 우리는 지난 1년의 경험에서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우리말에서 어미가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저 문장은 같은 말을 쓸데없이 되풀이하고 있기도 하다. 위에서처럼 ‘경험’이 한 번만이어도 뜻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다. 이런 것에 주의해도 생각이 유연해진다. 지금 내 글에는 내용으로 보건대 ‘쓰다’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되도록 이 말이 안 나오게 하거나 다른 말로 바꿔 같은 뜻을 담으려고 무척 고심하고 있다. 이런 노력이 생각하는 힘을 키워 준다.
초보자가 저지르기 쉬운 잘못은 이것 말고 더 있다. 문장을 꾸미려고 드는 것이다. 그 뜻을 바로 알 수 있는 상투적인 비유를 남용해서 독자의 상상력을 가로막으면 안 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또 ‘엄청 슬펐다’ ‘너무 고맙다’는 식으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피해야 한다. 현장에 같이 있지 않은 독자는 필자가 표현하려는 그 마음을 생생하게 느끼지는 못한다. 어떻게 고맙고 슬픈지를 읽는 이가 공감하도록 하자면 사실을 꼼꼼하게 그릴 수밖에 없다. 소풍 가서 재밌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독자는 거기 갈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재밌게 놀았던 장면을 영화처럼 제시해야 마음이 움직인다. 사실의 힘은 이렇게 크다.
초보자에게는 짧은 문장이 실망하지 않고 계속 글쓰기에 도전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야기에서도 의식적으로 활용하면 좋다. 문장이 길어지면 상대방의 주의를 집중하게 하는 데 방해가 된다. 또 중간에서 부연해서 설명해야 할 곳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긴 문장이 이어지면 전체 글이 짧아지는 역설적인 현상도 곧잘 보게 된다. 한 문장에 모든 것을 담으려다 보니 생기는 잘못이다. 더불어 주어와 서술어가 멀리 떨어지게 되어 문법에 어긋나게 문장을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친구에게 말하듯이 문장을 쓰면 된다고 했지만 세상의 일이 다 그렇듯이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말로는 제대로 살리기 어려운 글의 특징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맥에 따라 긴 문장을 섞고 비유도 적절하게 활용하여 독자가 생각하도록 이끌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문맥에 따라’라든지 ‘적절하게’라는 좀 막연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일은 글을 써 버릇하면서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단계에서는 끊임없는 연습이 받는 선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말하듯이’에는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외국어나 유행어를 아무 생각 없이 글에도 쓰게 된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외국어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말이 더 풍요로워지고 우리 생각이 더 넓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말로 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걸 굳이 외국어를 입에 올릴 필요까지는 없다. 이를테면 ‘돌봄’이라는 좋은 말을 두고 굳이 ‘케어’라고 한다든지, ‘마음’이나 문맥에 따라 적절하게 다른 낱말을 고를 수 있는데도 ‘마인드’라고 하면 곤란하다. 우리말을 천덕꾸러기로 대접하는 짓이다. 글쓰기는 말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상대방을 무시하면 폭력이 된다.
제목과는 다르게, 끄적이기는커녕 연필을 들고 싶은 마음마저도 사라지게 해 버릴지도 모르는 데까지 오고 만 느낌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를 생각해 보면 된다. 한 발 떼려고 애쓰는 것을 보려면 조마조마하다. 뒤뚱뒤뚱하다 넘어질 것만 같다. 끊임없는 연습과 실패 끝에 겨우 걸을 수 있게 된다. 글은 이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웬만하면 다들 걷기는 하지만 글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드니까 해 볼 만하다 생각하면서 달려들 수밖에 없다. 쉬운 것치고 가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첫댓글 일차 지식에 해당하는 듣고 말하는 능력은 언어에 특화된 심리적 적응 덕분에 저절로 쉽게 배울 수 있다. 이차 지식에 해당하는 읽고 쓰는 능력은 다른 기능에 특화된 심리적 적응들을 임시변통으로 끌어다 쓰기 때문에 명시적인 지도와 고된 훈련을 거쳐야만 간신히 배울 수 있다.(전중환, <<진화한 마음>>)
자신을 별먼지와 잔가지라고 인식하는 것은 자기 객관화에도 도움이 됩니다. 자기 평가를 냉철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어서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장단점을 인정하고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과소 평가하는 것을 방지하게 해 줍니다. 메타인지 능력이 상승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기 객관화는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지지요. 자연스럽게 공감과 이해가 높아집니다. 자신이 별먼지면 다른 사람도 소중한 별먼지일 것입니다. 자신이 잔가지면 다른 사람도 고귀한 잔가지일 것입니다. 모두 비슷한 존재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만 특별한 일이 생길 확률은 아주 낮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보편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명현, <사례 연구, 이명현>, 이명현, 장대익, <<별먼지와 잔가지의 과학 인생 학교>>, 2023, 사이언스북스, 1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