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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2011. 10. 18
장소 : 우송대학교 솔브릿지대학
특강 : 이용우의 중국 이야기
이용우의 중국 여행기
2011. 10. 18 한중환경교육연구소 이용우
중국은 광활한 영토와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입니다. 남한 면적이 10만㎢이고 중국은 960만㎢이니 남한의 96배, 그러니까 거의 100배의 넓이입니다. 인구는 2010년 통계에 의하면 13억 4천만의 인구를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중국에는 55개의 소수민족과 한족, 그래서 56개의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제가 중국이라는 나라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것은 한 여자 때문이었습니다.1990년 제가 처음 중국 여행을 할 때 비행기에서 서빙하는 여승무원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만났던 어떤 여인보다도 우아했고 예뻤습니다. 그 여승무원을 처음 바라봤을 때 정말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예쁘면 숨이 멎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경험했습니다. 중국말을 못해 말을 걸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여행이 끝나고 귀국하자마자 한 권의 중국어 책을 사서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를 만나 말을 해보고 싶은 일념으로 공부를 했으니 얼마나 열심히 했겠습니까?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다보니 일 년 후에 겨우 편지를 쓰게 되었고, 그녀를 찾기 위하여 중국을 가기 시작했고, 중국 여행길에 오른 것이 70여회가 됩니다. 중국 여인의 매력에 빠졌던 것이 이제 중국이라는 나라의 매력에 빠진 것이지요. 중국을 여행하기 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사할린, 파카스탄 등 20여 국가를 여행 했지만, 1990년 이후부터는 중국 이외의 국가는 가지 않고 오로지 중국 여행만을 고집했습니다. 저는 대부분 배낭 하나를 메고 혼자 여행을 떠납니다. 중국의 행정구역으로는 4개의 직할시가 있고, 5개 자치구와 23개의 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4개 직할시로는 북경, 상해, 중경, 천진이 있습니다. 5개 자치구는 신강위구르자치구와 티베트자치구, 내몽고자치구, 영하회족자치구, 광서장족자치구가 있습니다. 23개 성은 산동성, 산서성, 하북성, 하남성...등이 있습니다. 몇 차례 중국을 다녀 온 다음 중국지도에 스티커를 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계통 별로 묶어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0여 년간 여행을 하다 보니 4개 직할시와 5개의 자치구, 그리고 23개의 성을 다 완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다녀온 중국 몇 곳을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산을 좋아하는데 중국에는 5악이 있습니다. 동악인 태산, 태산은 산동성에 있고, 서악은 섬서성에 있으며, 남악은 호남성에 있고, 북악은 산서성에 있으며, 중악은 하남성에 있습니다. 한곳을 여행 하다보면 나머지를 다 여행하고 싶어 결국 다 갔다 왔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중국여행은 실크로드 여행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서안에서부터 시작하는 실크로드 여행을 떠났습니다. 먼저 감숙성에서 둔황의 명사산과 막고굴을 보고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우루무치로 갔습니다.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여행할 곳이 많습니다. 카나스호수를 비롯하여 나라티초원, 이리초원, 화염산 등 갈 곳이 너무나 많고 하미과, 포도, 양고기 등 먹을거리도 많습니다. 2주 가량 여행을 하고 기차로 북경까지 가는데 46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침대열차표가 없어 몇 시간 입석으로 가다가 다른 차량으로 옮겨 잉죠(앉는 의자)를 타게 되어 서서 가는데, 한 여자가 지나가기에 보니,그는 같은 버스에 타고 같이 여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심코 툭 치면서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왜 여기 서 있냐고 하기에 좌석이 없어 서서 간다고 했더니, 그 말을 듣고는 급하게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잠시 후 그녀의 남편이 오더니 나에게 왜 여기 서있냐고 묻고 있는데, 그때 마침 여객전무가 지나가자 여객전무를 부르더니 큰 소리로 이 사람은 한국 친구인데 빨리 자리를 마련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당황하면서 그렇잖아도 나도 자리를 부탁했는데 자리가 없단다고 하니 서서 가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조금 후 여객전무가 오더니 침대좌석을 마련해 놓았다고 자리를 안내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자리를 잡고 여행 중에 받았던 그의 명함을 찾아보았더니 그 사람은 철도대학 부처장이었습니다. 큰 소리 칠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같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출장을 갔다가 오는 사람들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같이 어울려 얘기를 나누면서 북경으로 가는 도중 기차가 한 시간이나 늦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되면 북경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가가 없습니다. 