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산의 계곡(상)
경주 남산을 이야기 하면서 계곡을 뺄 수 없다. 도당산과 금오산, 고위산으로 크게 구분되는 남산은 세 봉우리에서 비롯된 60여개의 계곡으로 세분되면서 기암절벽의 절경을 자랑하며 신라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을 간직하고 있다. 계곡마다 유적과 유물이 있다. 그만큼 남산이 신라시대 사람들의 삶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 신령스런 산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계곡은 남산을 남북으로 선을 그어 동쪽으로 향해 내린 동남산의 계곡부터 시작해 서남산과 남남산의 계곡 순으로 그 특성과 유물의 분포, 전설 등을 곁들여 소개한다.
◆상서장 돌아 절이 있었던 계곡 절터골
남산의 북쪽 거북이 머리격인 도당산 중심부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돌아 최치원 선생의 사당인 상서장을 지나면 동남산 첫 번째 골짜기 절터골이 나온다. 절터골로 접어들기 전에 상서장 아래에도 절터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절터는 약 40년 전까지도 주춧돌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지금은 주춧돌 한 개만 남고 다 없어져 버렸다, 주위 환경도 많이 바뀌어 이제 절터라고 알아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상서장이 바위산을 배경으로 남천 개울을 정원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아 이 절 또한 아담하지만 훌륭한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절에서 내려다보이는 강 건너 바위더미 위에는 천불탑이 솟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증거로 강 건너편 바위더미 부근에서 백제식 인동무늬 사이에 좌불상이 새겨져 있는 벽돌이 많이 발견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법당과 탑 사이는 다리가 있었을 것이다. 산수의 아름다움에 인공미를 조화시킨 멋있는 가람을 안타깝게도 그저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지금은 저수지의 수로가 지나가고 탑이 섰던 바위도 하천 정리의 돌축대에 묻혀 옛날의 모습은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절터가 있었다고 해서 절터골로 불린다.
◆남산에서 가장 오래된 부처가 있는 부처골
양지마을 다리에서 남쪽으로 약 550m쯤 가면 한 계곡이 있다. 이 골짜기가 남산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감실 불상이 있는 부처골이다. 음지 마을에서 이 골짜기까지 가는 길은 남쪽엔 강을 끼고 또 한쪽에는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으나 지금은 듬성듬성 입구에 인가가 있고 호젓한 산길이 됐다. 염천의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쪼여도 부처골로 들어서는 길은 소나무숲과 대나무가 숲을 이뤄 시원하다. 오직 매미소리만 울리는 남산계곡 역사탐방길에서는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역사속으로 들어가보는 것이다. 계곡 어귀 산기슭에는 세 곳의 절터가 있어 부처골 1, 2, 3절터로 부르기도 한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금오봉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여 들길처럼 정겹다. 그 길에서 만나는 마애여래좌상은 누구나 특별한 감정에 빠져들게 한다. 부처의 모습이 마치 수건을 눌러 쓴 외할머니처럼 친근한 모습이다. 부엌 모양의 둥글게 파인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앉은 할머니 모습을 하고 있어 ‘할매부처’라고 부른다. 할매부처의 영험함이 알려지면서 할매부처 앞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
◆불국정토 바위 탑골
부처골 어귀에서 남쪽으로 약 300m쯤 가면 작은 마을이 있으니 이 마을이 탑골 마을이다. 동남산의 넷째 골짜기인 탑골은 전망대 부근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향해 흘러오다가 해목령에서 흘러오는 옷밭골 여울을 합쳐 옥룡암을 지나고 탑골 마을을 지나 남천으로 흘러드는 개울이다. 길이 약 2km로서 동남산에서는 두 번째로 긴 계곡이다.
탑골 마을에서 개울을 거슬러 약 400m쯤 들어가면 부처바위와 삼층석탑이 서 있다. 부처바위는 높이가 약9m 되고 둘레가 약 30m 되는 큰 바위다. 이 바위는 사면에 여래상, 보살상, 비천상, 나한상 및 탑과 사자 등을 새겨 사방 사불정토를 나타내었으므로 부처바위라 부르고 있다. 이 바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려면 사방 사불정토의 꿈을 알아야 한다.
