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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염불의 융합
선(禪)과 염불이란 중국적 토양에서 성장한 선과 정토종의 염불 관계를 말한다. 인도불교의 선과 염불은 근본이 같고 유사하게 볼 수 있지만, 중국에서 선과 염불은 각기 종지(宗旨)를 달리하는 종파적 불교의 수행이다. 당대 정토교의 칭명염불이 성행하므로 인해, 선종에도 그 영향이 미쳐 중생구제의 방편으로 수용한 면이 없지 않다. 사실 선과 염불은 인도불교에서처럼 원래 같은 뿌리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으로 건너와 배타적 성격의 종파불교가 된 것이다. 특히 일본은 선과 염불을 확실하게 구분하는데, 자력‧타력, 난행(難行)‧이행(易行), 현세증득‧미래왕생, 성도문‧정토문 등이 그것이다. 양자가 이렇게 구별함으로써 융합하고 통합하기가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서로 각자의 수행만을 고집하고 서로를 비판하기에 급급하므로, 조화로운 통합을 모색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다행히 한국불교는 통불교(通佛敎)의 전통으로 여러 수행이 겸수되었고,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참선‧간경‧염불의 삼문수행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풍토에서 선과 염불의 융합이 시도되는 것이다.
우선 벽산이 지향했던 염불선의 정통성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초기 선종의 염불 수용을 살펴보고, 구체적 사례인 인성(引聲)염불과 남산염불선선종의 수행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당말 오대 이후 선정쌍수(禪淨雙修)가 성행하는 부분도 아울러 살펴보기로 한다.
1.선(禪)의 염불 수용
1)초기 선종의 염불 수용
초기 선종이란 보리 달마(達摩)에서 육조 혜능(慧能)에 이르는 시기를 말한다. 다만 혜능은 '일행삼매와 일상삼매'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살펴보았으므로, 달마와 도신(道信)‧홍인(弘忍, 601~674)의 저술을 위주로 살펴보기로 한다.
선종은 혜능 이래로 중국적인 선(禪)으로 정립되는데, 염불은 자성을 밝히는 방편으로 수용하고 있다. 『관무량수경』에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는 구절이 있으며, 이는 선종의 『조사어록』에도 많이 등장하고 잘 알려진 문구이다. 다음 내용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제불여래는 법계신(法界身)으로 일체중생의 마음에 두루 들어있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할 때, 이 마음이 곧 32상과 80종호이다. 이 마음이 부처가 되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모든 부처의 바르고 넓은 지혜는 마음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마땅히 일심으로 집중하여 부처ㆍ여래ㆍ응공ㆍ정등정각을 자세히 관해야 한다.
위의 인용문은 『관무량수경』의 십육관법 가운데, 여덟 번째 상상(像想)을 관하는 부분이다. 선(禪)수행의 주제인 '마음이 부처'라는 어구를 제공한 법문으로, 여러 선어록에서 인용하며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정토종의 핵심경전에서 설한 법문이 선종의 조사들에 의해 인용되며, 선(禪)과 염불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소실육문(少室六門)』의 안심(安心)법문에는 "마음의 본체가 바로 법계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즉, 제불여래는 법계가 몸이므로 일체중생의 마음속에 있고,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하면 그 마음이 바로 공덕장엄의 부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마음으로 생각하고 집중하여 여래의 공덕을 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법(觀法)을 설하는 경전이므로 염(念)‧지(止)‧관(觀)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사실 염불은 지관이 함께하는 수행이어야만, 완전히 집중하여 제대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아래에서 조사들의 어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염불이란 응당히 바른 생각이다.… 바른 생각은 반드시 정토에 왕생하지만, 삿된 생 각은 어찌 그곳에 이르겠는가. 불(佛)이란 깨달음이며 즉,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깨달아 악(惡)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염(念)이란 기억하는 것이며, 이른바 계행을 기억하여 지키되 잊지 않고 정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을 알아야 念 이라고 말한다.
