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쓰레기
이송연
쉬는 날엔 등산을 습관처럼 했다. 그래선지 등산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등산을 한다고 내 삶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맑은 날은 말할 것도 없고 비 오는 날에도 우비를 이용해 산에 오른다. 등산 중독에 걸렸다고 말하는 게 맞는 말일까? 그렇게 보는 지인들 눈에 내 취미는 등산으로 낙인 되어 있다. 산에 오른다고 등산이 취미일 수는 없는데도 말이다. 좋아서 즐겨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취미? 집에 있기도 답답하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 등산을 택한다는 것을 몰라서 일 것이다. 등산은 아무 때나 올라도 돼서 매번 가는 산이지만 가슴속에 불만이 팽창하고 있다. 불만의 원인을 나 스스로 분석해 보니 가족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아빠의 소원은 가족과 함께 산에 오르는 것이다.”
해가 바뀔 때마다 아내와 자식들 소원을 묻고 내 소원을 힘주어 말해줘도 누구 하나 귀담아듣지 않고 좁쌀 흘리듯 해 내 마음엔 야속함이 바위 덩어리가 되어 얹혀 있다. 새해 첫날 새벽 여섯 시에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아내와 자식 둘을 데리고 내가 사는 아파트 뒷동산에 올라 해 뜨는 것을 보았다. 명산에 올라 붉은 해를 보고 싶었건만 그건 내 욕심일 뿐이다.
“내가 가장이 맞기나 해!”
나는 억하심정이 솟구쳐 투덜거리다가 점심밥을 먹은 후 등산화 끈을 묶으며 아내를 흘겼고 해질녘 건드리기만 해 봐 라는 얼굴로 등산화 끈을 풀었다. 아내가 뭔가 저지를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얼굴에 맞서더니 “갑시다! 가.” 눈두덩에 힘을 주며 쌈닭처럼 쏘아댔다. 사소한 대화에 그 목소리였으면 내 심기는 고함을 터트렸을 테지만 나는 소원을 다시 이어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순한 양처럼 있었다.
“당신만 가자고?”
확실히 하기 위해 아내에게 다짐하듯 물었다.
“아들과 딸, 코뚜레를 끼서라도 데리고 갑시다. 인자됐소?” 아내가 고함을 질렀다.
아내가 등산을 가겠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한 것은 그동안 참아온 둑이 터져서 일 것이다. 아내의 동그란 두 눈이 나를 꼬나보아도 내 얼굴은 웃고 있었다. 홧김에 가겠다고 해 놓고 그 말을 지키자니 감정이 치솟은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아내의 표정은 폭풍전야의 낯빛이다. 그래 봤자 겁날 거 없다. 아내는 입 밖에 내뱉은 말은 책임을 지는 성격이니까.
오동통한 아내와 콩나물 같은 자식 둘을 앞세우고 산에 오를 생각을 하니 희열이 일었다. 자식이 어릴 때까지 가족행사로 휴일마다 산에 올랐었다. 내 말을 고분고분 듣던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부터 약속이나 한 듯이 자신의 의사표현을 분명히 했다.
“아빠, 혼자 가시면 안 돼요?”
“저도 가기 싫어요. 아기도 아니면서 아빠는 왜 맨날 같이 가길 바라세요?”
아들과 딸의 말은 아빠를 훈계하는 말투였다.
“수학을 연구하는 부르바키 집단은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도 마흔 살이 넘으면 퇴출이더라. 고집이 세서 화합이 안돼서란다. 너희 아빠 나이가 몇이더냐.”
아내는 내 고집을 문제 삼고 있었다.
“날마다 밤 열 시까지 학원 다니랴 학교 공부하랴 너무 힘들어요. 저도 쉴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저도 일요일 하루만큼은 제 맘대로 쉬고 싶어요.”
중학교 2학년인 딸과 초등학생인 아들이 번갈아가며 나를 설득했다.
“공부만 하면서 뭐가 힘들어? 그리고 뭘 맘대로 해?”
어르고 달래도 딸과 아들은 황소고집이었다. 자식들이 등산을 거부하자 아내도 발목 관절이 아프다는 핑계로 등산을 거절했다. 짜증도 내보고 화도 내며 별의별 독설로 내 의사를 전달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식구들이 야속해 아들 종아리를 분이 풀리도록 때려놓고 씁쓸한 기분으로 산에 오르던 날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내가 회초리를 든 것에 충격을 받은 듯 벽을 쌓았고 멀어져 가는 길을 택했다.
거절할 것을 알면서 물어 거절당했을 때의 기분, 그때의 감정이 머리에 스쳤다. 하루아침에 개과천선을 한 것처럼 셋 다 등산을 갈 수 있는데 내 속을 뒤집었다는 것에 할 말이 많지만 나는 참는 쪽을 택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허벅지를 꼬집고 싶을 만큼 기분이 들떴다. 가족을 모두 데려가 의기양양 산에 오를 생각에 벌써부터 힘이 솟았다. 가족과 함께 등산길에 오를 날을 학수고대하며 딸이 입을 등산복과 등산화를 구입했다. 아들은 부쩍 자랄 것을 염두 해 운동화 차림으로 가자고 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 월 첫 주 일요일 아침 아내는 생수와 과일, 김밥을 챙겼다. 등산화를 신던 딸이 신발이 발에 딱 맞아 산에 오르면 발가락이 아플 것 같다고 했다. 가족행사가 딸 애 때문에 망칠 것 같아 열이 내 얼굴을 강타했다. 내 예상과 다르게 딸은 순순히 등산에 응했다. 산 중턱에서 딸이 쩔뚝거리더니 산자락에 걸터앉아 등산화를 벗었다.
