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47)
뒷동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시냇가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잘 자란다.
다음날, 최백호는 자기 부인(婦人)을 시켜
곱단이네 집으로 미리 통지(通知)를 보내고
삿갓에게는 새 옷을 한 벌 갈아 입힌 뒤,
그를 데리고 재(峴) 넘어 곱단이 집을 찾아갔다.
곱단이 의 집은 재(峴) 넘어 남향에 자리 잡은 조그만 기와집으로 마당 앞에는
한참 장미(薔薇)가 꽃 피우고 있었고
손님이 온다는 기별(奇別)이 있어서인지
집안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이리 오너라!"
안마당을 지나 대청 앞에 가서 최백호가 크게 부르니 부엌에서 한참 음식준비를 하던 곱단 어미가 앞치마 바람으로 뛰어나와
"어머나! 백호 어른 이렇게 와주셔서." 하며
부산하게 두 사람을 사랑으로 안내했다.
사랑에 나란히 앉은 두 선비는 무언중 희색(喜色)이 만면(滿面)으로 오늘따라 김삿갓이라는 시인(詩人)이 자기 집까지 찾아온 지금(只今),곱단이는 뒷 곁 소나무 아래를 왔다 갔다 하면서 무슨 일이라도 하는 척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反復)하며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한편 김삿갓은 곱단이 집에는 왔으되
그 처자(處子)의 얼굴은 보이지 아니하고
뒤뜰에서 오가는 짧은 치마를 입은 처자(妻子)의 하얀 종아리만 언뜻언뜻 보았을 뿐이다.
상이 들어오기까지 무료(無聊)했던 최백호는 "김 선생 먼빛이나마 곱단이를 보았으니,이따가 곱단이에게 보여주게
한 수 지어 보시지요." 하고 웃으며 말을 했다.
"글쎄요! 뭐 갑자기 생각이 나겠습니까만
한 수 써 볼까요?"
김삿갓은 곱단이가 쓰는 것으로 보이는 붓을 들어 한 수를 적었다.
규중처자 대여양 (閨中處子 大如孃)
규중처녀가 다 커서 어른 같은데,
완착분홍 단포상 (緩着粉紅 短布裳)
분홍빛 짧은 치마를 느슨하게 입었구나.
적각근창 착과객 (赤脚僅彰 着過客) [원문(原文)]
적각근창 수과객 (赤脚僅彰 羞過客) [수정(修訂)]
다리가 드러나 과객에게 보이기가
부끄러운 듯,
송필심원 화향농 (松筆深院 花香弄)
소나무 울타리에 숨어 꽃향기를 희롱하누나.
곱단이의 지금 표정(俵停)을 그대로
읊은 시였다.
"허 어! 곱단이 가 좋아하겠습니다."
"원!, 별말씀을."
잠시 뒤 주안상(酒案床)이 떡 벌어지게 나왔고,
이어 곱게 단장(丹粧)한 곱단이 가 나왔다.
"자, 뭐 딴 뜻은 아니고 서로 문장(文章)을 나누고 담론(談論)도 할 겸 자리를 마련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했던 차에." 하고 최백호가 말을 하자
곱단 어미가 말을 받는데,
"암요! 그러고 말 구요. 선비님이 워낙 문장(文章)이 높으시니, 아이에게 글도 가르쳐 주실 겸 자주 놀러 오세요." 하며 말했다.
그러자 김삿갓은,
"허! 허!, 이거 과객(過客)에게 너무 과분(過分)한 배려(配慮)를 하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하였다.
곱단이 는 속으로는 기뻐도
말 한마디 못하고 앉아만 있는데,
"애야, 선생님들이신데 어떠냐?
술도 따라 올리고 얘기도 좀 하려무나."
곱단 어미가 딸에게 다정(多情)하게 얘기했다.
"어머나 어머니께서도 어떻게!"
상냥하게 웃음 짓는 곱단이는 서글서글한
김삿갓 시인(詩人)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으나 이렇다 할 말이 없이 술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때 최백호가 잊었다는 듯,
"참, 지금 막 김 선생이 곱단이 주려고 시를 한수 지었는데 읽어 보아라."하며 백지를 건네주자 곱단이가 보고,
"어머나! 오시자마자 어쩌면."