위의 구절은 『파상론(破相論)』의 법문으로 염불을 바르게 정의하고 있다. 염(念)이란 기억하고 지키며 정진하는 바른 생각이고, 그렇게 실천해야만 비로소 정토에 왕생한다고 설한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삿된 생각으로 왕생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선(禪)에서 받아들이는 염(念)은 바른 생각으로 잊지 않고 정진하는 것이다.
아래는 도신의 실상(實相)에 대한 법문이다.
항상 부처를 억념(憶念)하여 반연(攀緣)이 일어나지 않으면, 번뇌가 끊어져 무상(無相)하고 평등하여 둘이 없다. 이 경지에 들어가면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도 사라지고, 다시는 꼭 의거할 필요가 없게 된다. 곧 이러한 마음이 바로 여래 진실법성(眞實法性)의 몸임을 본다. 또 정법(正法)이고 불성이며, 제법실성(諸法實性)의 실제(實際)이다. 또 정토‧보리‧금강삼매‧본각‧열반계‧반야 등이다. 이름은 비록 한량없지만 모두 같은 본체이며, 또 능관(能觀)과 소관(所觀)이란 뜻도 없게 된다.
위의 인용문은 염불이 상속하여 반연이 일어나지 않고 번뇌가 끊어지면, 무상(無相)하고 평등하여 둘이 없는 마음으로 더 이상 작위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마음이 곧 실상을 증득한 경지이며, 불성이고 실제이며 정토이고, 본각(本覺)이며 반야라고 설한다. 이는 능소(能所)가 없는 아공(我空)‧법공(法空)의 진리를 관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실상관(實相觀)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선종에서 설하는 염불은 자성을 깨치는 염불이며, 진리를 관하는 실상염불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마음의 상속은 항상 공심(空心)에 있다는 것으로서 보리에 수순하는 것이고, 나아가 마음을 증득하여 성품을 본다."고 하는 뜻이기도 하다.
다음은 홍인의 설법을 들어보기로 한다.
처음 좌선(坐禪)을 배우는 사람은 『관무량수경』에 의해, 정념(正念)으로 바르게 앉아 눈은 감고 입을 닫는다. 마음으로 멀고 가까움에 따라 평등하게 바라보며, 일상관(日想觀)을 짓고 진심(眞心)을 지켜 생각 생각이[항상] 머무르지 않도록 하라."
위와 같이 홍인은 초심자에게 『관무량수경』의 관법에 따라 좌선법을 설하고 있다. 즉, 마음으로 평등하게 바라보며 일상관을 지어 진심을 지킨다고 말한다.
당시 도신과 홍인의 시대를 보면, 도작(道綽)과 선도(善導)의 정토종의 흥기와 겹쳐진다. 그러므로 정토종의 교리육삼를 충분히 인지하고, 초심자의 수행법으로 일상관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당시에는 선종이나 정토종이라는 종파의식이 없었다는 점이다. 만약에 종파적 소속감이 있었다면, 『관무량수경』의 일상관을 쉽게 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적어도 초기 선종 대에는 선이나 정토라는 종파의식이 없 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선종사에서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 대에 이르러 선원(禪院)이 율원(律院)에서 독립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선종이 독립된 종파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 시기는 적어도 도신과 홍인의 시대에서 백여 년이 훨씬 지난 후의 일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달마 이래 초기 선종은 염불과 정심(定心)이 결합 됨을 알 수 있다. 초기 선종의 염불은 선불교의 보편적 수행전통인 선정에 바탕을 둔 것이다. 특히 도신은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에서, "이 법은 『능가경(楞伽經)』의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에 의지하고,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지한다."고 설한다. 전자는 달마의 이입(理入)에 해당하고, 후자는 사행(四行)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법에 대한 이치를 분명하게 확립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실천행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도신은 『문수설반야경』의 '법계일상(法界一相) 계연법계(繫緣法界)'를 일상(一相)으로 정의하고, 한 부처에게 오로지 명호를 칭하는 것을 일행삼매로 설한다. 이것은 그의 제자인 홍인의 사상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인성염불과 남산염불선종
초기 선종의 도신과 홍인은 『문수설반야경』과 『관무량수경』의 법문을 인용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였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토양에서 홍인 문하의 제자들에게 선(禪)과 염불을 결합한 사상이 나타난다. 신라 출신 무상(無相 684~762)이 대표적으로 홍인의 사대 법손에 해당한다. 그는 달마이래 선법(禪法)을 계승하며 특히 무억‧무념‧막망(莫妄)을 통해 인성(引聲)하고 염불하는 좌선으로, 소리‧칭명‧실참(實參)으로 이어지는 독창적인 수행법을 가르쳤다. 이것을 '인성염불'‧'인성염불선(引聲念佛禪)'이라 하는 데, 그의 가르침은 수계(受戒) 설법 가운데 설해진 것이다.
