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기억해서 뭘 하나?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현재와 미래만 우리에게 있을 뿐이라고 호들갑을 떤다. 과거가 지나가서 오지 않는 폐물일까? 과거 없이 미래가 있다고 여기는가? 새로운 환경이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가? 사람이 기계와 IT처럼 변한다고 여기는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인간은 언제나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유명한 영국 역사 철학자인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는 인류가 도전(chaiienge)과 응전(responce)의 역사를 쓴다고 주장했다. 역사는 진보하지 않고 도전과 응전으로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간다고 한다. 언뜻 보면, 철학자 헤겔의 원리를 빌려온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통해 인간은 뭔가를 배워서 새롭게 여겨지는 것에 대해 물러서지 말고 도전하고 반응해야 한다고 한다. 그 반응에 따라 미래의 향방은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세계 역사를 바꿀 수도 없고, 자신의 역사도 헤아리지도 못한다. 원리를 찾은 것 같지만 일반적일 뿐 개인적이지 않다. 대체로 맞을 수 있지만 꼭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역사와 삶을 통해 배운 인생철학이다. 일반의 원리를 개인에게 적응시킬 때는 유의해야 한다. 보편의 원리나 개인의 원리가 돼선 안 된다. 인가은 간교해서 어떤 경우엔 보편의 원리나 개인의 원리를 재간 부리면서 적절하게 사용한다. 재주부리다간 큰일 당한다. 세상, 지구, 태양계의 행성을 다원 우주 중 별 것도 아니다. 초극세먼지에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은 더욱 그렇다. 우주나 보편의 원리를 안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이것을 안다고 하여 일반인에게 적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모른다고 하여 제멋대로 자의로 사는 것은 더 큰 문제를 낳고 만다. 보편의 원리나 일반의 원리가 어떻게 충돌하며 발전하는지를 모르면 제멋대로 살아가는 이성 없는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세상은 뭔가 그 중심이 뭣인지 모르지만 기후의 변화라고 정치 아치들이 설치지만 실제는 모르는 우주의 궤도로 움직이고 있기에 예측 불허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란 가시적 도전과 응전 외에는 없기에 내뱉는 소리이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subsistence)이지만 하찮은 실존(existence)이다. 전자는 개인이지만 후자는 공통이다. 전자는 본체이고, 후자는 본질이다. 현상적 관심을 갖는 것은 신앙이다.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인간을 위해 만든 가공된 신앙이다. 존재는 하나님 측면이고, 실존은 인간 측면이다. 전자는 영원이고, 후자는 시간이다. 구약성경의 시제는 완료형과 미완료형이다.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완료와 미완료이다. 조선인의 사고에는 이 개념이나 사고방식이 없다. 성경의 사고방식을 갖는 것은 중생의 경험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바꾸기 어렵다. 태어나서 현재까지 굳어진 굳은 버릇을 무엇으로 바꾼다는 것인가? 존재를 아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아니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 파악에 열정을 가지지 않는다. 실존에서 존재파악으로 향하는 것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명시적 자세이다. 완료는 시간이 아니다. 언뜻 보면, 완료는 과거와 유사하다. 하지만 완료는 사실에 근거하고, 과거는 시간에 근거한다. 문장에 시간이 더해지면 과거 시제가 되고, 시간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면 완료시제가 된다. 하나님은 언제든 완료이고, 인간은 미완료이다. 완료가 과거처럼, 미완료가 미래처럼 보일뿐이다. 하나님에게 시간을 대입시키면 인간을 위한 고인 물에 불과하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물건 간다. 시간에 관심을 갖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알 바 아니라고 딱 자라라 말하고 사실에 충실한 것을 권한다. 사실에, 시간에 둘 중에 따라 신앙과 신념이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