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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의현 시인께서 시집 [ 물푸레나무]를 상재하셨다.
2024년 도서출판 <청어>에서 나왔다.
홍의현시인은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강원문협이사이다.
강원도 고성출생으로 고상문인협회 지부장을 지냈다.
홍의현 작품 평설문
사물의 촉수가 닿는 감성과의 교류
남진원(시인, 문학평론가)
1. 글을 열면서
과묵하고 속정이 많은 분이 홍의현 시인이다. 홍의현 시인은 한국문인협회 고성지부장으로 고장의 지역 문학 발전을 위해 부단히 힘쓰고 있다. 이번에 시집을 낸다고 내게 작품을 보내왔다. 발문을 써 달라는 문자를 받았다. 그의 전 시편을 읽어 보았다. 생각이 닿는 몇 편의 작품을 위주로 글을 썼다. 그러나 어찌 그의 문학 세계를 다 말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사물의 촉수가 닿는 그의 감성적 자유는 내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이제 그 일부나마 나름대로 나타내어 보았다. 그의 시집에 수록된 많은 작품들은 다양한 삶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애독과 감성적인 교류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2. 시속에 깃든 자연 철학성
홍의현 시인은 대부분 시의 소재를 자연 사물과 관계 속에서 취하고 있었다. 식물인 나무나 무생물인 별 같은 사물의 촉수를 느낀다.. 자연이 소재가 되고 자연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체득된 이미지들이 읽는 나를 즐겁게 하였다. 홍의현 시인의 시 작품 전편에 흐르는 기류는 이런 자연 철학성과 원형적 눈물 등이 결합되어 있다고 보여졌다. .
나무가 운다
서서도 울고 엎어져서도 운다
나무가 울어 꽃들이 피고
아픈 꽃잎을 열어
고적한 별에서도 향기가 난다
- ‘나무가 운다’ 전문 -
‘나무가 운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또 자연물의 눈물이 뜻하는 건 무얼까. 짧은 시 형식이지만 무척이나 크고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지 않은가. 일상성의 파괴가 가져오는 이런 물음은 현재 지구의 위기와도 관계가 깊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홍의현 시인의 독특한 감성법이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물음에 앞서서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물음이 더 절실하다. 시인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感性)의 표출 방법으로 살아간다. 독특한 감성의 표출방법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시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시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성이란 인식 능력의 일부인데, 사물로부터 감각적 표상을 만나게 되는 지각의 인식능력을 의미한다. 노인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은 분들이다. 나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살아온 삶이 축적된 하나의 기호체계이다. 노인은 젊은이들보다는 오래 살아온 부류이다. 그 중에는 사람의 인상을 보고도 그 사람이 살아온 내력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다. 사물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이 이치적으로 따져서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감성적 능력이 있다. 노인 중에는 그런 지각능력이 뛰어난 분이 있다. 살아오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각인지 능력이 생성된 것이리라.
나는 얼마 전에 어느 병원 환자들의 병실에서 유난히 말이 많은 한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을 보고 대번에 ‘이 분은 전에 운전을 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에 그 분이 직업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는데 도로공사에서 운전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때 당시의 내 나이가 70에 가까운 노인이 되고 보니 사람을 보면, 자연히 전에 살던 모습이 대강 짐작이 되는 지각 능력이 생겼던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지각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능력을 감성적으로 표출을 잘하는 사람이 작가이거나 예술가의 부류이다.
무엇보다 그의 시에서 감성적 지각 능력으로 닿는 가장 큰 힘은 자연과 인간의 자연스런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정서적인 씨줄과 날줄이다.
그의 시는 자연과의 접목으로 시적 에스프리의 힘을 가세하였다. 동적이미지에서 뿜어내는 것은 매우 정갈한 정적이미지로 변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표현법으로 하여 감동의 여울을 만드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건 시인 자신만의 독특한 안정감이기도 하였다.