김화상은 매년 12월과 정월에 사부대중 백 천만인의 수계(受戒)를 위해, 장엄하게 도량을 설치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 설법하였다. 우선 소리를 끌어 염불함을 가르쳐 한숨을 내쉰 뒤 염하고, 소리가 끊어지고 생각이 멈췄을 때 이르되,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상념하지 말며, 현재에 망령되지 말라. 무억(無憶)은 계(戒)이고, 무념은 정(定)이며, 막망(莫妄)은 혜(慧)이니, 이 세 가지가 곧, 총지문(總持門)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인용문에서 '인성염불'이란 한 목소리로 호흡과 함께 길게 숨을 내쉬며, 소리와 함께 부처를 염하는 수행 방법이다. 즉, 소리를 끌어들여 한 번의 숨을 내쉬며 소리를 끊고, 염불을 멈추었을 때에 무억‧무념‧막망의 삼구어(三句語)를 설한다. 말하자면 소리와 염불이 멈출 때, 다라니이며 요체인 계정혜 삼학을 설한 것이다.
종밀은 『원각경』 주석에서 "삼구(三句)라는 것은 마음으로 지나간 일을 생각지 말고, 미래의 성쇠에 대한 일도 염려하지 말며, 항상 지혜와 상응하여 흐리고 혼란하지 않은 것을 막망이라 한다."고 말한다. 즉,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며, 현재의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또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이 계정혜 삼학의 문이고, 무념이 바로 삼학을 구족함이라 한다. 무념은 초기 선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수행이며, 진여삼매이고 일항삼매이며 종밀이 말하는 최상승선(最上乘禪)이고 여래청정선(淸淨禪)이다. 무상은 인성염불이라는 방편으로 선종의 핵심 수행을 설하며, 무념의 구체적 실천법이라는 점에서 실상염불 내지 무상(無相)염불에 가깝다.
무상의 다른 염불 전거로는 『무상오경전(無相五更轉)』이 있는데, 당시 속요의 형식을 빌어 수행의 요체를 염불로 표현한 것이다. 오후 일곱 시에서 아홉 시까지 초경(初更)을 시작으로, 마지막 오전 세 시에서 다섯 시까지가 오경(五更)이다. 여기에 맞춰 차례로 천(淺)‧심(深)‧반(半)‧천(遷)‧최(催) 등의 단계로 염불하게 한다. 즉, 초경은 얕은 염불로 시작하여 이경에는 깊은 염불이며, 삼경에는 얕지도 깊지도 않은 염불이다. 사경에는 힘찬 염불이고, 오경에는 빠른 염불로 전개된다. 이것은 대중적인 속요의 형식에 맞춰, 두루 외우며 실제로 수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인성염불처럼 오경의 절 마디가 끝나고 다음으로 가기 전에, 무념을 위주로 무억과 막망을 새기고 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오경송(五更頌)이 의도하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지도 말며 오직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속요의 형식으로 깨달음의 과정을 시간이 다섯 단계로 변화함을 비유하며 설한 것이다. 다음은 초경송과 사경송‧오경송 등에 대한 내용이다.
