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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기 희곡 <고구마>(2) 앞에 이어 계속
(다시 멀리서 천둥 번개가 치는데…….노파가 방안으로 들어간다.
서서히 조명이 어두워진다. 잠시 빗소리 거세어진다.
희미한 천둥번개. (사이) 어둠에 잠긴 무대에 벽시계 소리가 들린다. 새벽 2시.
(사이) 서서히 어둠 속 무대에 조명이 들어온다. 희미한 조명 아래 뜨개질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노파가 의자에 앉아 졸고 있다. 머리가 아래로 푹 떨어져 꾸벅 꾸벅 졸던 노파. 한 순간 화들짝 잠을 깬다. 사내가 잠든 건넌방을 살피다가…….다시 꾸벅 꾸벅 졸기 시작한다. 졸고 있던 노파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노파는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와 함께 그녀를 잡고 있던 조명도 스르르 빠져 나간다.
무대는 다시 어둠에 잠긴다. 벽시계의 똑딱거리는 초침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이어진다. (긴 사이) 벽시계가 새벽 4시를 알린다. (사이)
다시 거실에 조명이 들어온다. 노파는 의자에 앉아 몸이 반쯤 기울어진 자세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사이) 멀리서 번쩍 천둥 번개가 치고 자욱한 빗소리가 들린다. (사이) 우측에서 잠에서 깨어난 사내가 양손에 고구마를 움켜잡고 조심조심 나온다. 잠 든 노파를 발견하고 흠칫 놀래 선다. 그는 노파가 깊은 잠에 빠져든 걸 확인하고 다시 움직인다. 잠 든 노파를 지나 출입문 쪽으로 움직이던 사내. 한 순간 몸을 세운다. 움켜잡았던 고구마를 그의 비에 젖은 외투 주머니로 바쁘게 집어넣는다. 다시 움직이려다가 몸을 세운다. 그는 주머니에서 볼펜과 종이를 꺼낸다. 벽 쪽으로 가더니 벽에다 종이를 붙이고 글씨를 써넣기 시작한다. 쓰기를 마친 사내가 몸을 돌린다. 조심조심 걸어서 잠든 노파 옆으로 온다. 방금 적은 쪽지를 살그머니 노파의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출입문 쪽으로 움직인다. 이때 잠에 빠졌던 노파가 잠시 몸을 비튼다. 놀랜 사내가 몸을 꼿꼿하게 세운다. 노파가 입을 쩝쩝거리더니…….또 다시 잠에 빠져든다. 사내는 무대를 빠져나간다.
(사이) 바깥에서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사내의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곧장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묻혀 버리고....... 다시 잠 든 노파를 잡고 있던 조명이 어둠에 묻혀 버린다. 이제 빗소리와 천둥소리도 사라진다. 다시 째깍거리며 돌아가는 초침소리가 이어진다. (긴 사이) 또 다시 어둠 속에 벽시계 소리가 들린다. 아침 8시. (긴 사이)
이윽고 어둠에 잠겼던 무대가 다시 밝아온다. 노파는 이직도 응접의자에 몸이 기운 자세로 잠이 들어 있다. 뒷면 침실 문이 열리며 노인이 하품을 하며 나온다. 그러다가 잠 든 노파를 발견하고 흠칫 놀래서 몸을 세운다)
영감 임자? 임자아?
노파 (화들짝 깨어나며).......?
영감 지금 뭘 하는 거야?
노파 (놀래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에이그 머니! (눈을 비비며) 내가 잠이 들었나.
영감 저, 저런 할망구 허군?
노파 (아직도 잠이 덜 깨어서) 어찌나 꿈자리가 시끄러운지…….
영감 잠 깨! 깨라니까!
노파 ......?
영감 아니, 지키라는 도둑놈은 안 지키고?
노파 (놀래서) 도둑놈?
영감 쉿! (가리키며) 저 방 그 자?
노파 그자라뇨, 영감?
영감 빌어먹을. 지난 밤 그 자 말이여.
(노인은 급히 무대 우측으로 간다)
노파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영감?
