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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성전을 회복하라
마태복음 22:37~40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절은 신구약 성경 전에서 가장 핵심적인 복음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되는 계명은 “하나님 사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둘째가 되는 계명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첫째가 되는 계명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구약에 참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로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입니다.
열왕기하 20:1~6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 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려서 죽게 되자 히스기야 왕은 면벽을 하고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어 주십니다. 히스기야 왕의 생명을 무려 15년이나 연장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그 응답하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6절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그 당신의 상황은 북이스라엘, 남 유다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는 아하스였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께 악을 행한 왕 이였습니다. 바알우상을 섬기고 수많은 산당을 만들어서 제사 지내고 심지어는 어린 자녀들을 불살라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진노하시고 아하스를 징계하셨습니다. 아랍, 이스라엘, 에돔등 주변 국가들로 하여금 침략이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는 침략해서 하루에 군사 12만 명을 죽이고 백성 20만 명을 사마리아로 잡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하스는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앗수르 왕에게 군대 원조를 요청하고 하나님께는 더욱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아하스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36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시신은 백성들의 반대로 이스라엘 열 왕들이 잠들어 있는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 보기에 악한 아하스의 뒤를 이어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역대기하 29:2절에 히스기야 왕의 평가가 나옵니다. 히스기야는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히스기야는 아하스의 통치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에게나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은 왕입니다. 히스기야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의와 진실함으로 행한 사람이었기에 백성들을 왕을 신뢰하고 따랐습니다.
25살에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시작합니다.
바로 히스기야가 왕이 되어 맨 처음 시작한 일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왕 되었던 첫 해 첫 달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성전에 들어가 보니 16년 동안 누구도 돌본 사람이 없었던 성소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습니다. 폐허가 된 그 성전을 대청소를 히스기야는 시작합니다. 이렇게 택함 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섬기고 성전 문을 닫고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않았으니 그 백성들의 삶이 오죽 했겠습니까?
히스기야는 왕이 되어서 자신을 위해서 잔치 벌리지 않고 최우선 과제로 하나님의 성전을 대청소했습니다. 대청소하는데 16일이 걸렸습니다. 역대기하 29:17 “정월 초하루에 성결케 하기를 시작하여 그 달 초팔일에 여호와의 낭실에 이르고 또 팔 일 동안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여 정월 십육일에 이르러 마치고”
그러나 그 일은 결국에 자신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 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히스기야 성전 청소는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예표일 뿐입니다. 신약시대는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실제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3: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도는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심령이 깨끗해야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디모데후서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이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성도가 가장 우선할 일, 그것은 심령 성전을 깨끗케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 가장 먼저 강조하신 말씀이 바로 ‘산상수훈’ 즉 ‘팔복’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3~8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복음성가 826장 - ‘심령이 가난한 자는’ - 찬양”
부귀영화 누리고 자손이 창성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시고 마음(성전)이 깨끗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복입니까? 하나님을 뵈옵는 복입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복입니다. 하나님과 동거, 동락하며 동행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안과 머리를 보고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맑고 깨끗한 심령을 가지고만 볼 수가 있고 만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금 그릇, 은그릇이라고 할지라도 깨끗하지 못하면 주인이 귀하게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값싼 뚝배기라도 깨끗하면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다 성결한 사람들입니다. 깨끗하게 씻음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무디 목사님은 초등학교도 2학년밖에 다니지 못하고 구두 방에 직공으로 일하던 사람이 회개하여 주님 영접하고 성령세례 받아서 정결해지니까 주님이 크게 사용했습니다.
“당신은 주님께 복 받기 원하십니까?”
“당신은 주님께 귀하게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요한일서 3:3절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잠언 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나를 살펴야 합니다. 내 마음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마음을 보십니다. 예레미야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사도행전 8:21절에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도, 쓰임 받을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인격은 겉모양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습니다. 깨끗한 심령 속에 주님이 안식하십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지키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탄식하십니다. 마태복음 8:20절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주님이 그 마음에 거처를 삼으셔서 안식을 취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23:25~26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음이 깨끗지 못하면 주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책망을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겉모습은 맑고 온순하고 점잖고 훌륭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별의별 가증한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으로 입으로 말함이라”
씻음 받지 못한 심령 속은 강도의 굴혈입니다. 시궁창입니다.