밖에는 소나기까지 세차게 내리고 있어 걱정을 하니, 그중 한 사람이 자기 친구한테 전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차를 북경역으로 가져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북경역에 도착하자 그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총알같이 달려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얼마나 고맙고 매력 있는 사람들입니까? 여행 중에 이런 사람들을 만나니 중국이라는 나라의 매력에 차츰차츰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로 그 사람과는 자주 연락을 하면서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한테는 백두산은 정신적 지주입니다.그러니 저도 백두산엘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두산에 도착하여 호텔을 정하고 여행용 가방을 방에 놓고 카메라 배낭만 메고 밖에 나와 보니, 마침 백두산으로 가는 찝차가 있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차를 타고 갔다가 백두산에 있는 기상관측소에서 3일을 묵은 일이 있습니다. 백두산의 비경을 찍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민족 혼이 서린 백두산을 접하고 보니 사진에 담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겨 아침과 저녁을 라면으로 해결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호텔방 예약만 했지 자보지도 못하고 호텔비를 냈습니다. 그렇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북경어언대학과 사천대학 남경 효장대학, 산동대학에서 중국어 어학연수를 했습니다. 남경에 있는 효장대학에 공부하러 갔을 때 대학 측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3학년생의 여학생 3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여학생 중에서 장외라는 아주 참하게 생긴 그 여학생한테 연수 기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여학생은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으며 한국에 가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2년이 지난 어느 날 장외 학생이 전라북도의 어느대학에 대학원생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 대학으로 달려가 보니 많은 중국 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공부하기가 좋지 않을 것 같아 충남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주면서 그 여학생을 공부시켰습니다. 3년 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장외를 딸이라 불렀고 장외는 저를 아빠라 불렸습니다. 지금 장외는 큰 사업을 하는 남자와 결혼을 해서 소주시의 셩저(盛泽)에 살고 있는데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바라볼 때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장외가 사는 집은 호수 가에 있는 아파트입니다. 아파트에 도착하여 승용차 안에서 리모컨으로 셔터 문을 열고 차를 안으로 넣고 다시 리모컨으로 셔터 문을 닫으면 됩니다. 복층 형으로 1층은 넓은 거실이 있고 2층은 주방과 사무실이 있으며 3층에는 2개의 침실과 사무실이 있습니다. 큰 방은 장외 부부가 사용하며, 작은 방은 어쩌다 중국에 갈 때 제가 사용합니다. 저를 위해 항상 그 방은 비워두고 있습니다. 아파트 뒤편은 정원으로 사용하고 있고, 정원 옆으로는 수로가 나 있고, 호수가 바로 옆에 있습니다. 이 아파트의 윗층 세대는 4층부터 6층까지 사용하며 옥상을 정원대신 사용 하고 있었습니다. 금년 8월 중국여행 중에 장외한테 전화를 했는데 아주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귀여운 공주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백일이나 돌잔치 때 축하하러 가야지요. 몇 년 전 한중 수교 15주년을 맞아 대전의 고등학생 20여명을 인솔하여 북경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마침 철도대학의 부처장이 생각나 전화를 했더니 바로 달려 왔습니다. 반갑게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기는 티베트에 갔다 왔는데 너무 좋았다고 하면서 빨리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1년 전에 티베트 여행을 계획했는데 티베트 허가를 받지 못해 가지 못했다고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그 곳으로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결국 티베트 여행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대부분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중국을 가던지 그렇지 않으면 인천항에서 배로 몇 차레 갔었는데 또 다른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차에, 동해의 속초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속초에서 배를 타고 북한의 바로 옆에 있는 러시아의 자루비노항으로 가서 버스로 길림성의 훈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이 다녔다는 대성중학교와 윤동주 생가, 그리고 헤란강, 일송정을 돌아보고 내몽고의 후허하우터 여행을 했습니다. 후어하우터에서도 사막과 초원들을 돌아보고 중국 4대 미인 중의 한명인 왕소군의 묘도 가 보았습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식당 종업원에게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 어디 냐고 물어서 택시로 그 마을을 찾아 갔습니다. 