노인 (얼른 나오며) 없네.
노파 없다뇨? 어딜 가고?
노인 환장할.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노파 그럼 그자가 도망이라도 쳤단 말이에요?
노인 도망을 쳤는지 달아났는지-
노파 보이질 않아요?
노인 얼른 가봐. 그자가 달아났어.
노파 달아났다뇨? 영감. 그럼 그자가 우리 집 물건이라도 들고 간 거 아니우?
노인 그걸 난들 알 수가 있나?
노파 에고, 영감? 그걸 영감이 모르면?
노인 저런 환장할. 난들 임자한테 교댈 하고서 저 방에서 여직 자다가 나왔는데?
노파 그럼 어서 살펴봐요. 그 자요? (급히 우측으로 움직이려는데 탁자 위의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노인 가도 소용없어. 그잔 가버렸어. 방이 텅 비었다니까.
노파 에고, 그럼 영감?
노인 내가 다시 저 방을 살펴볼 테니까. 임잔 다른 방을 살펴봐. 행여 그자가 뭘 훔쳐갔는지?
(노인 다시 우측으로 나간다. 노파는 서둘러 거실 안을 살핀다. 그러다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발견한다. 급히 집어 든다)
노파 에고, 이게 뭐야? (입을 오물거리며 남겨 논 글자를 읽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에고, 이게 뭔 소리야? 탁자 위에 돈을 두고 갔다니? (탁자 위에 눈이 간다. 노인이 읽던 신문지 위에 놓인 몇 장의 지폐를 발견하고 펄쩍 뛴다. 급히 집어 든다)
에구머니, 이게 웬 돈이야? 웬 돈이냐구, 영감?!
영감 (우측에서 들어오면서) 저 방은 멀쩡한데. 혹시 방안의 금붙이라도 들고 가지 않았는지......(손에 돈을 들고 있는 노파를 발견하고는) 그게 뭐야?
노파 (멀뚱하니) 글쎄, 영감? 이 쪽지랑 돈이 여기 놓였지 뭐우?
영감 뭣이라?
노파 이 돈이요. (흔들어 보이며) 그자가 두고 간 모양이우, 영감?
영감 그 자라니?
노파 간밤 그 사내, 영감? 이렇게 쪽지까지?
영감 어디 봐. (종이를 낚아채서 읽는다) 영감님. 하룻밤 신세를 져서 참으로 감사 합니다. 제가 가는 길이 바빠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일찍 갑니다. 참, 제가 허기가 져서 저 방에 있는 고구마를 좀 가져갑니다. 몇 푼 되지 않으나 이 돈으로 고구마 값과 신세진 빚을 대신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노파 에고, 저런.
영감 그럼 그렇지. 첨부터 내가 그자를 나쁘게 보지 않았어.
노파 그건 나도 마찬가지우.
영감 아냐. 그렇지도 않아. 쥔 허락 없이 남의 물건을 들고가면 그건 도둑놈이지.
노파 돈 주고 가지 않았우. 여기.
영감 허긴. 이런 쪽지까지 남기고 간걸 보면 무례한은 아녀.
노파 영감? 우리가 너무 그잘 의심했던 건 아니우?
영감 허. 고구마까지 들고 간 걸 보면 얼마나 허기가 졌기에?
노파 그러게 말이우. 혹시 그자가?
영감 왜?
노파 그 달아났다는 은행 강도 아닐까?
영감 생긴 꼴로 봐선 그만한 인물도 못 돼.
노파 허긴 내 생각도 그러우.
(이때 바깥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 노부부 긴장한다)
이장 (소리) 계십니까? 동네 이장입니다.
노파 오매야, 이장 공 씨가 어떻게 이런 이른 시간에?
노인 그러게. (부리나케 나가며) 들어오시게. 문 열렸을 테니까.
(노인 나가는데, 동네 이장이 신문을 들고 들어온다)
이장 안녕들 허십니까?
영감 허허, 이장께서 새벽부터 웬일이오?
이장 아, 예. 이미 신문이나 텔레비전으로 얘길 들었겠지만?