겨울 골짜기에
샛바람이 찰랑거린다
계곡을 타고 내리는 물소리들이
자꾸 가지 위로 올라앉는다
갈증이 난 새순들도 여기저기 손을 뻗어
물들을 길어올린다
갯버들이 꽃을 피운다
얼레지도 연분홍 치마를 걷어올리고
진달래는 산끝에서 달큰해진 햇빛들과
눈맞춤을 하느라 부산스럽다
세상이 그렇게 계절을 넘듯
냉막해진 가슴 한쪽 언덕에
꽃송이 하나 둘 피우고 산들
그대 어찌 고맙지 않으랴
- ‘봄은 꽃이다’ 전문 -
시적 감성이 풍요로운 계절은 봄이다. 혼의현 시인의 작품에서 특히, ‘봄’이라는 계절에 대한 탄력성(레셔리언씨 Resiliency)을 만날 수 있었다. 봄은 모든 사물에게 탄력성을 제공한다. 새들은 천공 속에서 휘파람을 불며 날아다니고 새싹은 땅을 뚫고 용솟음치듯 올라온다. 인간 또한 여기서 다를 바가 없다.
인생의 젊음도 비유하면 봄(spring)이다. 봄의 특징은 탄력성이다. 봄이 되면 마음부터 ‘봄’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들뜨기도 한다.
봄이란 어찌 보면 화려해 보여도 화려함은 하나의 낭만이고 꿈일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이 현실화하지 않으면 따듯함보다는 쓸쓸함과 냉막함에 접하게 되기도 한다. 겨울이 시작되면 그 차가움은 더하다. 산야는 냉막함 속에 푹 잠긴다.. 시인은 그런 겨울 산야의 냉막해진 언덕을 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생명감 있는 사물들과 접한다. 그런 일상의 작은 일들은, 시인을 조용하고 편한 곳으로 데려가고 있는 듯 싶었다.
현실이 힘들고 냉혹하면 할수록 자연에서 느끼는 따뜻함은 든든한 지원군이다. 봄이 오면 꽃송이 하나 둘 산야에 피어나듯이 시인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꽃송이 같은 미감이 위로와 기쁨을 주지 않을까. 조용하고 평범해 보이는 사물과의 따뜻한 만남이 조심스러울 정도로 정갈하다.
이 모습은 여러 작품에서 환기의 역동성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바람이 분다
풀잎들이 손짓을 하고
단단하지 못한 나무들이 휘청거린다
풀들이 일어서고
배들은 푸른 항해의 꿈을 꾸듯 너울거리고
그대는 떠날 채비를 한다
종일 거센 바람이 불어와
갈 곳 몰라 울고 선 풀잎과 나무들에게
떠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 ‘바람’ 전문 -
바람과 풀잎과 나무들의 관계 설정이 특별한 의미를 안겨준다. 그들은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존재들이다. 3인칭 관찰자로 있는 ‘그대’의 이별에 대한 준비성은 시적 간격을 높여 긴장감을 돋보이게 하였다. 또한 시의 구조적 생동감이 바람에 의한 길의 방향성으로 안정감을 보이기도 하였다.
3.컨센트리(concentriyy)를 통한 시적 에너지
시인의 눈은 예리하면서도 침착하다. 감성은 욕망에 의해 자연스레 표출되기도 하는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자신이 쓰는 시가 자신의 욕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욕망은 감성을 끌어내는 데 아주 중요한 도구이다. 우리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니, 현대인들은 정서적인 또는 정신적인 꿈을 갖는 대신 많은 물질에 대한 소유를 원한다. 물질이 주는 결과는 가공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인은 안정 대신 초조와 불안을 선택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시 쓰기일 수도 있다. 시는 물론 어떤 목적을 위해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시가 주는 다양한 효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이것은 생각지 못한 기대를 준다. 앞의 시 ‘바람’에서도 그렇다.. 여기에 더해 인간은 누구나 상승적 또는 하강적 욕구인 수직적 오르내림의 욕구가 잠재되어있다. 홍의현 시인의 작품 ‘별’에도 별을 통한 상승과 하강의 수직적 욕구가 조화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별
기어코 떨어졌다
앞뜰 우물과 대숲 너머를
떨어져 구르고 흘러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평상에 앉아
밤새 나와 울먹였다
백년은 살았을 느티나무 가지마다 새겨졌을 이들이
그 아래 시리도록 하얗게 찍혀대던 발자국들이 그리워서
그러면 하나의 별이 가슴으로 떨어지고
또 하나의 별이 하늘로 가는
남루한 평상 위의 나뭇가지 너머의 무수한 별들은
우주의 여리고 어두운 곳을 순회하는
눈빛 밝은 꽃송이들
멀리 떠나간 이들의 뒤늦은 손짓이다
시인은 자신의 자유에 의해서만 책임질 의무를 갖는다. 밤의 동굴에서 본래의 모습을 찾는 것도 시인의 자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시인이 미나리처럼 뿌리를 내리는 세상은 아름답고 정갈한 세상이다.