“발가락이 너무 아파요.”
가족의 결속을 방해하는 딸이 너무 미워 한 대 갈기고 싶었다. 아내가 딸에게 귓속말을 했다. 인상을 쓰던 딸은 얼굴을 펴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들은 토끼처럼 뛰어 우리 가족과 오십 미터 거리를 두었고 딸은 거북이처럼 아내 앞에서 걸었다. 아내가 투덜대기 시작했다.
“가고 싶으면 혼자 갈 것이지. 쉬는 날만 되면 들들 볶나 몰라.”
나도 몰래 주먹이 치켜 올라갔다. 뒤따라오는 등산객들의 발자국 소리에 어금니를 물며 주먹을 풀었다. 아내 얼굴은 화가 나 있고 열두 살 아들은 우리를 슬쩍 뒤돌아보더니 가족의 무리에서 벗어나 인파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산등성이에서 노랫소리가 우렁차게 들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봉달이 봉달이 봉달이 마을에에 아버지와 아아들이 격투기 시합을 하고 있네요. 아아들아 그만 좀 패라 이 애비가 불쌍치 않니니 아버지요 그런 말 마소 나 어릴 때 얼마나 팼소.’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자식을 바르게 키워보려고 회초리를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팬다는 게 말이 되냐 싶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개 패듯이 팼나 보다. 오죽하면 아들이 격투기 시합으로 그때를 들먹일까.”
아내가 나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올라이즈밴드가 부른 대중가요 노래예요.”
딸이 뒤돌아서서 말했다. 딸 말이 거짓말 같아 노래를 멈추게 하려고 보폭을 늘려 걸었다. 아내는 아들이 부르던 “나 어릴 때 얼마나 팼소.” 대목을 흥얼거렸다. 나는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새끼가 아버지를 패 죽인다고 앞산이 떠나가도록 노래를 부르는 건 당신 탓이라고, 불붙은 화를 아내에게 퍼부었다.
“당신을 빗대 부른 노래가 아니고 올라이즈밴드가 부른 노래라고 하잖아요.”
아내는 나를 무식한 남자 취급을 했다.
“이참에 당신 성질 좀 고쳐요. 가족 들들 볶아대는 거 견디고 사는 것도 지옥 이예요.”
지나가는 등산객이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내 성질이 어때서? 당신 성질은? 다 당신 닮아 새끼들이 저 모양이잖아.”
“새끼가 부모 닮지 누구 닮겠어요. 당신은 누구 닮았는데요?”
내 성격이 어머니 닮았다는 말을 자주 하던 아내가 시집살이당한 것을 들춰내려는 듯이 물었다.
“어머니는 며느리 들들 볶는 게 취미고 그 아들은 죄 없는 새끼들 들들 볶는 재미로 살고.”
“내가 언제?”
“하늘땅도 다 아는 그 성질을 당신만 모른다 하고 싶으세요?”
“당신이 나를 그렇게 보니까 내가 이런 거잖아!”
“나는 요, 한 번도 자식들을 팬 적이 없어서 저보다 더한 노래로 산자락이 떠나가도록, 합창으로 부른다 해도 아무렇지 않아요.”
“발가락이 멍이 들었어요. 아파서 걸음을 못 걷겠어요.”
딸아이 말에 아내와의 말 겨루기가 중단되었다. 나는 발길을 멈추고 걸어 내려와 딸 발을 들여다보았다. 등산양말을 벗겨낸 딸아이 오른쪽과 왼쪽 발가락 엄지 검지 중지가 벌겋게 부어 있었고 멍도 들어 있었다.
“신발 사이즈가 이백삼십 아니었어? 아빠가 물었을 때 그렇게 말했잖아?”
“등교할 때 신은 신발이 이백삼십이예요.”
한 치수 높은 신발을 주문해야 하는데 그 생각을 잊어버리고 등산화를 주문한 건 내 실수였다.
“네가 말을 잘 못해서 비싼 등산화 값만 날렸잖아!”
나는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작은놈 주면 되잖아요. 그러려고 회색을 산 거 아니에요?”
내 속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 아내가 더욱 소리를 높였다.
“싫으면 싫다고 말할 권리가 제게도 있어요. 이제 등산 가는 거 더는 안 할래요. 아빠 들러리로 살기 싫어요. 언제까지 아빠가 배출하신 감정을 제 마음에 담으며 살아야 하나요?”
“아빠 감정 쓰레기통 하는 거 너무 힘들다! 더하다간 엄마도 명대로 못 살고 죽을 것 같다.”
나는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화낸 것들이 아내와 아이들 마음에 그대로 있다는 것은 비워 낼 사랑을 주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부터 우리 가족 자유 선언합시다. 등산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는 걸로. 당신 할 말 있어요?”
나는 아내가 묻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등산객 쉬어가라고 조성해 놓은 숲 나무의자에 앉았다. 아들이 좀 전에 부르던 노래를 큰소리로 부르며 내려왔다. 우리 가족은 여느 소풍 나온 가족처럼 둘러앉았고 아내가 꺼내놓은 김밥을 집어 입에 넣으며 나는 아내를 향해 긍정의 미소를 지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