영감 뭔 얘길?
이장 그 도망친 은행 강도 말씀입니다.
노파 에고, 은행 강도가?
이장 방금 면소 김 순경이 다녀갔습니다.
영감 김 순경이 왜?
이장 혹시 수상한 자가 나타나지 않았나 허고?
부부 수상한 자?
이장 예. 그자가 무기까지 소지하고 분명 이 근철 배회할지도 모른다는 얘깁니다.
영감 이 근철?
이장 무기까지 소지한 자가 뭔 짓을 못하겠습니까.
영감 그야 그렇지.
이장 그러니 각별히 조심들 허십시오.
노파 에고, 그럼 영감?
영감 글쎄, 가만 좀 있어.
노파 그럼 혹시 간밤 그 자가?
이장 간밤 그자라뇨?
영감 흠, 실은 간밤 우중에 사람이 하나 다녀갔네.
이장 사람이 다녀가요?
영감 비에 흠씬 젖어 저 바깥문을 두드리기에 나가봤더니?
이장 (신문을 내보이며) 그 자 모습이 혹시 이렇게 생겼지 않았습니까?
영감 그러고 보니?
노파 오매야, 아니어. 생기긴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영감 허긴 나도 맘을 놓고 그 잘 받아들였지.
이장 받아 들이다뇨, 어떻게?
영감 밤중에 하룻밤 유하자는 걸 내쫓을 수도 없고.
이장 영감님?
영감 이 자가 또 현관에 붙은 십자갈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허는 바람에?
이장 그잘 집안에 받아 들였군요.
영감 그렇다니까. 근데 그 자가 새벽같이 가버렸어.
이장 가버리다뇨? 어디로?
영감 그거야 모르지.
노파 이렇게 돈까지 놓고 갔다오.
이장 돈이라뇨? 웬 돈?
영감 그러게. 저 방 고구마 자루에서 고구말 훔쳐가면서, 허. 양심은 있었던지 저렇게 탁자 위에 쪽지와 돈을 두고 갔구먼.
이장 쪽지라뇨?
노파 (흔들어 보이며) 이것 보시우.
이장 (낚아채서 급히 읽어본다)
영감 어쪄? 은행 강도 같진 않잖아?
이장 글쎄요. 그밖에 다른 물건은?
영감 가져 간 것이 없어.
이장 그럼 전화로 곧장 파출소로 연락을 주셔야죠.
영감 연락을 주다니. 아, 지나가는 길손이 하룻밤 유하고 간 걸.
이장 그래도 고구마까지 훔쳐가지 않았습니까?
노파 여기 돈까지 주고 갔다니까.
이장 그래도 경찰엔 알려야 하는 겁니다.
영감 그걸 누가 알았나?
이장 허허, 세상이 지금 그놈 하나로 발칵 뒤집혔는데.
노파 그자가 은행 강도라는 증거라도 있우?
이장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이거 이럴 때가 아니네.
영감 그럼?
이장 가도 멀리가진 않았을 테니까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노파 에구머니, 그럼?
이장 나가서 빨리 김 순경부터 불러야겠네. (서둘러 나간다)
노파 에고, 영감?
영감 방정 떨지 말고 가만 좀?
노파 그자가 틀림없이-
영감 그 은행 강도라는 증거가 어디 있어?
노파 아니면 왜 고구마까지?
영감 그거야 배가 고프니까-
노파 그럼 라면이라도 끓여 달래지?
영감 어허, 양심이 있지. 남의 집에 유하면서 어떻게?
노파 훔쳐가진 말아야죠?
영감 돈 줬잖아, 돈.
노파 허긴?
영감 그러니 가만 좀 있어. 나도 생각 좀 하게.
노파 뭔?
영감 그자가 신문에 있는 그자하곤 닮진 않았었지?
노파 그거야 밤중에 언뜻 본 얼굴인데?
영감 글쎄, 우리가 잘못 봤을지도 모르겠네.
노파 십중팔구 그 자가 그 은행 강도 놈 같소.