한편의 시가 상징적인 의미를 두지 않아도 감정의 여울목에서 듣게 되는 서정성 짙은 시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해 준다. 오늘날과 같이 극도로 메말라 가고 황폐해 가는 인간의 늪 속에서 서정성이야 말로 사람답게 해 주는 좋은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서정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번잡하고 들뜬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혀 주며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해 준다.
서정시는 시대성이나 사회성, 사상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서정시를 읊을 수 있다는 것은 현실에 물들지 않고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서정성’이야 말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정서는 고독과 그리움이라 할 수 있다. 고독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적이면서 때로는 영혼의 조용한 안식을 가져오기도 한다. 서정성(抒情性)은 사회가 혼탁할수록 심성을 정화하는 촉매가 된다. 우리 선조들은 굴욕과 인고의 세월을 겪어 오면서 설움과 정한(情恨)의 슬픔을 시와 노래, 그리고 춤으로 표현하면서 안으로 강한 결속을 다져 왔다.
요즘은 대량화의 시대이다. 물건도 똑 같은 크기와 무게의 물건들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여차하면 덤핑으로 팔려 나가곤 한다. 작가들이 쓰는 시도 대량적으로, 아니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현대시라고 주장하는 일부의 시들은 그 색깔이나 입은 옷이 동일할 뿐만 아니라 그 기교적인 형태까지 비슷하여 공장에서 대량화하여 찍어낸 싸구려 옷과 비슷하다. 한발 더 나아가 그런 작품을 자화자찬까지 하고 있는 것은 그런대로 봐줄 수 있다고 해도 다른 시인들의 인격과 작품을 비아냥거리며 공공연한 자리에서 음해하는 행위를 어찌 시인의 자질을 갖춘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이 얼마나 어리석고 우매한 짓거리인가. 그런 사이비 시인이 쓴 작품은 한 번 쓰고 나면 버려야 하는 일회용이다. 일회용은 결국 산업공해만을 조장할 뿐이다. 시가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현대시의 한 부분 속에는 곪고 썩어서 요란한 빈 수레와 같은 몰골을 하고 있다. 오늘의 시를 보면 말장난에 그친 기교놀음, 감정이 정제되지 않은 작품, 이미지가 혼합되어 혼탁한 작품, 자아도취적 관념세계에 머물러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작품 등 그야말로 시의 공해 속에 묻혀 있다고 해도 좋을 전국시대이다.
시를 쓰는 행위는 명예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며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은 더욱 아니다.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얼굴을 한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가장 보배로운 작업이 시 작업(創作)이다. 때 묻은 거울을 닦듯 영혼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세워가고, 거기에 더해서 마음의 향기를 발할 수 있는 것이 시의 창조적인 작업이다. 특히, 서정시 창작은 오늘날, 시대의 요구이다. 점점 건조해 가는 시대에 시골집 마당가에 피어 있는 해바라기, 봉숭아꽃을 만난 것처럼 서정시는 아늑한 어머니의 품을 찾은 것처럼 모향(母鄕)이다. 그래서 서정시는 삶의 생기를 일깨워주는 향기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시대가 변화할수록 서정시는 소중한 애인이 되어, 그리운 친구가 되어 동행해 줄 것이라고 보여 진다.