고색창연한 마을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내일이라도 당장 재개발로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한참을 동네를 헤매며 사진을 찍고 마을을 떠나려고 하는데 어느 할머니가 쫒아오면서 무엇하는 사람인데 왜 우리 집은 사진을 안 찍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네 댁이 어디냐고 물으니 그 할머니가 앞장서서 안내해 주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마침 마당에 할아버지가 계셔서 두 분의 사진을 집을 배경으로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다음 보여 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시면서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어 잘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녁을 해줄 테니 먹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한테 주소를 적어달라고 부탁하여 적어 왔습니다. 뒷일이지만 여행이 끝난 뒤 귀국하여 몇 장의 사진과 더불어 우리나라 풍경 작품 사진을 같이 보냈었는데 한 달쯤이지나서 그 할아버지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내용은 자기 생전에 한번 꼭 놀러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내몽고 여행을 마치고 지도를 보니 외몽고의 울란 바트로까지는 아주 가까워 기차표를 구입하여 기차를 탔습니다. 몇 시간을 가다가 멈추어 서더니 앞뒤로 왔다 갔다 하기에 침대에 누웠다가 왜 그런가 하고 보니, 기차를 한량 한량 분리하여 기차를 들어 올려 기차 바퀴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왜 기차 바퀴를 바꾸냐고 물으니 내몽고와 외몽고의 레일 폭이 다르기 때문에 바꾼다는 것입니다. 바깥 풍경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떤 친구가 이것저것 귀찮게 물었습니다. 그의 질문에 일일이 대꾸하기보다는 한 장의 사진이라도 더 찍고 싶어 간간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결국 3일 만에 외몽고의 울란바트로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울란바트로 역으로 나가자 큰일이 났습니다. 그것은 온통 글자가 러시아 글자로 되어 있고 사람들은 중국어가 아닌 몽골어로 말을 하는데 앞이 캄캄지면서 막막해졌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하는 말이 왜 여기 서 있냐고 묻기에 돌아보니 기차에서 그렇게 말을 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큰일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니 자기는 몽골 친구 만나러 왔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친구한테 전화를 하자 바로 친구가 왔는데 그 몽골 친구도 어떻게 하면 여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기차에서 만난 중국 친구가 하는 말이 이곳에서는 중국어가 통하지 않으니 절대로 중국어로 말을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의 설명으로는 중국이 내몽고를 차지했기 때문에 적대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그 옆에서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몽골 말로 무슨 말을 했습니다. 그의 말은 게스트 하우스로 가면 해결이 될 것이라고 하며, 자기가 게스트 하우스를 알고 있으니 태워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차에 짐을 실고 게스트 하우스로 갔습니다. 작은 사무실에 들어가니 한두 명씩 찾아온 외국인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였습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지껄이는데도 신기하게 의사 소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발짓, 몸짓으로도 왠만한 의사는 가능하니 현지어를 못한다고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방값 몇 달러를 주니 방 키를 주어 방을 찾아가 방에 들어가 보니 2층 침대가 2개가 있고 샤워실이 있는 방이었습니다. 여름 날 3일 동안 샤워를 못했으니 먼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키로 방문을 열고 들어 왔습니다. 보니 20대로 보이는 아가씨가 배낭 하나를 메고 들어 온 것입니다. 아가씨가 먼저 인사를 하여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아가씨도 제일 급한 것이 샤워인 것 같았습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면서 얘기를 하는데, 그리스 여대생으로 2학년이며 혼자 배낭여행을 왔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하얀 것이 정말 인형 같았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또 키를 꽂고 방문을 여는 사람이 있어 보니 두 명의 남자들인데 홍콩에서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을 꺼내놓고 같이 먹으면서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다음날 사무실에 들렀더니 테러지 국립공원에 가는 차가 있으니 가려면 가라는 것입니다. 테러지 국립공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테러지로 갔습니다. 초원이 아름다운 곳을 한참 달려 도착한 곳은 지대가 조금 높은 초원으로 몽고빠우가 몇 개 있는 곳입니다. 그 곳에 여행 온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들이었고, 저녁에는 모닥불 가에 모여 쏟아지는 별을 보며 밤 늦게까지 같이 어울렸습니다. 그 곳 야생화가 피어있는 초원에서 말을 타고 시간을 즐겼습니다. 외몽고는 1년 후에 다시 산림청과 그린레이저 행사로 갔었는데 혼자서 갔을 때가 정말 좋았다고 생각됩니다.