마가복음 7:20~23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믿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곧 음란과 도적지로가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 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회개라는 말은 뉘우치고 고치는 것이 회개입니다. 悔(뉘우칠 회) 改(고칠 개) 회개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4:17절에 회개할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자만이 성령님의 빛 비춤이 있습니다. 빛 비출 때 어둠은 물러갑니다.
회개한 심령 속에 주님은 빛으로 찾아오십니다. 회개한 심령 속에 주님이 찾아와 좌정하십니다. 회개할 때 비로소 천국이 임합니다. 주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주님이 거처하신 곳이 주님의 전, 즉 성전입니다. 심령이 깨끗해지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 은혜와 주님의 보혈의 은총을 입는 것뿐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깨끗케 합니다.
“찬송가 189장 – 찬양”
“금이나 은 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갈보리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셔서 죽으시고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깨끗케 합니다.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렇게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다시 모시려고,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 정돈하고 나니 마음이 너무나 기쁘고 좋았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백성들에게 제물을 가져와 마음에 원하는 대로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셨고 백성들은 즐거워했습니다.
역대기하 30:26 “예루살렘에 큰 허락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허락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히스기야 왕은 조상 다윗 왕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역대기하 31:20~21절에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 같이 행하되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무릇 그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 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와 함께 하심으로 히스기야는 형통하였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당했습니다. 앗수르 산헤림이 침공하여 예루살렘이 포위당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베옷을 입고 하나님 전에 들어가 철저하게 기도하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김으로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날 밤,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에 찾아가 185,000명을 송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도 잠시 잠깐이었습니다. 그때에 히스기야 왕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1절에 “이사야 선지자가 저에게 나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그가 죽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종말이 오고 말았습니다. 2~3절에 그때 히스기야 왕은 벽을 향하여 앉아서 여호와께 심히 통곡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하나님 앞에 선하게 행한 것, 성전 청소하고 우상을 타파하고 제사를 회복한 것을 가지고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6절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성을 앗수르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성을 보호하리라 하라 하셨더라.”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응답하셨습니까?
그 응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히스기야에게 은혜를 베푸신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성을 보호하리라” 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 때문에 목숨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시고 유다 예루살렘 성을 보호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이 쳐들어와 예루살렘 성을 포위당하고 히스기야가 하나님 전에 올라가 기도했을 때도 하나님의 응답은 열왕기하 19: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고 응답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을 위하여 다윗 왕 때문에 응답하신다고 하셨을까요? 도대체 다윗 왕의 어떤 점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토록 다윗 왕을 위해서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일까요?
그 해답이 두 번째 자손만대에 복 받는 비결입니다. 두 번째 자손만대에 복 받는 비결은 복 받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하기 나름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될 사람은 될 일을 하고 안 될 사람은 하는 짓마다 안 될 짓만 찾아다니면서 합니다.
오늘 그 해답이 ‘여호와를 왕으로 모신 사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사도행전 13:22)라고 했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 왕”에게 있습니다. 다윗에 관한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이 있지만 오늘은 다윗 왕을 성전 건축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건축에 미쳐있는 다윗 왕
성전 건축에 대한 다윗의 열정이 하나님으로부터 다윗을 확실하게 인정받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7: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늘 다윗은 하나님 궤가 휘장(천막)속에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인 언약궤가 블레셋 전투에서 빼앗겼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40년을 있었지만 언약궤를 찾아올 것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남북을 통일하고 블레셋을 쳐부수고 나라를 평정하고 맨 먼저 기럇여아림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얼마나 좋은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습니다. 역시나 복 받을 사람은 복 받을 일을 합니다. 다윗에게 언약궤의 입성은 하나님의 입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왕으로, 주인으로 모신다는 다윗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그저 입술로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가정에, 사업장에, 목회 현장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을 왕으로 받들고 주님이 말씀을 어명으로 받들어 순종하며 사는 삶이여야 합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모셔 왔지만 여전히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자신은 백향목 성에서 살면서 창문 너머 보이는 하나님의 집은 천막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신데 나는 좋은 집에 호의호식 하면서 하나님을 이렇게 천막에 모신단 말인가’ 이것이 다윗의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준비되지 못함으로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반드시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릴 때까지 침상에도 오르지 않고 잠들지 않겠다고 여호와께 서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시편 132:1~5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근심한 것을 기억 하소서 저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거늘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거하신 성전 건축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성전 건축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마땅히 목숨을 걸만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직접 건축하지는 못했지만 자기 자손 중에서 누가 짓든지 지을 때 불편함이 없도록 많은 은, 금을 모아 놓았습니다. 많은 준비를 합니다.