그러나 서정시는 인간의 감정을 주조로 한 시이기 때문에 삶의 본질을 꿰뚫어 내기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커다란 위안이 되며 힘이 된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직관이란, 판단 추리 따위의 작용에 의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이나 알고자 하는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일이나 작용이다.
이것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에 시에서 자주 쓰여 왔고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의 방편으로도 쓰여 왔다. 직관에 의한 시 쓰기는 사물을 보는 날카로운 안목이 있어야 하며 정신이 맑고 투명해야 한다. 그래서 마음에 대한 수행 공부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직관은 관념이나 서정성을 배제하고 사물이 가지고 있는 본질에 닿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부터 장애(障碍)가 없어야 한다. 다시 말해 소리와 빛, 냄새, 색깔 등의 모든 이미지가 작위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들이 빚어내는 울림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 ‘숲으로 간다’는 환경파괴와 오염을 들추며 환경의 소중함에 대한 반짝이는 이미지들이 감각의 무게를 더한다.
숲으로 간다
가고 싶었다
들풀처럼 번져
버들피리 하나 물고
맨손으로 도랑을 기어 다녀도
행복이 별처럼 쏟아질 것만 같은
매연이 깃든 굴뚝이 쿨럭 거리고
밤새 잠들지도 못하는 지루한 차도에도
노란 얼굴의 민들레 하나 훌쩍거리는 날이 밝고
노루의 실팍한 엉덩이가 자라는 참나무의 수심이
도토리같이 단단한 몇 알의 결기들이
푸르거나 붉을 골짜기들의 혼잡한 퇴적을 넘어
오래도록 기다렸던 소식처럼
청랑한 계절로 쏟아지는 기적을 본다
가고 싶었던 곳에서 불려나와
돌아 갈 곳이라도 있던가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도 돌아가는 이들도
들꽃처럼 피고 지는 꿈을 꾸는데
무거운 일상을 메고 다니는 달팽이 같은 걸음이
아직도 숲 언덕 아래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산업화사회 특징 중의 하나가 사람이 무기력하게 생산자나 소비자로 전락당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군중의 무리 속에서 ‘나’ 하나는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도 생긴다. 현대문명의 가장 큰 성과가 획일성이라면 그것이야말로 현대문명의 가장 큰 위험성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그리움으로 결합할 수 있는 ‘숲’이다. 숲은 모향처럼 편안하다. 또한 인간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 홍의현 시인은 이런 숲으로 가고 싶어 한다. 숲에는 근원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행복이 별처럼 쏟아질 것 같은 곳이다. 그리고 자동차와 공장의 매연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각종 소음 속에서도 민들레가 피는 곳이다. 그곳은 오래도록 기다렸던 소식처럼 청량하기 때문이다.
4. 진실한 삶에의 회귀성
욕망의 상승 욕구는 시인 내면의 움직임에 의해 구별된다. 제도나 관습 속에 묻혀 살면 창의력은 요원하다. 까뮈는 ‘한계상황’을 말한다. 그것은 삶에서의 마지막 인간이 겪어야 하는 ‘죽음’이다. 그것이 있기에 인간은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나날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헛된 명분이나 맹랑한 공상에 쫓겨 무책임하게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삶을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 평범한 놀아움 역시 평범한 삶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웃기도 하고 울게도 하는 ‘그리움’ 도는 ‘기다림’의 무게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불현 듯 찾아오는 삶의 가치, 그것은 그리움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는 것일 게다. 살면서 우리들이 흔히 겪울 수 있는 일상의 아름다움이다.
커피를 마시는 이유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었어
좁은 골목길들 돌아 나오는
갈색의 머릿결로 코끝에 물결쳐 오던
겪어도 본 적 없는 수세기 저편에서 건너왔을
오래 전 향기의 조각들 같은
너를 만난 건
지긋한 나이가 들어서도 아니고
시큼한 원두 같은 시절이었지
때로는 갈색 때로는 먹빛 같은 눈빛이 되어
날씨가 좋다 거나 비가 내린다 거나
쓰다 거나 달콤하다 거나
그렇게 기다려지고 만나고
날마다 익숙해지고 있어
가끔 울퉁불퉁한 탁자의 끝 모서리에 앉아
그리운 것들을 불러 세워
공복 같은 찻잔 속에 풀어 마시고는 해
몽당연필 같은 생각들로 달그락 거리는 날이라도
잊었던 기억의 끈들
뭉클 피어오르지 않을까 싶어서
커피가 기억을 끌어올리는 낚싯줄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생활의 흐름 안에서 때로 마시는 소줏잔에서도 그리움의 기억들은 묻어난다. 그의 시 ‘소주 한 잔’ 등의 작품을 읽으면 삶이 고요하면서도 아름답도 친근하다.
