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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보다 바른 방향. / 熱心より正しい方向。(2022년 7월 17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22:1~5
행 22:1 "동포 여러분,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드리는 해명을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2 군중들은 바울이 히브리 말로 연설하는 것을 듣고, 더욱더 조용해졌다. 바울은 말을 이었다. 3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나서, 이 도시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4 나는 이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묶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5 내 말이 사실임을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가 증언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문을 받아서, 다마스쿠스로 길을 떠났습니다. 나는 거기에 있는 신도들까지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처벌을 받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1. 「兄弟であり父である皆さん、これから申し上げる辯明を聞いてください。」 2. パウロがヘブライ語で話すのを聞いて、人々はますます静かになった。パウロは言った。 3. 「わたしは、キリキア州のタルソス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そして、この都で育ち、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い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熱心に神に仕えていました。4. わたしはこの道を迫害し、男女を問わず縛り上げて獄に投じ、殺すことさえしたのです。5. このことについては、大祭司も長老会全体も、わたしのために証言してくれます。実は、この人たちからダマスコにいる同志にあてた手紙までもらい、その地にいる者たちを縛り上げ、エルサレムへ連行して処罰するために出かけて行ったのです。」
최근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의 기세가 다시 심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이 다시 위축되고, 그와 더불어 믿음생활도 뜻하지 않게 주춤하게 되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있는데요. 하지만, 우리가 항상 고백하고 또한 언제나 기억하듯이 주님께서 은혜와 사랑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넘치게 부어 주고 계심을 믿습니다. 또 그 어떤 위협적인 문제와 불안한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여러가지 혼돈스럽고 흐릿한 여건의 미혹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자세와 태도를 포기하지 않고 지킴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은 로마군인 천부장과는 그리스어로, 그리고 유대인 대중을 향해서는 히브리인의 말인 아람어로 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요. 유대인들에게 아람어로 자신의 간증을 고백하는 내용의 도입부입니다. 이 내용의 주된 특징은 바울이 지금 흥분한 상태의 유대인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폭행하며, 소리를 높이고 흥분해 있는 이유는 바로 유대인의 정체성인 율법과 성전의 거룩함을 훼손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과 유대인 군중 사이에는 서로가 적대할 이유보다, 공감하고 동질감을 느낄 요소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선 같은 말을 사용하는 동포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유대인이라는 것을 말하였지요. 또한 출신은 이방인의 지역이지만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곳은 예루살렘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엄격한 교육으로 유명한 랍비인 가멜리엘의 지도를 받은 사람이며, 그래서 매우 열성적인 율법주의자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를 4절에서 말하며, 그 증인들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자신의 정체와 행동을 진술함으로서 유대인들의 복음에 대한 그릇된 생각과 태도에 대해서 경각심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그렇게 열정을 다해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이 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그릇된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는 것도 말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단지 바울이 율법과 관습에 진심인 유대인 군중들과의 공감대를 갖기 위한 내용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유대인들 앞에서 진술하는 간증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런 모든 혈통, 율법준수, 관습, 그리고 열정적인 열심이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정답이 아닌, 오답 즉 틀린 답안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서론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바울이 유대인들과 공감하기 위해서 말하기를 시도한 것보다, 바울이 자신이 겪은 오류를 통해 열성적인 열정이나 열심히 부지런한 행동보다 올바른 방향과 태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어를 말 할 줄 아는 것이나, 히브리 인의 말을 할 줄 아는 것에 대해 자신의 스펙이나 실력, 그리고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열성적인 바리새인이었던 것과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이라는 스승 아래에서 공부했다는 것도 단순한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지요.
