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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국궁신문 서효행 여무사 취재 동행기
-2019.06.30. 금산 흥관정-
정진명(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집궁 50년을 넘긴 국궁계의 산 역사인 서효행(금산 흥관정) 여무사가 올 초 디지털 국궁신문(운영자 이건호)에 자신이 평생 이룬 시지를 넘긴 것은 이미 국궁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그 과정이 디지털 국궁신문에 보도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동을 주었다. 이를 받아든 이건호 접장은 시지를 시기별로 나누고 분석하는 작업을 하던 중에, 기증자인 서효행 여무사에게 기념이 될 만한 시지 표지를 도록 앨범으로 만들어 드리기로 하였다. 결국 금산 흥관정을 다시 방문해야 하는데, 그 날이 6월 30일(일)로 잡혔다.
나는 1996년 3단 승단을 치르러 왜관 호국정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아주 특별한 체험을 했다. 대회 시작 전에 습사를 하는데, 세 관의 설자리에 가득 찬 한량들이 활을 냈고, 두 순을 낸 뒤에 연전을 하려 무겁에 갔는데, 아직도 사대에서는 사람들이 가득 서서 활을 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과녁 한 쪽이 환해졌다. 한 무사가 활을 쏘는 사대를 가득 채운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똑같은 옷을 입고 쏘는데 사람이 그렇게 달라보일 수 없었고, 그것은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그 만의 특별한 품격이었다. 그의 궁체가 뿜어내는 분위기는 한마디로 군계일학이었다. 그래서 화살을 주운 다음에 사대로 돌아와서 누군가 하고 찾아보니 서효행 여무사였다. 그날 받은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나는 서효행 여무사와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고, 그 사진을 인화하여 보내면서 편지를 동봉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건호 접장이 전화를 해서는 금산에서 한 번 보자고 하기에 좋다고 대답했다.
6월 30일 아침, 청주에서 류근원 명무의 차를 타고 금산으로 출발했다. 오전 10시 무렵에 도착했는데, 삼층으로 올라가니 벌써 왁자지껄하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부산에서 올라온 이건호 부부 이석희 부부가 반갑게 맞아주고, 한영국(강경 덕유정) 접장과 여영애(인천 남수정) 여무사까지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모두 반갑게 악수하고 사무실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중에 이건호 접장이 작은 책자를 하나 꺼내서 서 여무사에게 주려고 한다. 뭐냐고 물으니 바로 그 앨범이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그런 소중한 책을 그렇게 그냥 전달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잠시 구경한 뒤에 정식으로 전달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쇼파에 모여 앉아서 앨범을 뒤지며 살펴보았다.
시지 복판에 낙서처럼 괴(魁)자가 크게 그려졌고, 꼬리가 서효행 여무사의 이름 위로 이어졌다. 이게 뭐냐고 하니, 우승자를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魁가 <으뜸 괴>자이니, 으뜸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서울 쪽에서는 이름 위에 <장원>이라고 쓰는데, 지역에 따라서 이렇게 독특하게 표현하는 곳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활터 문화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잠시 후 이석희 행수가 이런 시지의 의미와 그것을 기증한 서 여무사님의 덕을 칭송하는, 덕담 겸 축사 비슷한 말을 하고, 곧 이건호 접장이 만든 앨범 전달식을 하였다. 셔터 소리가 박수가 저절로 터져나왔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서효행 여무사는 감동을 하며 고맙다는 말을 몇 차례 했다. 모두 함께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활터 구경을 했다. 사두 사진을 보니, 박병일 명무가 세 번째 자리에 걸려있다. 그 앞으로 2명(鄭志義 金相容)이나 있다. 흥관정을 박 명무가 세운 줄로 알던 나로서는 좀 놀랐다. 이건호 접장이 흥관정의 이름에 대한 유래가 불분명하다며 군지에서 찾은 내용을 스마트 폰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활터의 시작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어졌는지 명확히 아는 활터가 별로 없다. 황학정부터가 사두 대수를 놓고 혼란을 겪는 실정이다. 다른 유서 깊은 활터도 그런 경우가 아주 많다.
또 이건호 접장이 회원 명부가 오래 된 게 있다고 사무실의 책꽂이를 보여준다. 정말 오래된 서류이다. 1955년부터 입사한 사원들의 신상명세가 모두 적힌 명부이다. 전국의 활터에 이런 게 많을 텐데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하여간에 오래 된 활터의 문서와 기록들을 잘 보존하도록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다들 공감했는데, 이런 게 우리들 뿐이라는 게 문제다.
잠시 후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읍내 삼계탕 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뒤에 서 여무사의 집으로 갔다.기역자 한옥으로, 아주 옛날 집은 아니고, 아마도 1970년대 보급형으로 많이 지어진 한옥인 듯했다. 그렇지만 한옥이 지는 아름다움이나 그윽함은 비길 데가 없이 좋았다. 뜰에는 잔디가 심어졌고, 능소화가 기둥을 타고 올라가 담장 위로 주홍 꽃을 가득 피웠다. 마당 한 구석에는 작은 자갈 위에 하얀 자갈로 하트 모양을 그려놓았다.
방안과 거실에는 기념패와 상패로 벽이 가득했다. 지난 번에 취재하지 못한 시지와 사진을 마루에 가득 펼쳐놓고 필요한 사진은 카메라에 담고 시지와 상장을 챙겼다. 거기서 1996년 내가 서 여무사와 찍은 기념 사진을 발견했다. 서 여무사가 말하기를, "정 접장님 사진도 거기 있어요. 봤어요?" 하시기에, 봤노라고 크게 대답하며 웃었다. 정말 머리 새카만 젊은 내가 서 여무사 옆에서 살짝 웃는다. 그 빛바랜 사진 뒤로 23년이 '쏜살같이' 훌쩍 흘러갔다.
여무사들의 단체복 사진도 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흰 옷에 허리띠와 깃을 빨강으로 마감한 도복 같은 것인데, 처음 시도하다가 흐지브지 되었다고 한다. 차라리 옛 사진에서 보이는 전복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지금의 흰 옷 위에 전복만 걸쳐도 분위기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여무사들이 한복을 입고 쏘는 대회를 만들면 어떠냐는 말을 했다. 몇 명이 오든 한복을 갖춰입고 쏘는 대회가 있다면 정말 멋진 일이 아닐까? 그런 일을 여무사회에서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것인가. 그렇지만 말을 나누면서도 오늘날 활터 상황에서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슬픈 일이다. 우리 활터에서 전통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간다.
서 여무사는 여무사 모임의 원로여서 여무사 대회가 있을 때는 반드시 초대된다. 마침 오늘 동해에서 대회가 있어서 거기 가야 한다며 일정이 바쁘다고 한다. 그래서 취재를 이곳에서 마쳐야 했다. 뜰에서 능소화와 기와집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대문 밖에서 아쉬운 발걸음 뒤로 하고 헤어지는데 서 여무사는 아쉬운지 일일이 손을 잡으며 조심해 가라고 당부한다.
많은 생각을 하며 고속도로로 접어드는데, 부산 팀은 함양의 새로 생긴 활터 지덕정에 들렀다 간다고 약을 올린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순 없다! 청주 남일면 쌍수리 국궁장으로 향했다. 활을 쏘며 활터에 서린 이 묵은 향기를 천천히 음미했다. 이러는 사이 판문점에서는 남북미 정상회담이 무슨 드라마처럼 진행되었다. 트럼프 김정은 문재인이 모인 판문점에 세계의 이목이 쏠린 것처럼 우리 활에도 쏠렸으면 좋겠다.
첫댓글 강호의 고수들께서 모이셨군요.
후학은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