탑골을 찾아드는 발길은 오래 전부터 끊이지 않고 있다. 걸어서도 가깝고 차도 쉽게 부처바위까지 접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산연구소에서도 이곳의 문화재 답사는 걸어서 하는 코스로 안내하고 있다. 시원한 계곡을 걸어서 들어서다보면 산새소리와 물소리가 여러 가지 잡생각들을 실어내 마음을 맑게 한다. 탑과 불상, 구도에 정진하는 스님, 보리수 등의 불교적 그림들이 조각돼 있는 집채보다 큰 바위를 살피다보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보리사 찾아가는 길 미륵곡
탑골 입구에서 약400m 남쪽으로 가다보면 갯마을이 있다. 옛날엔 나룻배가 닿던 곳이라 한다. 그러고보면 지형이 많이 바뀐 듯하다. 지금은 나룻배는 고사하고 산으로 들어서는 길이 급경사를 이루며 우러러보게 하니 말이다. 계곡 입구에는 경상북도산림환경연구원이 있어 온 동네가 푸르다. 산림연구원의 뒷산은 6만여m²나 되는 넓은 대밭인데 그 대밭 북쪽 계곡이 미륵골이다. 대밭 옆길로 약 250m 쯤 산등성이로 올라가면 정상 가까운 아늑한 곳에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보리사가 있다. 근래에 새로 세운 대웅전과 산령각 및 종각 등이 있는데, 이 건물들은 지금 남산에 현존한 가람 중에서 제일 규모가 큰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49대 헌강왕의 능과 50대 정강왕의 능은 보리사의 동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이 절은 두 왕릉의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옛날 신라시대부터 보리사라 불리어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절에는 통일신라 후반의 석불을 대표하는 유명한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남산의 불상 중에서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는 석불로 보물 136호 미륵곡 석불좌상이다. 이 불상은 여래 좌불이 지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불상을 처음 연구하는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기도 한다.
◆마왕바위와 일천바위 천암골과 대불두 철와골
미륵골 어귀 산림환경연구소 남쪽에 명막골이 있다. 길이 550m되는 깊은 계곡이나 아직까지 발견된 유적은 없으나 등산길이 있어 등반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명막골 어귀에서 약 200m 남쪽으로 가면 천암골이 나오는데 그 곳에 화랑교육원이 있다. 이곳은 충효의 정신과 아름다운 정서와 참된 용기를 가르치는 청소년교육장이다.
천암골은 길이 800m나 되는 깊은 골짜기인데 계곡 정상에 유명한 일천바위가 있다. 높이 10m되는 큰 바위들이 서로 얽혀 봉우리에 높이 솟아올랐는데 동남산의 여러 봉우리들은 모두 이 바위에 위압되고 있다할 정도다. 이 바위 꼭대기는 십수명이 둘러앉을 수 있을 만큼 평평한데 사방 전망이 장엄하고 통쾌하다. 남쪽으로 바라보면 까치봉 등 너머로 멀리 조양벌이 보이고 동으로 바라보면 산과 들을 모두 눈아래 두고 부처의 성산인 토함산을 마주 본다. 북쪽을 향해 바라보면 미륵골의 산정인 신대배기봉을 위시하여 멀리 낭산과 금강산 등 여러 산들이 아늑한 아래 세계로 보인다. 신라시대에도 이 바위가 서울을 내려다보는 자연 전망대로 이용되었다. 그 증거로 쇠로 만든 난간 흔적이 동북쪽으로 줄지어 파여 구멍으로 남아있다.
철와골은 통일전을 끼고 금오봉을 향해 오르는 비교적 가파른 능선으로 계곡이 깊은 골짜기다. 철와골의 아래 통일전과 연접한 유서깊은 연못이 있으니 소지왕을 살린 편지가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서출지’이다. 철와골 계곡을 등산로 삼아 오르면 기암절벽이 저절로 감탄사를 자아내게하는 풍취를 감상할 수 있다. 지금은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때맞춰 내린 봄비의 영향으로 계곡물이 제법 소리를 내며 흐르며 봄을 재촉하고 있다. 폭포소리가 발걸음을 더욱 심오하게 만들고 생강나무는 노란 꽃봉오리를 맺어 생동감을 더해준다.
바위에 알구멍이 숭숭 뚫려 못생겼다고 이름 지어진 문디바위, 일천명이 올라 난을 피했다는 일천바위, 마왕처럼 무섭게 생긴 마왕바위, 절터를 증명하는 축대와 신우대숲 등이 남산 계곡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
특히 1959년 사라호 태풍이 그친 후 철와골에서 불상의 큰 머리가 발견돼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머리 높이만 1.53m 에다 눈과 코, 입 등의 각 부분이 뚜렷하게 조각돼 기백이 넘치는 불상으로 박물관 정원에 우뚝 세워져 있다. 불상의 머리를 보아 육계가 건강한 체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 이 부처의 몸체는 얼굴크기의 비례로 계산하면 최하 10m 이상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전설을 간직한 남산을 오르는 답사객들은 발 밑에 돌맹이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또 다시 남산에 눈이 녹고 봄이 찾아오고 있다.
첫댓글 남산 계곡을 찾아 헤매던 시간들이 아련합니다
벌써 8년 전 일이되었네요
계곡탐방 참 재미있고, 남산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마왕바위 만난지도 꽤나 많은 시간이
흘러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