다음은 티베트 여행 얘기를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신장위구르 여행 중에 만났던 철도대학의 부처장 덕분에 티베트 허가증을 받게 되어 티베트를 가는데, 침대열차에 타고 보니 침대가 양쪽으로 3층으로 되어 있고 문을 닫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일본 사람들인데 그들 중 한사람은 72세이고 또 한사람은 82세였습니다. 사실 중국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46시간의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여행할 수가 있는데 일본 사람들이라 좀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중국지도를 펼쳐놓고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데 지명은 어디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로에 있는 계기를 보고는 지금 해발 몇 미터라고 하면서 좋아하기에 저도 덩달아 계속 계기를 보고는 지금 해발 몇 미터를 지나간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하니 옛날 1982년 일본 기다알프스 등반했던 일이 있어 등반얘기를 하면서 가다보니 아주 친해졌습니다. 기차가 해발 4천 미터 정도를 달리자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가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힘들어 하자 그들의 가이드인 중국가이드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중에 해발 5천 미터를 지날 때는 또 한분마저 호흡곤란을 일으켰습니다. 옆에서 도움을 드릴 수도 없는데 기차는 46시간 만에 티베트의 라사에 도착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들 노인 분들 어떻게 되었는지 여행은 잘 하셨는지 걱정이 됩니다. 철도대학의 부처장이 저한테 하루라도 빨리 티베트를 가라고 한말이 맞습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티베트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런 티베트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닮은 순수한 티베트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이미 그들의 집은 흔적도 없었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지어준 집들과 오성기가 집집마다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왕복 기차를 타는데 무려 일주일을 보내고 겨우 일주일 정도 티베트 여행을 하는데 그렇게 여행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티베트 여행 마지막 날 달리는 버스에서 바깥모습을 찍는데, 중국사람 몇 명도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서 반대편에 찍을 거리가 있으면 빨리 찍고서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서안에서 왔는데 티베트를 여행하려면 이렇게는 안 되고 찝차로 다시 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두 명과는 텐트와 식량까지 준비해서 다음 해 한 달 가량 여행을 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연락을 하는데 티베트에 독립을 위한 소요가 일어나면서 결국은 티베트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서안에 꼭 한번 놀러 오라고 해서 영하회족자치구 여행을 가는 도중 서안에 갔습니다. 그런데 폭설로 공항에 모든 차가 운행되지 못하는데 그 친구들은 저를 마중하러 나왔습니다. 몇 일간 서안에서 있다가 영하회족자치구로 가려고 하자, 그 곳에 있는 친지한테 연락을 하여 도움을 주라는 것입니다. 서안을 떠나는 날 3명이 찾아와 서안의 특산품이라고 선물을 주는데 정말 곤란했습니다. 영하회족자치구를 여행하는데 그 큰 선물을 계속 끌고 다니느라고 힘들었지만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중국 전역에 저의 그런 친구들이 아마도 100명은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중국 여행에서 처음에는 아름다운 풍경만을 찍었었는데 이제는 더욱 관심을 갖고 카메라 샤타를 눌러대는 것은 소수 민족들입니다. 지금까지 55개의 소수 민족 중에서 20여개의 소수 민족들이 사는 곳을 방문 한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소수 민족 하나만을 소개할까 합니다. 윈난성 성도인 쿤밍에서 북으로 따리가 있고 더 북으로 올라가면 리장이 있습니다. 리장에 옥룡설산이 있는데 그 산은 여름에도 만년설이 있습니다. 만년설을 찍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면서 택시기사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윈난성에 아주 재미있는 소수민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수 민족은 루구호에 사는 모수런이라는 모계사회 소수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택시기사는 신이 나서 얘기를 했습니다. 모수런은 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원을 그리고 손을 잡고 춤을 추는데,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으면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3번 긁어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상대편도 마음이 있으면 답장으로 같이 3번 긁어주면 된다고 했습니다.