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을 전하니라. 福音を告げ知らせていた。(2021년 7월 11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14:1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유대 사람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하였다. 그래서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이 많이 믿게 되었다. 2 그러나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유대사람들이 이방사람들을 선동해서, 믿는 형제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영혼을 학대함) 하였다. 3 두 사도는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면서,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손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셔서, 그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 4 그 도시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서, 더러는 유대 사람의 편을 들고, 더러는 사도의 편을 들었다. 5 그런데 이방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그들의 관원들과 합세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했다. 6 사도들은 그것을 알고, 루가오니아 지방에 있는 두 도시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피하였다. 7 그들은 거기에서도 줄곧 복음을 전하였다.
1. イコニオンでも同じように、パウロとバルナバはユダヤ人の会堂に入って話をしたが、その結果、大勢のユダヤ人やギリシア人が信仰に入った。2. ところが、信じようとしないユダヤ人たちは、異邦人を扇動し、兄弟たちに対して悪意を抱かせた。3. それでも、二人はそこに長くとどまり、主を頼みとして勇敢に語った。主は彼らの手を通してしるしと不思議な業を行い、その恵みの言葉を証しされたのである。4. 町の人々は分裂し、ある者はユダヤ人の側に、ある者は使徒の側についた。5. 異邦人とユダヤ人が、指導者と一緒になって二人に乱暴を働き、石を投げつけようとしたとき、6. 二人はこれに気づいて、リカオニア州の町であるリストラとデルベ、またその近くの地方に難を避けた。7. そして、そこでも福音を告げ知らせていた。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전할 때, 그리고 바른 복음과 바른 믿음으로 살 때 비방을 받고 선동을 당하게 될 때에도 자신을 지키는 지혜와 용기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금 선동하는 이들의 방해에도 담대히 소명과 사명을 지켜 나아가는 사도들의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용기와 담대함으로 흔들리고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변질되지 않는 말씀에 뿌리 내리는 영적인 에너지를 공급받으시길 소망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 이고니온에 도착하였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바로 이 곳이 이고니온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약 동남쪽으로 180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예로부터 실크로드가 지나던 이고니온은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또한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살기에 적합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일 수 있는 회당이 있었기에 바울과 바나바는 자연스럽게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 일행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가 어떤 특별한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 성도인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가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을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내 의식주가 해결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의식주를 누리는 과정에 복음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전해지고, 드러나고 있음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복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복음을 믿지 않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즉, 그 복음에 순종하지 않은 이들이 위기의식을 가질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위기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대중을 선동하였던 것과 같이 이고니온에 있는 불순종의 유대인들도 다른 이방인들을 선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단지 유대인들만이 선동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복음을 믿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불순종의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선동하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믿는 형제들이 나쁜 감정을 품게” 하였습니다. 어떤 유언비어나 혹은 선동적인 음모론을 듣게 되면 우리 마음에 나쁜 감정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은 “악감을 품게 하였다”고 말하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였는지 원어 성경의 표현을 살펴보았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사람들의 “마음” 즉, “정신세계”를 “학대하다”, 혹은 “격분시키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진리가 아닌 것들이 우리 마음과 내면세계를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땅의 모든 사이비 종교들이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진리 안에 자유하게 하기는 커녕 더욱 신자들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기독교 이단들의 가르침의 위험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이단만이 아니라,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복음의 약속과 은혜보다는 잘못된 음모론을 주장하며 성도들의 혼과 정신, 그리고 마음을 학대하는 이들의 선동적인 태도를 경계해야 함을 다시금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참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신 참된 복음을 알고 믿으면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여기서 자유란 제멋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제약을 받지 않고 해치워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이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 그리고 불안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인 것입니다. 이런 참된 자유에 대해서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진정한 안식과 쉼이 자유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안식할 때까지 자신은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고백한 것이지요.
복음은, 그리고 성경의 진리는 우리의 마음을 안절부절하도록 충동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저주에 떨어질까 불안하게 살도록 마음을 학대하는 일이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가 우리에게 진정한 쉼을 줍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오늘 우리의 영혼과 마음은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육신이 잠시 불편함을 겪어도 우리의 내면과 영혼은 진정한 쉼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 12:47)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물론 다시 오실 때에는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겠지만 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불안이나 걱정이 아니라, 안심과 해방감을 체감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선동과 음모론은 우리의 정신세계와 태도, 마음을 언제나 전투적이게 바꾸고,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변질시킨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의견이나 영적인 가르침을 들었을 때, 그 내용이 내 마음을 전투적으로 흥분되게 하거나,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게 한다거나, 혹은 사람들 사이의 영적 수준을 비교하도록 점수를 매기고 있다면 그러한 가르침이나 주장과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아무리 귀에 잘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고, 매력적인 말이라고 하더라고 말입니다. 그 어떤 유명하고 선량하고 심지어 유능한 사람이 말을 했더라도 말입니다.