자기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 지은
김삿갓의 시를 흥미(興味)롭게 되새겨 보았다.
다음날부터 김삿갓은 혼자서 곱단이의
집을 찾아가니 그 어머니도 반겨주었고
노처녀 곱단이는 밤이 이슥하도록 시를 짓고 글을 읽으며 삿갓 선생과 즐기기를 마지않았다.
이렇게 곱단이 를 알게 된 삿갓은 최백호에게는 미안했지만 단천 땅을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한 달이 되고
또 한 달이 보름이 되도록 묵었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을 두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곱단이가 삿갓 선생에게 단단히 반했다는군."
"아냐! 그 삿갓 선생이 곱단이 보다도
더 하다던데."
"그러게 연분(緣分)이 따로 있지 뭐야,
영 차고 넘쳐서 시집 못 갈 줄 알았던 곱단이 가."
"글쎄 말이야! 벌써 그 삿갓이
곱단이의 뱃속에다 애를 넣었다는군."
"아이고! 망측해라,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벌써 그렇게 꿀맛을 보았나?"
이렇게 있는 말 없는 말이 파다(播多)하게 나돌자 어느 날 곱단 어미가 딸을 불러 말하는데,
"얘! 요즘 마을에 떠도는 소문(所聞)이 너하고 삿갓 선생하고 이상한 말들이 나돌고 있는데 이제 삿갓 선생을 그만 오시라고 할까?"
하며 곱단이 의 의향(意向)을 떠보았다.
"아이참! 어머니도. 그 선생님하고 저하고 무슨 망측(罔測)한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행여, 소문(所聞)이 그렇더라도 내내 오시던 분을 어떡해 그만 오시라고 해요?" 하며 곱단이가 펄쩍 뛰었다.
("음! 네가 단단히 마음에 두고 있구나.")
곱단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고 아주 결말(結末)을 낼 속셈으로 말했다.
"글쎄 무슨 소문(所聞)이 나더라도 너만 잘하면 그만이다만 기왕(旣往) 너도 혼기(婚期)를 놓쳤으니 더는 말썽 나기 전에 아주 그 사람하고 성혼(成婚)하던가 하렴. 보아하니 고향(故鄕)도 냉큼 갈 것 같지도 않고 데릴사위 감으로도
그만하면 무던하겠더구나."
그러자 곱단이 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데,
"어머니도 좋으시다면 그렇게 하지요!" 하며
못 이기는 체 승낙(承諾)을 하였다.
"하룻밤에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곱단 어미로부터 곱단이 의 의사(意思)를 전달(傳達)받은 최백호는 김삿갓과 곱단이 의 성혼(成婚)을 급전직하(急轉直下)로 진행(進行)했다.
그런 유월 어느 날, 드디어 곱단이 네 마당에서는 조촐한 혼인(婚姻) 잔치가 벌어졌다.
"허허,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암, 노처녀가 그런 선비를 마다할
리가 있나!“
"글쎄! 걸인 시인이 새 처녀 얻고
땡잡았지 뭐!"
잔치에 온 동리 사람들은 이렇게 말도 많았다.
삿갓은 혼례(婚禮)에서의 절차(節次)와 인사를 모두 치르고 밤이 이슥해서야 곱단이 와 오붓한 첫날 밤을 맞게 되었다.
김삿갓은 문득 고향(故鄕)의 아내를 생각하였다.
이렇게 객지(客地)에 나와 새장가를
가게 되어 미안(未安)하지만, 대장부(大丈夫)가 객지에서
소실(小室) 하나 얻는 것쯤 어떠리
하고 스스로 용서(容恕)했다.
그리고 아내와의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어릴 때 일이라서 제대로 신랑(新郞) 노릇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오늘 밤은 멋있는 신랑이 되어보자!)
그는 아랫목에 앉아 여러 가지 감회를 억누르고 윗목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곱단이를 정겨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날이 더웠다. 아니, 남들의 눈을 피해 방문을 꼭꼭 닫았기에 곱단이도 김삿갓도 송송 땀을 흘렸다.