오히려 이런 가시적이고 육신적인 조건들을 내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신약의 다른 본문인 고후 11:1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고후 11:1)
이어지는 고후 11장에는 바울이 자신의 열심과 열정, 그리고 세속적인 관점에서의 혈통적인 우월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말하는 것은 곧 어리석은 자의 자랑이라며 역설적인 표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고후 11:17)
11장 전체의 내용을 다 읽어 드릴 수 없으니, 댁에서 꼭 읽어 보시길 바라는데요. 바울은 이처럼 자신의 육신적인 자랑거리는 곧 자신의 어리석은 면이라고 말하며, 오히려 사람들이 보기에 자랑하지 못할 만한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1:30)
세상에서의 자랑할 만한 것으로 든든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는 어리석은 것이라는 바울의 태도를 오늘 본문에서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오류와 오답을 공개함으로 유대인들의 오답과 오류에 대해서도 당당히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요. 제가 대학교에 한 번에 합격을 하지 못해서 입시학원을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학원에서 매우 유용한 공부방법을 배웠는데요. 바로 이른바 오답노트를 적는 것입니다. 오답노트란 수험생이 본 주요한 시험에서 틀린 것들만을 따로 모아 적는 노트인데요. 저는 그 노트를 전과목 다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오답노트를 적은 문제가 다음 시험에 다시 나왔을 때에는 틀림없이 정답을 맞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입시학원을 다니며 준비했던 그 해에 주님의 은혜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물론 고3 때의 성적보다 더 나은 성적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신 오답노트와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은 거룩한 책이라는 뜻인데요. 정작 그 내용을 보면 거룩하지 않는 부분들이 참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실패와 실수, 그리고 그들의 오류와 범죄에 대해서 가감없이 기록에 남겨 두고 있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살인자인 가인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혈통에도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손자이며,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어머니와 함께 공모하여 아버지와 쌍둥이 형을 속이는 파렴치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인내심을 늘 시험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기를 읽어보면 더욱 심각하지요. 특히 사사기를 읽으면서 과연 그 사사라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선별하신 사람들이 맞는가 할 정도로 심각한 결점투성이인 것을 답답해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구약은 하나님의 이야기만이 아닌, 오류와 범죄로 물든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구약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완벽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하는 신약성경에도 여전히 오류와 오답의 흔적들은 발견됩니다. 특히 고린도전후서를 읽어보면 당시 고린도에 있던 초기의 기독교회가 얼마나 심각한 분열과 다툼에 시달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환상 가운데 말씀하신 것을 받아 적은 요한계시록에도 교회답지 못한 교회, 성도답지 못한 성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 3:16)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의 사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쓰라고 사도 요한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입에서 토하여 버린다... 이 표현을 유기성 목사님은 “너, 밥맛이야...”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너무나 소름 끼치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보고 “얘, 너 보고 있은 참 밥맛이 떨어진다...” 그러면 정말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요?
과연 우리는 바울이 유대인에게 말하는 오류와 오답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회개하고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오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과 건물인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을 다하고 열성적으로 노력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지금 구원받은 자의 삶, 거듭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복음전도자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을 믿고 이렇게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 17:20)
이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예수님의 기도제목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통해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과 또 그 사람을 통해 복음 전해들은 그 다음 사람, 또 그 다음 사람, 또 그 다음 사람.... 이렇게 저와 여러분에게 이르기 까지 함께 복음 전하는 일에 하나가 된 이들 모두가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으로 하나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세상의 모두가 알기를 간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 세상 모두에게 전해져야 마침내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오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제가 존경하는 어떤 목사님은 이 구절을 놓고 과연 지금 복음이 세상에 놀랍게 전파되는 그 때인 것 같다는 고백을 하셨는데요. 왜냐하면 요즘 온라인으로 동시에 실시간 시차에 관계없이 강의도 하고 집회에도 접속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공감이 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꼭 우리 시대가 종말의 시대라고 문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 종말이 오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대에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말하였지만, 성경은 오늘 여기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열정적으로 노력하고, 열심을 다해서 성공하여도 그 방향에 오류가 있다면, 그 지향하는 바가 오답이라면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개해야 할 우리의 오답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오류는 무엇일까요? 각자에게 각자 삶의 자리가 다르고 성형과 맡겨진 사명이 다르기에 구체적인 오류도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이제부터 시작되는 인생의 첫날이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온 날의 마지막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요한계시록의 말씀 중에 한 구절을 통해 주님을 향해 깨어나길 소망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20-22)
앞서 말씀드린...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으면 토해 버리시겠다고 경고하신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하신 말씀인데요. 주님과 일상 가운데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것이 회개하여 자신을 지키는 일인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성공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성과를 위해 노력에 노력을 더하며, 심지어 영혼까지 끌어 모아 살았느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달팽이처럼 느리게 가더라도 홍수의 멸망에서 구원받을 노아의 방주를 향해 가는 바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른 길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서 일상생활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는 이 아름답고 올바른 길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득하게 하루에 하루만큼 걸어가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자신의 오류와 죄를 솔직히 고백하며 유대인들을 향해 회개할 것을 도전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돌이켜 회개하였고, 그래서 유대인들이 회개해야 할 오류와 죄는 바로 그릇된 방향의 열성과 열심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여전히 주님의 마음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열심을 다하고, 영혼까지 끌어다가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란 주님의 뜻을 향한 방향으로 삶의 모든 태도를 맞추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며 걷는 것입니다. 단 한 번 후회하며 돌이켰다고 계속해서 그 방향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죄가 가진 속성입니다. 올바른 방향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실력이나 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하고, 능력을 주셔야 합니다. 오직 지금도 나와 동행하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점검하며 오답노트를 적을 수 있을 때 그 은혜와 능력을 담아 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울의 실패담을 거울삼아 이번 한 주간도 매일 주님을 바라보며, 동행하는 행복한 일상을 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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