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단장한) 신부
2023. 7. 9(주일낮예배, 성찬식) 베드로후서 3:10-14
할머니 3분이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할머니가 나는 요즘 계단을 오르다가 숨이 차서 한숨 쉬고 나면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는지 내려가고 있었는지?가 헷갈린다고 말했다. 그때 옆에 있던 다른 할머니는 말도 하지 말라고 하면서 할머니는 침대에 앉아 있다보면 누우려고 앉았는지, 일어서려고 앉았는지가 헷갈린다고 하였다. 그렇게 할머니들이 건망증으로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세 번째 할머니는 그 할머니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른 할머니를 무시하던 세 번째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가 이렇게 말했다.
근데 시방 우리는 방금 버스에서 내린겨? 탈려고 하는겨?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 중에 하나가 건망증이다.
그런데 이 건망증으로 인하여 저와 여러분은 슬픈 웃음을 짓고 있지는 않는가? 코로나 이전에 우리는 마더와이즈를 통하여 유대 결혼에 대하여 배웠다. 우리나라와 달리 유대의 약혼은 신랑과 신부에게 아주 강한 구속력을 가진다. 그래서 합방하는 일외에 완전한 부부가 되는 것이 약혼이다.
그런데 이 약혼식의 순서를 아는가? 신랑은 신부와 약혼하기 위하여 지참금을 들고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그때 신부가 문을 열어주면 약혼식은 시작되는데, 그 약혼식에서 신랑은 신부에게 3가지를 나눈다. 첫 번째는 신랑이 신부의 오른손 검지에 끼워주는 킨얀이라는 반지가 있고, 두 번째는 옷과 먹을 것을 주며, 또 결혼을 한 후에는 신부와 합방을 하겠다는 서약서인 케투바라를 준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는 함께 떡과 잔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볼찌어다 내가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 3:20) 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문을 여는 순간 주는 나와 더불어 먹는 나는 주와 함께 먹는 약혼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약혼식에서 주는 떡과 잔을 나누며 나를 기념(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찬식이다.
그러면 우리는 성찬의 떡과 잔을 통하여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제일 먼저는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신랑이 신부의 존귀함을 인정하여서 가지고 온 것이 지참금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는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 생명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떡과 잔을 받으면서 우리는 나의 신랑되신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유대의 전통에 의하면 약혼을 한 신랑은 신부와 함께 거할 신방을 준비하기 위하여 떠나간다. 그리고 신부를 위한 신방이 다 만들어지면 그때와서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결혼식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찬을 하신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특이한 말씀을 하신다. 먼저 요한복음 14장 1절-2절을 읽기 바란다.
(요 14:1-2)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우리 주님은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눈 후에 제자들에게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처소가 다 예비되고 나면 다시 올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떡과 잔을 마시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랑하는 신랑은 처소를 예비한 후에 다시 오실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랑이 가장 예뻐하는 모습으로 반겨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장한 신부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찬양사역자인 이민욱 목사님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이 찬양을 제일 먼저 부른 분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주님앞에 나아간다는 이 찬양을 부른 이민욱 목사님은 왼쪽 청력을 잃어버린다. 이민욱 목사님은 찬양사역자로 사역할 때 많은 사람이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청력을 잃은 후에는 사역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어서 온누리교회 부교역자로 섬기게 된다. 그래서 교역자로 훈련을 받은 이민욱 목사님은 지금은 미국 샌드에고 온누리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그래서 선교에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허리가 아파서 수술을 2번이나 받게 되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있으면 벤치로 꼬리뼈를 뽑아내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그런데 목사님은 오랜시간 비행기를 타고 선교지 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왜 목사님은 비행기를 타면 고통스러운데 계속하여 선교여행을 떠나는 것인가? 선교지에 가면 씻지 않아서 냄새나는 아이들이 있다. 목사님은 그 아이들을 보듬어 안고 스다듬으면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한다. 그렇게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는 사이에 목사님의 몸에는 아이들의 역겨운 냄새로 가득해 진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러한 상태가 너무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단장한 신부의 모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단장한 신부는 손톱에 매니큐어 바르고, 비싼 화장을 한 그러한 모습이 아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증거하다가 역겨운 냄새도 몸에 매이고, 또 더렵혀진 그 옷이 단장한 신부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목사님의 이 신앙의 옳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요한계시록 7장을 보면 흰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들고 어린 양 앞에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계 7:10)고 찬양하는 무리를 본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요한에게 이 흰 옷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 요한은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을 때 그 장로는 계 7장 14절로 말씀하신다.
(계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장로 중 하나는 요한에게 흰옷 입은 자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다고 하였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주님의 그 사랑으로 신부가 된 사람입니다 하며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런데 그 복음으로 인하여 이들은 온갖 박해와 고통을 당하여서 환난당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었는데, 붉게 물드는 것이 아니라, 희게 되는 것이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그의 옷이 빨래하는 자가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게 된 것처럼 예수님의 피에 씻은 신부의 옷을 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희게 한 신부의 옷은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거룩한 신부는 손톱에 매니큐어 바르고, 머리에 화려한 티아라를 한 상태가 아니다. 우리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의 증거와 흔적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비록 눈으로 보이는 것은 초라하고 비참한 것이지만, 우리 주님은 그 사랑을 받으셔서 거룩케 하여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단장한 신부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거룩한 신부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한 제자이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죄인이 된 예수님은 아무런 능력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한 계집아이가 너도 갈릴리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말에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아니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과 저주와 맹세까지 한 것이다. 그렇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 닭이 3번 울었고, 닭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며 울었다. 그렇게 통곡하며 울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빈 무덤을 보았다. 아니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자국까지도 다 보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갈릴리로 떠나간다.
베드로가 왜 갈릴리로 떠나갔겠는가? 성경이 분명한 이유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실패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픈 실패를 경험한 베드로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오늘 본문으로 권면한다. 베드로가 뭐라고 권면하는지 오늘 본문 베드로후서 3장 14절을 보시기 바란다.
(벧후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는 신랑되신 우리 주님은 도둑같이 오실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날이 되면 물질(원소)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뤼오,10절), 이 모든 것이 풀어지고(11절),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것이다(12절). 그래서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뜨거운 불에 쇠가 달구어 지면 불순물이 다 제거되고, 순수한 철만 남는 것처럼 진실되지 못한 것은 다 사라지고 본체(실체)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된 삶을 산 사람은 그 거짓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서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진실되게 산 사람은 그 진실의 실체가 드러남으로 인하여 자랑과 기쁨이 충만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에 저와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자리에 설 수 있겠는가? 그래서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우리를 부르면서 그 날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모습으로 평강 가운데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거룩한 신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오늘 거행되는 성찬을 통하여 우리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를 기억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신랑되신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기억하여 거룩한 신부로 단장되어져 가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오시는 기쁨으로 주를 반겨 맞이하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