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 대신 죽은 신숭겸을 기린 지묘사가 있던 대구 지묘동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智妙洞)은 법정동으로서의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공산동으로 불린다.
자연마을로는 가사골·동변(東邊)·새터, 서변(西邊) 등이 있으며 그 외의 자연지명으로는 개찻골·다릿골 등의 골짜기, 꼬부랑재·나팔재 등의 고개, 왕산(王山) 등의 산이 있다.
지묘동(智妙洞)이라는 이름은 지묘사(智妙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묘사가 건립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후삼국 시대의 이야기다.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로 진격했다.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고려의 원병을 청했으나, 고려군이 오기도 전에 경주는 함락되었으며 견훤의 압력에 경애왕은 결국 자결을 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려 왕건은 고려의 정예 군사 5천 명을 끌고서 직접 경주로 출격하였다.
뒤늦게 신라에 도착한 왕건은 견훤의 군사를 치기 위하기 이들이 돌아가는 길목인 팔공산[대구광역시와 영천시, 군위군 부계면(缶溪面), 칠곡군 가산면(架山面)에 걸쳐 있는 산] 동수(桐藪)라는 지역에 군사를 대기시켰다.
이 때 견훤의 군사는 경주에서 약탈한 보물을 수레에 가득 싣고 포로로 붙잡은 재상이며 관리와 기술자 들을 끌고서 후백제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공산 동수 지역에 이르렀을 때 견훤의 군사는 기다리고 있던 왕건 군사들의 공격을 받았다.
곧 둘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고 밀고 밀리는 접전 끝에 오히려 먼저 공격을 한 왕건의 군사들이 견훤의 군사들에 포위되기에 이른다.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어지면서 왕건의 목숨마저 위태로워졌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앞으로 나선 것은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했던 신숭겸이었다.
그는 주군인 왕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계략을 내놓았다.
왕건과 옷을 바꾸어 입고 앞서 전투를 지휘하며 왕건인 척 후백제군을 속이자는 것이었다.
신숭겸의 의견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두려움 없이 후백제군을 맞았다.
그러나 결국 현재 표충사[表忠祠,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있는 1607년 건립된 신숭겸을 추모하기 위한 사우] 앞 순절단 자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신숭겸이 죽자, 견훤의 군사들은 그가 왕건인 줄 알고 머리를 잘라 갔다.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왕건은 무사히 탈출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싸움을 공산전투(公山戰鬪)라고 부른다.
그 후, 본진으로 다시 돌아온 왕건은 신숭겸의 시신을 찾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머리가 없어 어느 시신이 신숭겸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왼쪽 발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을 보고서야 그 시신이 신숭겸인 줄 알았다고 한다.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
그는 신숭겸의 머리를 나무로 깎아 만들어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주었으며, 그의 집안에는 후한 보답을 함으로써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했다.
신숭겸의 동생인 신능길과 아들 신보장에게 원윤(元尹)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또한 신숭겸이 전사했던 장소에 지묘사(智妙寺)와 그 주변에 미리사(美理寺)라는 절을 지어 그 죽음을 추모했다.
지묘사가 있던 자리에 현재의 표충사가 세워졌다.
당시 세워진 지묘사에서 ‘지묘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