온갖 망상으로 일어난 인연은 어디에 두었나? 단지 정관(正觀)에 의지하여 생각을 잊으면, 항상 진여가 비로소 나타나리라. … 선정과 지혜를 같이 수행하여 번뇌를 벗어나고, 색이 공(空)한 원만하고 청정한 본체를 요달하니, 청정한 계율의 달이 맑고 밝은 하늘에서 빛나고 있네. 불타의 태양이 높고 높아 미묘한 경계로다. 사선의 공적처(空寂處)를 뚫으니 일념에 상응하여 여래를 만나게 되네.
위의 오경송은 정관‧선정‧지혜‧사선 등, 선정과 관련된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 내용도 선정과 지혜로 번뇌를 여의고, 사선을 성취하여 불타와 일념에 상응한다고 한다. 이것은 인도 선정사상의 내용과 흡사하다.
무상은 앞의 삼구법문을 "내가 달마대사로부터 전해 받은 삼구어는 총지문이다."라고 설하는데, 이러한 무상의 선사상은 염(念)‧지(止)‧관(觀)의 수행법과 상통한다. 그리고 그러한 염불방법은 '염불선'이라고도 칭할 수 있다. 이는 중국 선종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성을 깨닫는 방편으로 염불을 설한 것이며, 또한 그동안 중국 선종사에서 알 수 없던 사실을 돈황문서의 발견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한편 홍인 문하에 또 다른 염불과 선을 결합한 남산염불선종이 있으며, 종밀의 기록에는 선습(宣什)과 과주(果州) 미화상(未和上) 주도의 '전향존불법(傳香存佛法0'이 전해진다. 다음 내용을 통해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보기로 한다.
법을 베풀 때는 향(香)을 전하는 것으로 스승과 제자의 신표로 삼는다. 화상이 손으로 제자에게 건네고 제자는 다시 화상에게 올리고, 화상이 다시 제자에게 주는 식으로 세 번씩 반복하며,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이 한다. 존불(存佛)이란 바르게 법을 전할 때 먼저, 법문의 도리와 수행취지를 설한 뒤에 일자(一字)염불을 하게 한다. 처음은 소리를 내어 염하고 뒤는 점점 소리를 줄여, 미약하거나 없게 하여 부처의 지극한 뜻에 이르게 한다. 생각이 아직 거칠면 다시 지극한 마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하여 항상 그와 같은 생각에 머물면, 부처는 항상 마음속에 있다.
위와 같이 남산염불선종의 전향(傳香)과 존불(存佛)에 대해 설하며, 선종의 상당법문(上堂法門)과 다른 상당히 격식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법을 전할 때 주고 받는 향은 스승과 제자 간에 믿음과 공경의 증표이고, 넓은 의미로 밀교의 관정(灌頂)이나 수계하고 향을 태우는 것과 유사하다. 여기에 존불은 부처의 명호를 일자로 칭명하여, 점진적으로 미세한 소리에서 무음(無音)에 이르게 한다. 이어서 부처의 깊은 뜻에 이르게 하며, 번뇌가 생기면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게 한다. 그렇게 깊은 뜻과 마음에 이르러 항상 머무르면, 마침내 마음속에 부처가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말하자면 칭명으로 인하여 뜻을 쉬게 하고, 관상으로 마음을 정화하여 부처와 하나되는 '존불'의 경지이다. 이는 관상염불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무상의 인성염불이 선(禪)과 밀접하다면, 남산염불선종은 정토종에 가까운 '염불선'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초기 선종에서 염불을 수용한 이유는 첫째, 당대에 정토사상이 유행하여 염불이 보편화 되었다. 둘째, 정토종의 칭명왕생에 비해 자성을 깨치려는 방편의 수용이다. 또한 인성염불이나 전향존불법은 수계나 설법의식을 장엄하여,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쉬운 염불을 방편으로 채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금강심론』 수행론 연구/ 박기남(普圓)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