영감 허허허, 그렇담 이걸 어쩐다?
노파 에고, 영감?
영감 아녀. 내가 면소 파출소를 찾아가 이실직고를 해야겠어.
노파 그래도 그자가 이 신문 속의 그자가 아니라면?
영감 그거야 모르지. 그 자 말마따나 그새 변장을 헐 수도 있고.
노파 변장?
영감 어쨌든 그놈이 그 은행 강도라면…….이거 문제가 심각하네.
노파 심각해요, 왜요?
영감 어허, 우린 범인 은익 죄가 된단 말이야.
노파 그럼 우린?
영감 우리까지 감옥에 갈 판이여.
노파 에고, 이를 어째. 그럼 영감?
영감 이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경찰에 알려야 혀.
노파 그럼 이 길로?
영감 면소 파출소까지 갈 것도 없어.
노파 그럼?
영감 전화 둬서 뭣해. 여기서 전화 걸면 되지.
노파 그래요. 전화부터 걸어요.
영감 허허, 이런 놈의. (탁자 위의 전화기를 끌어당겨 다이얼을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여보시오? (사이) 면소 파출소 맞죠?
노파 에고, 맞지 않고?
영감 (노파에게) 가만 좀 있어! (수화기에) 아, 아니오. 김 순경한테 한 소리가 아니고. 실은 신문에 난 그 은행 강도 놈이? (사이) 뭐? 어허, 내 말마저 들어요. 간밤에 내가 실수로 저 건넌방에 재워서 보냈단 말씀이야. 뭐야? 그 잘 잡았다고? 어디서? 뭐? 부산에서?
노파 에고, 부산?
영감 쉿, 언제? 조금 전 7시 40분에 잡았다고 텔레비전 뉴스로 나왔다고? 아니, 그럼 간밤 그 자가 날개가 달렸나? 여기서 부산까지 찰 타도 6시간은 족히 걸릴 텐데? 뭐요? 잡고 보니 남장 여인이었다고? 그럼, 간밤 그자가 여자였단 말이여?
노파 에고?
영감 뭐? 그자가 아니고? (사이) 부두까지 가서 밀항선을 타려고 했다고? 그럼 우리 집 그자는 누구야? 뭐? 지나가던 과객이었다고? 그럼 그렇지! 어째 첨부터 도둑놈은 아니더라니까. 그럼 됐소, 김 순경. 수고 허시오. (쾅 수화길 내리면서) 원, 제기랄.
노파 왜요, 영감?
영감 방금 들었잖아. 밀항선 타려던 강도는 이미 잡았대.
노파 그럼 우리 집 그 자는?
영감 일자릴 찾아 저 시내로 찾아가던 과객이었어. 그런 걸 두고서, 쯧쯧.
이장 허허허, 참.
노파 그러게 내가 뭐랬우? 사람이 사람을 의심 허면 죄 받아요, 영감?
영감 망할 놈의 할망구. 내 할 소릴 사돈이 허고 자빠졌네. (낚아채며) 그 돈 이리 내! 허, 그 자도 미쳤지. 고구마 서너 개 가져가면서 뭔 돈을 이렇게, 허.
노파 에고, 누가 아니우, 영감?
이장 허허허, 그럼 전 갑니다.
영감 잘 가시게. 아침부터 수고 했어.
이장 (나가면서) 수고는요, 허허허.
영감 (허탈하게) 원, 세상에.
(경쾌한 음악 울려 퍼지면서 조명이 나간다)
- 막 -
(창녕문학 2011년 35집에 수록)
성준기 창녕군 대지면에서 출생했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당선(1980), 한국일보신춘문예 희곡 당선(1982), KBS 공모 드라마에 당선(1982)했다. 삼성문화재단 도의문화 저작상(1982), 대한민국 문학상(1988), 한국희곡문학상(1994)을 수상했다. 희곡집 도처에 춘풍 외 다수가 있으며 한국희곡작가협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희곡분과 회장, 서대문 문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연극협회 극작분과 위원, 한국희곡작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창녕문인협회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