선동과 음모론은 우리의 마음을 학대하는 매우 부적절하고 추악한 사단의 사탕발림이라는 것을 꼭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다음으로는 도시의 사람들이 복음과 불순종으로 갈라지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복음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으로 나뉘는 일종의 분파가 생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유대인을 따르는 자와 사도를 따르는 자로 나뉘었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이 선포되면 복음을 따르는 자와 그 복음을 따르지 않는 자로 정체성이 나뉘어진다는 뜻이지, 복음파와 비복음파로 나뉘어 싸워야 한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분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잠언은 지혜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잠언 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즉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경배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지식의 근본”은 곧 “지혜”를 뜻합니다. 지식의 근본을 한 단어로 말하면 지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본어 성경에서는 지식도 지혜라고 번역하고 있지요.
이 말씀을 종합하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예배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원이 되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혜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의 근원이 되기에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와 가치관과 삶에 대한 태도와 성공에 대한 생각을 분별하는 기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의 말씀에 적용하여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즉 복음을 믿는 것이 모든 분별력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를 따르는 사람과 유대인을 따르는 사람으로 대중의 정체성이 나뉜다는 것은 복음이 이고니온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가치를 분별하는 기준이 되었다는 뜻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종교를 믿는 사람의 진영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진영으로 나뉘어 싸웠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선포됨으로 이 세상은 이제 그 가치가 돈이나, 명예나, 외모나, 학벌이나, 혈통이나, 권력이나, 영향력 등으로 헤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이 기준이 되어 우리의 가치가 헤아려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여기서 본받지 말라는 뜻은 세상과 분리되어서, 혹은 적대시하며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신의 가치를 헤아리지 말라는 뜻이지요. 세상이 정해 놓은 틀에 자신을 맞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좋다는 것이 과연 주님께서 보시기에서 좋은 것인가, 세상에서 가볍게 여기는 것을 주님께서도 가볍게 여기시는가를 함께 헤아리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대세와 유행에 그냥 호락호락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육신의 규칙을 따라서 살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가치를 이 땅과 세상의 시대정신이 규정해 놓은 가치관에 묻어버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복음으로 나의 가치를 헤아림으로 참된 자유와 담대함을 소유하시길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폭력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선동하는 자들은 결국 폭력적인 수단을 정당화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그런 폭력적인 유대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지요. 그런 십자가의 죽음은 곧 그들의 폭력까지도 그 죽음 안에 포함시키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도 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유대인들의 ‘폭력성’마저도 예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육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을 배신하고 은 30개의 돈으로 팔아버린 가룟 유다까지도 예수님은 끝까지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를 사랑하셔서 그의 배신의 죄까지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다만 가룟 유다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신을 스스로 심판하여 멸망하기에 이르렀지만 말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폭력을 피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만, 결국 훗날 로마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그 후로 수많은 순교자의 피와 희생 위에 교회는 세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이 죽는 것만이 순교만이 순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고 선포하며 사는 삶도 순교적인 삶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도 순교하기 전에 자신이 이미 순교적인 삶을 산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렇게 십자가를 매일 생각하며, 십자가에서 죽은 자기 자신의 자아를 생각하며 사는 삶이 진정한 자랑거리라며 또한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자신이 로마의 경기장에서 검투사가 사자와 싸워서 이기는 것처럼 뭔가 대단한 자랑거리를 가지는 것보다, 그저 매일 주님과 함께 자신이 죽은 십자가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자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것, 늘 위협에 시달리며 사는 것, 복음을 믿는 것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되는 것으로 불안해하지 않는 담대함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이렇게 산다는 것이 자신의 노력과 수양으로는 매우 어렵고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 인한 손해, 불안, 위협, 혹은 오해와 선동하는 주장으로 인해 폭력의 위험에 노출될 때...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면 담대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글이, 이 고백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와 닿은 것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런 선동과 위협과 음모로 인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계속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고니온에서도 도망쳐야 할 상황이 되어서 루스드라와 더베라는 도시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도 여전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미아가 된 자녀)들을 다시 찾아내어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직접 복음의 소식을 말로 전하는 것부터, 복음에 순종하는 광고판의 역할하는 것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던, 어떤 방법으로 하던 언제나 변함없이 꾸준하게 복음에 속한 성도로서의 담대함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살면 우리에게 그 소망의 이유를 묻는 이들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 사도의 권면을 기억합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5)
어떠한 삶의 자리에서도 복음이 주시는 소망을 품고, 그 소망의 이유는 묻는 이들이 다가 올 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담대히 복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허위사실을 떠벌리며 다니는 사람들로 인해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의 우리도 주님 안에서의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된 것을 믿습니다.
각종 음모론과 선동적인 주장과 왜곡된 지식으로 인해 마음이 갈라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올 때 이미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며 이미 영생 가운데 살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복음의 광고판으로 혹은 복음을 말하는 스피커로 살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욱 큰 힘과 자유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선동과 음모론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주시는 복음에 온전히 스며드는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