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어)
원폭이 나가사키에 투하되던 1945년 8월 9일 그 시간에 다카시의 집에는 아내 미도리 뿐이었고 아이들은 할머니 집에 있었으며 다카시는 대학병원에 있었다.
오전 11시 2분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섬광이 번쩍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굉음과 강한 바람에 이어 대학병원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져 내렸다.
아이들은 나가사키의 언덕 위 할머니 집에서 아주 큰 버섯구름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구름은 점점 커졌다. 다카시는 무너진 건물에 깔려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간신히 연구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본 것은 처참한 광경들뿐이었다.
주변에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초록색이던 산이 적갈색으로 변해버렸다. 낮인데 밖은 깜깜하고 휘익 휘익 소리내며 바람이 불고 있었고 쓰레기 부스러기들이 공중에 날고 있었다.
땅 위에는 많은 사람이 쓰러져 있었으나 그 대부분이 죽어 있었다. 다카시는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도 살아남은 병원 사람들과 부상자를 도왔다. 심한 화상(火傷)을 입은 사람과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병원 안으로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원자폭탄의 위력은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부상도, 화상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심한 것이었다.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고 불은 점점 번져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모두 타 죽어 버리겠다!” 다카시는 부상자를 안전한 산 위로 가도록 했다. 약도 도구도 타버리고 부서져서 거의 없었다. 의사나 간호사도 턱없이 모자랐다. 부상자는 계속해서 죽어갔다.
상처를 입지 않았더라도 원자탄 방사선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워하면서 죽어갔다. 그것은 그야말로 세상의 지옥이었다.
다카시는 백혈병인데 게다가 자신도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있으면서도 쉬지 않고 사람들을 계속해서 치료했다. 몇 번이나 쓰러졌지만 다시 일어나서 사람들을 보살폈다. 주변 사람들이 좀 쉬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해도 듣지 않았다.
3일 후에야 다카시는 겨우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주변은 전부 타버려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천주교회 입구의 벽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주위의 건물들은 다 무너졌지만 천주교회 벽은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카시는 집 부엌 바닥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불에 타서 부서진 아내 미도리의 묵주(默珠)였다.
하지만 다카시에게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많은 환자와 부상자가 그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카시는 마을에서 마을로 며칠이나 걸어 다니며 환자와 부상자를 도와주었다.
그의 몸은 지나친 과로에 지쳐 어느 날 쓰러져 죽은 것처럼 계속 잠에 빠졌다. 모두가 이대로 다카시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카시는 일주일 후 일어났다. 그때 모두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다.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2개월 전에 “앞으로 3년이면 죽는다.”는 말을 들은 그는 살아 있고 건강했던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갔다.
평화가 돌아왔으나 원자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그 후 많은 사람이 원폭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백혈병인 다카시도 원폭 후유증에 걸렸지만 그런 몸이라도 일을 계속할 결심을 했다.
그는 방사선의학 의사였기 때문에 원폭 후유증의 치료를 할 수 있었으며 본인도 피폭자의 한 사람이므로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연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폭으로 인해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슬퍼하는지! 전쟁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 다카시의 한탄이고 원망이었다.
원폭으로 건물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대학은 이웃 시(市)로 옮겨졌다. 다카시는 대학 근처에 사는 것이 좋겠다고 주변 사람이 말했으나 우라가미(浦上)에서 계속 살았다.
우라가미에 있으면 원폭 후 우라가미 마을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고 싶었고, 그리고 마을이랑 교회를 전쟁 전과 똑같이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카시의 몸 상태는 점점 나빠져 갔다. 걷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우라가미에서 붐비는 기차를 타고 매일 대학으로 출근했다.
수업과 연구 외에 잡지와 신문 기사를 쓰거나 학생들을 보살피거나 하며 쉴 틈도 없었다. 또한 신자(信者)들과 원폭으로 떨어진 교회의 종(鐘)을 고쳤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 소리가 온 마을에 퍼졌을 때 사람들은 너무나 기뻐했다. 1946년 다카시는 나가사키의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해 8월 그 원폭의 날부터 1년 후, 그는 “나가사키의 종(長崎の鐘)”라는 책을 저술 출판했다. 이 책은 원폭이 떨어진 때의 일이며, 원자폭탄과 피폭의 후유증에 대해서 누구라도 알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쓴 것으로 많은 사람에게 읽혀졌고, 여러 나라의 말로 번역되어 해외로도 퍼져나갔다. 국내에서는 노래와 연극과 영화도 만들어져 많은 일본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1946년이 끝날 무렵 다카시는 마침내 일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1948년 3월 교회의 신자들이 다카시를 위해 교회 근처에 새로운 집을 지어 주었다. 작은 방이 하나뿐인 집이었다. 다카시는 그곳에서 누운 채 대학과 교회의 일을 했다.
다카시는 그 집에 “뇨고도우(如己堂)” 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如己愛人(뇨고우아이진 : 네 몸처럼 남을 사랑하라)” 이라는 말에서 따온 이름인데, 이는 성서(聖書) 마태복음과 레위기 등에 나오는 가르침으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우리나라에서는 ‘愛人如己’로 표시함)
아직 열한 살의 어린 아들 마코토(誠一)과 여섯 살난 딸 가와노(茅乃)가 아버지를 보살폈다. 그런 와병에도 다카시는 계속해서 원폭에 대해서 책과 글을 써서 평화의 중요함을 계속 세상에 전했다. 책 속에는 자식들과 자신의 생활도 쓰여 있었다. 엄마가 없는 마코토와 가야노 남매를 다카시는 언제나 가엽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카시는 출판한 「나가사키의 종」이란 책과 투고한 글들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병든 사람들과 부모가 죽은 아이들을 위해서 사용하거나 새로운 교회를 짓는 일에 사용했다.