시인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진실한 삶에의 회귀성에 닿아 있다. 시인은 ‘아버지의 무지개’에서 삶의 아픔으로 이어지는 따뜻한 사유가 공감을 얻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지친 어깨에서 슬픔의 무지개를 본다. 역시 그리움의 색채가 진하게 배어 나오는 작품이다. 우리는 기억이 얼마나 고귀한 색채인지를 안다. 그리움이야말로 우리 삶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시인의 몫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아버지의 무지개
비가 온다
기척도 없이
비가 오면 가난했던 아버지는
지친 어깨를 눕히고
누렇게 피워 올리던 담배연기 마저도
한껏 모으지 못해 긴 한숨으로 흩어내곤 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며
칠월의 긴 장맛비 속에서 술과 오기로만 세상을 버티다
그 억센 어깨 허물어지던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겠지요
해가 나야 할텐데
끝이 단단치 못한 얕은 독백들에도
끝내 틈을 보여주지 않던 하늘이었지요
창을 흔들고 지붕을 흔들던
긴 밤이 지나고
새초롬한 아침 하늘에 활처럼 누운
칠색의 눈물줄기들을 봅니다
쉬이 갈잎을 뒤집고 가지들을 훑는 바람처럼
저 높은 하늘로 쏘아지는 화살처럼 가볍게 달려가시기를
허공인 듯 그리움인 듯
아직 세상에 남은 자식들은
그토록 아름답게 지은 허공을 바라고 있겠지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말한다. 『존재의 시간』에서, 사람은 동물이나 무생물과는 다르다. 인간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 결단을 내릴 수 있고 그 결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실현시킨다고 했다. 혼의현 시인은 늘 시를 통해 사물에 대한 통찰로 인한 시적 결단과 의견, 사유의 숲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모습이 우리 사회를 편안한 의식의 한 가운데로 데려다 줄 것이라 생각되었다.
5. 맺음말
시 속에 깃든 다양한 이미지들을 읽어 보았다. 유독 홍의현 시인의 시 전편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 있다. 시인은 행복한 존재라는 걸 말이다.. 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감정과 지적인 의견 내지는 느낌을 시로 기록한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기쁜 일인지를 알 수 있었다.
홍의현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서 또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한 편의 시 작품은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지는 않는다. 읽을 때마다 다른 여러 가지 기억과 차별적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시인 각자 각자가 쓴 작품이 그러한 사유를 할 수 있는 여백을 줄 수 있는 작품이냐는 것이냐?’ 라는 물음이었다.
만약 이러한 뜻이 잘 지켜진 시집이라면 독자들은 시집을 옆에 들고 놓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몹시 더운 여름날이다. 밤에 기온이 25도를 넘는 온도가 이어지면 ‘열대야’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온이 30도 이상 이어지면 ‘초열대야’라고 한다. 우리 집은 옛날 양철 지붕의 촌집이어서 참 덥다. 밤마다 초열대야 같은 온도로 지내야 했다. 그런데도 홍의현 시인의 시 작품들을 읽으면서 ‘초열대야’를 이겨낼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를 읽는 재미를 느꼈다는 말이다.
사람도 잘 생긴 사람과 지내면 오래 가면 싫증이 난다. 그러나 편안하고 따뜻한 사람과는 오래 지낼수록 기분이 좋다. 홍의현 시인의 작품은 이렇게 후자 같은 작품이다.
한 사람의 시인으로, 시집 발간을 한 홍의현 시인에게 손을 모아 발간의 축하를 올린다. 그리고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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