그럼 다윗이 준비한 물자는 어느 정도 될까요? 그것은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였습니다. 이 물자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놀라지 마십시오.
약 1경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금만 계산해 보면 1달란트가 68kg입니다. 68kg이면 1kg 짜리 금송아지가 68개 그러니까 약 9억 원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10만 달란트니까 900조원입니다. 900조원이라면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돈입니다. 900조이면 우리나라의 기업들을 다 인수하고도 남을 돈입니다. 거기다 은이 금의 10배나 되니 당시에는 은값도 금값 못지않았고 은이 더 비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수 천조에서 경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이것들은 다윗이 세계에 나가 전쟁해서 모은 전리품들입니다. 그러니까 세계의 보물들을 다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오늘날과 비교해도 천문학적인 액수인데 당시에야 얼마나 큰 액수였겠습니까?
그는 이 보물을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데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랐는지 솔로몬에게 여기에 더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열정의 사람입니다. 기타 외국 왕에게 물자조달을 부탁하고 아들과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준비해 놓고 전 국민이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데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 조직적으로 물질적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했던 그의 준비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이렇게 수 천조를 준비했다니 하나님을 위해서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중심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다윗에게 영원한 복을 내립니다.
사무엘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9절 “세상에서 존귀한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역대기상 29:28 “저가 나이 많고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며 그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주님을 기쁘게 한 다윗 왕에게 주님께서 최고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1. 네 노년을 보장하리라, 눈이 흐리지 않고 년 수를 다하리라.
2. 네 자손의 왕통을 이어받아 자손만대에 복을 받으리라.
3.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주님은 다윗만을 왕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자자손손 왕통을 이어받게 하셨으며 예수님께서 다윗의 계보로 오셨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응답을 네 종 다윗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다윗의 이름을 존귀케 하십니다.
구약은 어차피 그림자입니다. 건물 성전은 장차 나타날 것에 대한 예표에 불과합니다. 신약이 실체입니다. 결국, 심령성전, 영혼성전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주님의 성전인 것과 주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심령성전(나오스)은 주님이 거하시는 지성소를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을 너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 터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2:19, 21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히브리서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히브리서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받고 중생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혼성전이 됩니다. 구원받고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1. 영혼성전이 되어서 정결하고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맘껏 안식하실 수 있는 편안한 안식처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심령천국 이루는 것 ⇒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사랑의 표증입니다.
2. 다른 사람(불신자)을 영혼성전 만드는 것 ⇒ 이웃사랑의 표증입니다. 이두가지가 계명이며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전도해서 불신자 속에 영혼성전을 지어 드리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킨 것입니다. 영혼성전을 위해 눈물 흘리고 다윗처럼 부담 느끼고 잠 못 이루며 그 사명 감당할 때, 주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축복을 주십니다.
최고의 선한 행동, 최고로 주님께 칭찬받을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죽은 사람 살리는 전도입니다. 마귀의 소굴이 되어 있는 영혼들을 말씀으로, 보혈로 히스기야가 성전대청소 했던 것처럼, 영혼들을 대청소해서 성령님이 거하시는 심령성전 만드는 일입니다.
‘너는 내 맘에 합한 자다’라고 다윗처럼 주님께 최고 인정받는 길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영혼성전 만드는 일입니다.
왜 주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을까요? 왜 직분 자들을 세우셨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를 부르셔서 사람 낚는 어부로 훈련하셔서 교회를 고기 잡는 배로 사용하시려고 세우셨습니다.
교회의 모든 역량, 직분 자들의 모든 에너지, 성도들의 모든 관심 집중도 우리가 기도해야 항 제목도, 그것은 바로 영혼구원인 전도입니다. 천국백성 만드는 것입니다. 귀신의 처소가 되어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재건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다 줄께! 모든 것 다 줄게!” 하시는 것이 주님이 우리를 향하신 약속이십니다. 자손만대 복 받는 길, 나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은 전도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 되게 하는 길 뿐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