그리고 원폭으로 인해 타버린 마을에 나무를 심는 일에 사용했다. 그는 무거운 병으로 고생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다카시가 한 일에 감동한 많은 사람이 그를 만나러 왔다.
다카시는 어떤 사람이라도 만나서 여러 가지 상담에 응했고, 일본 전역에서 오는 편지에도 한 통 한 통 답장을 썼다. 일본 천황(天皇)과 로마 교황청 사람도 만나러 왔으며, 미국의 장애인 교육자 헬렌 켈러 여사가 왔을 때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기뻐했다.
교회에서 그를 만난 사람은 어떤 일에도 꺾이지 않는 다카시의 강함에 용기를 받았다고 했다. 1950년 가을, 고열이 나고 열이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다카시는 글을 계속해서 썼지만 51년 4월에는 결국 펜을 들지 못하게 되었고, 5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앞으로 3년이면 죽는다.”라는 말을 들은 지 6년. 43세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일본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약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운집(雲集), 다카시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리고 우라카미 천주교회의 종 – 나가사키의 종 – 이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우라카미에는 다카시의 집 “[如己堂(뇨고도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옆에는 기념관도 세워졌다. 그곳에는 다카시의 책과 사진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8월 6일은 히로시마, 9일은 나가사키의 원폭 기념일인데, 매년 이날에는 히로시마에도 나가사키에도 온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평화를 기원한다.
『진정한 평화는 어려운 회의(會議)나 사상(思想)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에서 태어난다.』 - 다카시의 글 ‘사랑스런 아이야!’ 중에서-.
[이 글은 하시쓰메 아키코(橋爪 明子)씨의 글을 참고하여 구성한 것임]
▷ 사족(蛇足)으로 이 Royal Lily호에 승선 중, 내 개인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하나 있었다. 평생 위스키와 결별한 사건이다. 처녀출항으로 2월 1일 나가사키항을 출항하여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 피어스항으로 항해하던 2월 16일 밤의 일이다. 일기예보와 주위의 기상도를 보니 밤사이에는 변화가 없이 잔잔한 해상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듯 했다.
통상 태평양을 동서로 가로질러 항해할 때, 서행(西行), 즉 미국쪽에서 동양으로 올 때는 시차(時差) 적응이 쉬운데 반대 즉, 동행(東行) 할 때는 시차 적응이 쉽지 않다. 더구나 신조한 Royal Lily호는 선속이 시속 22 knot로 항주했으니 거의 매일 시간변경을 해야 했기에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인수(引受) 전의 과로(過勞)에다 출항후에도 신조선에 대한 과민반응, 연이어 잦은 선내 시간변경으로 며칠간을 불면에 시달리다 보니 괴롭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고심, 연구(?)한 것이 당시로서는 최고급이었던 위스키 ‘조니워카’ 였다. 알콜의 힘을 빌어 푹 뻗어 보자는 발상이었다. 미리 조리장(調理長)에게 오더하여 안주를 내 사무실 냉장고에 넣어두라고 했다.
저녁 후 두어 시간이 시간이 흐른 뒤, 준비해둔 말랑하게 잘 구워진 소고기 Beef Steak를 안주 삼아 혼자서 진한 갈색의 독한 액체를 믹스없이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거의 반병은 마신 듯 했다. 바로 침실에 그냥 누웠다. 덕분에 세상모르게 골아 떨어지기는 했다.
그런데 새벽 몇 시나 됐을까? 눈을 떠보니 엉망진창 바로 그것이었다. 토(吐)한 것이 침대에 온통 떡칠갑이 되어 있었다. 침대뿐만이 아니고 내 머리에도 발가락에까지 묻었다. 입으로 토했는데, 발가락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머리에 묻었을까. 도대체가 어떻게 되었길레 이 모양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다. 그래도 정신은 번쩍 들었다. 침대 카버 채로 몽땅 벗겨 욕탕에 넣고 더운물로 채워 밟아 놓고 적당히 씻고는 사롱보이를 불렀다. 난장판을 본 그의 눈이 둥그래진다. 아무말도 말라고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아무도 모르게 빨아 말리라고 밀명(密命)했다. 반죽음의 혼란상태였던가 보다.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었던 것을….
‘부활(復活)의 날’로 기억해두기로 했다. 여하튼 그 날은 종일을 굶었다. 모두들 의아해 했다. 그럴 수밖에…. 그 바쁜 인수(引受)과정은 물론 평소 식사시간 한 번 거르는 적이 없던 내가 종일을 먹지 않고 두문 불출하고 있었으니!
Saloon(사관식당)에서 모두가 Saloon boy에게 물었음은 당연했다. 미리 그에게 ‘몸살났다’고 하라고 일러두었기에 소문없이 지나가긴 했지만, 그 후로 위스키와는 완전 결별했다. 지금도 소주 한 병은 거뜬히 마셔도 위스키 한 잔은 사절이다. 헐헐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