"곱단이 오늘따라 더욱 고울세 그려!"
삿갓이 웃으며 입을 열자
"고단하실 텐데 그만 주무시죠.”
그러면서 깔아 놓은 금침(衾枕)을 매만졌다.
삿갓이 먼저 겉옷을 벗고 자리로 들려 하자,
"제 옷도 벗겨주셔야죠!"
곱단이가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 하였다.
"참! 그걸 잊었네!"
삿갓은 곱단이 의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이제 됐나?"
삿갓은 곱단이 가 규중처녀(閨中處女)라 그런지 주막 안주인이나 가련이 와는 느낌이 달랐다.어쩐지 여자를 다루는 자신감(自信感)도 떨어지고
서툴기조차 하다는 것이 스스로 느껴졌다.
"호! 호! 먼저 자리에 드세요."
방안에 불이 꺼지고 신부가 삿갓의 옆에 살며시 다가왔다.
신랑(新郞)은 먼저 신부(新婦)의 몸을 매만지며 마지막 걸친 속옷을 헤치기 시작했다. 신부(新婦)는 몸을 뒤채고 흥분(興奮)해 떨고 있었다. 삿갓은
신부(新婦)의 부푼 젖가슴을 끊임없이 애무(愛撫)했다.
그리고 손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아유! 자꾸 이러시면!"
곱단은 몸을 비틀면서 끙끙거렸다.
"허! 허!, 참 곱구나! 가만있어라!“
삿갓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색색거리는 신부(新婦)의 몸을 한참 동안 어루만지다가, 드디어 마지막 남은 일을 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십여 년 동안 굳건히 지키고
있던 곱단이 의 처녀성에 자신을 입성(入城)시켰다.
그러나 그 순간, 김삿갓의 실망은
너무도 컸다.
"아니! 처녀(處女)가 이럴 수가?“
삿갓은 갑자기 하던 짓을 멈추고 앉아 곰방대를 물었다. 그리고는 뻐끔뻐끔 담배를 피워댔다.
(아! 역시 노처녀(老處女)란 이런 것인가?)
이제까지 삿갓 자신이 상대(相對)했던 여인과 너무도 다른 곱단이를 의아(疑訝) 하게 여겼다.
"왜 그러세요. 갑자기?“
"아니다. 어서 자거라!"
그리고 삿갓은 불을 켜고 머리맡에
문갑(文匣)에서 붓을 찾아 들고 백지에
글 한 자를 써 놓았다.
手深內闊 (수심내활) [원문(原文)]
毛深內闊 (모심내활) [수정(修訂)]
털이 깊고 속이 넓으니,
必過他人 (필과타인)
반드시 다른 사람이 지난 자취로다.
새신랑이 첫날 밤을 치루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난데없이 불을
켜고 담배를 피우질 않나,
붓을 들어 글을 쓰질 않나, 가만히 이불 속에서 기다리던 곱단이 가 눈을 들어 쳐다보니,
새신랑 얼굴이 한심(閑心) 투성이었다.
그러자 곱단이는 몸을 일으켜 새신랑이
써 놓은 글을 보고서야,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듯이 수치(羞恥)와 분노(忿怒)의 얼굴빛을 감추지 못하더니, 새신랑이 쓰고 던진 붓을 들어 아래와 같이 써 내려갔다.
後園黃栗 不蜂坼 (후원황율 불봉탁)
뒷동산 익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저절로 벌어지고,
谿邊楊柳 不雨長 (계변양유 불우장)
시냇가의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스스로 잘 자란다.
이렇게 써놓은 신부(新婦)는 그만, 복받치는 설움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엎드려 흐느꼈다.
삿갓은 그때 서야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
(여자의 옥문이란 실로 미묘하여 안변 주막집 안주인 같은 호로형이 있는가 하면, 함흥 주막집 여자처럼 항구형도 있으렸다. 그렇다면 곱단이는 세숫대야 형이던가?
허! 허! 거 참 알 수 없군!)
"곱단이 내 잘못했네, 제발 눈물을 멈추지!“
그날, 김삿갓은 새벽 동이 트도록
곱단이 를 달래며 밤을 꼬박 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