그러면 여자네 집으로 남자가 가는데 밤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담을 넘어가야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새벽 일찍이 집으로 갔다가 다음 날 또 다시 찾아 가는데 12일간 같이 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를 낳으면 남자는 전혀 아이의 아버지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아기를 낳으려면 다른 남자를 택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딸을 낳으면 3일 밤낮으로 잔치를 하고 아들을 낳으면 잔치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니 안 갈 수 없지요. 그래서 다음날 루구호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에 타자, 버스 가이드가 신나서 떠들어 대고 여행객들은 웃음으로 이것저것 물으면서 모두 신이 났습니다. 여강에서 6시간 정도 걸려 루구호가 보이는 언덕에 잠시 내려 호수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데 남녀꼬마 둘이 있어 물었습니다. 너희들 엄마는 같고 아빠는 다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가이드한테 물었더니 루구호에 사는 사람 전체가 모계사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호수가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자, 말을 끌고 여인들이 모여드는데, 바로 모수런이었습니다. 복장도 화려했지만 얼굴들도 매력적이었고 생활력이 강한 여자들이었습니다. 여행객들을 태우고 마을을 돌기도 하고, 뱃사공도 여자들 몫입니다. 남자들은 빈등거리며 놀기만 합니다. 아기들은 삼촌이 업고 다니면서 키운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알고 보니 집안의 가장 어른은 할머니이고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없습니다. 남자는 자기의 누나나 여동생이 아기를 낳으면 업고 다니면 본다는 것입니다. 한 10년 전에는 재미 있었는데, 그러나 거의 매년 그 곳에 가다 보니 그런 문화는 지금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 외에도 다른 소수 민족들도 그들이 살고 있는 전통가옥이 다 다르지만, 특히 결혼식 문화와 장례식 문화 등이 특색이 있어 관심을 갖고 보면 흥미가 있습니다.
지난 9월에는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흑룡강성 치치하얼 민족행사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풍습을 원형 그대로 지켜가고 있는 조선족과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치치하얼시 조선족 제5기 배구경기 대회가 2011년 9월 3일부터 4일 까지 치치하얼시에 있는 조선족 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렸습니다. 이 배구대회는 치치하얼에 살고 있는 조선족이 친선교류의 일환으로 하는 행사로 100여 년 전 우리민족의 선조들이 땀 흘려 가꾸어 온 땅을 지키고 우리민족이 뭉치고 단합하여 민족과 고향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열리는 행사입니다. 흑룡강성 치치하얼시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조선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다른 민족들의 부러움을 갖도록 굳건히 지켜가고 있습니다. 치치하얼시에 있는 7개 지역이 참가하여 경기가 펼쳐지는데 성적보다는 민족애를 나누는 자으로, 지역 내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기업가와 각계단체 및 개인의 후원금으로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치치하얼시에 있는 조선족중학에는 500여명의 학생들이 있고, 초등학교에는 130여명의 조선족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사는 130여명 됩니다. 또한 유치원도 함께 있습니다. 초등학교의 리연춘 교감과 잠시 인터뷰를 했는데 가장 시급한 것은 열약한 유치원시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조선족들의 자녀들이 다른 유치원으로 가지 않아야 조선중학교로 연결 될 수 있다는 얘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조선중학교 곳곳에서 우리민족의 문화를 소개하는 그림과 사진들이 가슴을 찡하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라든가 어느 단체의 지원없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의 민족행사에 앞으로도 작은 정성을 담아 지속적으로 참가할 것이며 뜻이 있는 단체가 있으면 같이 참가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조선족에 대한 이런 지원이 결국 사라져 가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켜나가고 조선족과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끈으로 끈끈하게 맺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첫댓글 이선생님 잘 보고 갑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동행하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는 군요. 좋은 일 많이 하시고 여행도 즐기시고
부럽기만 하네요
정선생님 지난번 계룡산에는 잘 다녀 오셨는지요?. 제가 안내를 해 드려렸어야 했는데, 환경교육연구회 행사와 원고 준비로 만나뵙지 못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