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친코(Pachinko)를 읽고/ 정홍택 수필가, 필라델피아문인렵회회장장

[편집실]

-소설작품의 세계 –독후감

        소설, 파친코(Pachinko)를 읽고

                                                                         정홍택 (필라델피아문인협회 회장)

 ‘파친코’의 페이지를 넘기며 내 무식(無識)이 새 지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재일 교포’ ‘민단’ ‘조총련’ 같은 단어를 처음 들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신문을 읽기 시작한 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후 이 단어들이 심심치 않게 매스컴을 탓지만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소설 ‘파친코’는 그런 나를 흔들어 깨워주었다. 아, 이들도 피와 역사를 나와 공유한 동족이었구나. 나는 사죄하듯 읽어나갔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예수의 말씀이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현대판 이삭은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처럼 사랑보다는 동정심에서 임신녀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게 된다. 하나는 남의 씨요 둘째는 내 것이라. 기독교 성직자 답게 내 새끼, 네 새끼 가리지 않고 정성껒 길렀더니… 이 애들의 구석구석 어디 하나 닮은 데가 없지만, 그들의 끈끈한 가족사랑은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튼튼한 밧줄이 되었다. 이 책은 인종차별이 극심한 전시(戰時) 일본 땅에 이주하여 1989년까지 살아 간 한국인들의 이야기이다.

(1) 저주받은 피

맏아들 노아는 누구보다 똑똑 성실하고 마음이 따뜻한 이상주의자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만큼 순결한 인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명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3학년이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되자 이야기는 급전직하 요동을 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시중에 나도는 TV 연속극을 닮은 듯 하지만 역시 품위있게 사태가 처리된다.  친엄마를 경멸하고 저주받은 피를 내려 준 친아버지를 증오하다가 외지로 도망가서 일본인 행세를 하며 새 삶을 꾸려간다.

  순결한 이상주의자가 살 땅이 지구상에 있을까. 작가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더러워.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살아가는 건 더러워져 간다는거야’(p360). 그렇다. 노아는 이것을 배워야 했다. 살면서 때도 묻히고 코딱지도 슬쩍 빼며…다 그렇게 살고 있다. 자칭 고상한 학문과 깨끗한 인격을 지키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깊은 진흙밭에 빠지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다.

(2) 한수라는 사람

  누가 이 사람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그렇다. 한수는 야꾸자다. 사람들은 야꾸자들을 인간 쓰레기라고 경멸하면서도, 그들 앞에 서면 무서워 오줌을 싼다. 직장이 막히고 인종차별을 당하고 천대받는 상황에서 그에게 어떤 선택이  남아 있을까? 그가 훗날 작으나마 힘이 생겼을 때, 조선 어부들에게는 생선 매입 가격을 언제나 넉넉하게 사 주었다. 그 평판 덕분에 순자는 너무도 쉽게 그에게 무너졌다.

  그 후 일본에서 순자 일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노아가 와세다에서 공부할 여건을 마련해 준 것도 모두 자신을 숨긴 그의 선행에 기인한다. 고생 고생하며 늙어 쭈그렁 할매가 된 순자를 끝까지 그림자 같이 떠돌던 한수를 나는 좋아한다. 또 온 정성을 다바쳐 20여년 성장시킨 열매가 저 혼자 뚝 떨어졌을 때 그가 얼마나 고뇌했을까는 저자가 우리 상상에 맡겼다.

  

  여기서 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드 버틀러를 떠 올렸다. 그는 스카렛 오하라를 눈에 보일 듯 말 듯 보호하고 도와준 멋진 신사이며 동시에 전쟁무역꾼으로 돈을 아주 많이 벌었다. 한수, 그 사람도 시대사조에 부화뢰동하지 않고 냉정하게 시국을 꽤뚫어 보며 일찌감치 일본의 패망을 예견했다. 또 이국땅에서 둘로 갈라져 싸우는 두 집단을 가리켜 ‘징징거리는 좌파 조총련, 완전 바보들의 집단 민단’이라고 일갈해 버린다.

(3) 모자수

  소설 파친코의 중심을 잡아주는 인물이다. 위로는 엄마와 형이 있고 아래로는 아들 솔로몬의 행로가 펼쳐진다. 모자수는 뚝심있는 낙천가이다. 비록 형처럼 깊은 학문은 없지만,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불평없이 길을 헤쳐나간다. 학창시절 일본인 친구들의 갖은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즐겁게 지낼 줄을 안다. 그러다가 마음 약한 일본 급우가 왕따당하는 것을 보자 도움을 주어 인생의 절친이 된다.

  파친코의 거친 세계에서 흠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게 보인다. 사람들의 돈을 게임으로 갈취하고 세금은 최대한 포탈한다는 세간의 통념을 깨고 그는 법과 양심을 따르면서도 요령있게 자기 사업을 운영해 간다. 번 돈으로 불쌍한 동포나 자선기관에 아낌없이 기부하는 것도 또 다른 일면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모자수의 최대 수익은 아들 솔로몬의 존경을 획득한 것이다. 노아를 닮은 솔로몬이 세파에 휩쓸려 직장잃고 애인잃고 방황할 때 등대가 되어준 모자수. 자기의 꿈을 아들을 통해 실현하고자 열과 성을 다 했건만, 세상은 그렇게 녹녹지가 않다. 구약의 보아스가 훗날 다윗왕의 선조가 되었듯이 모자수는 솔로몬의 멘토 됨에 모자람이 없다.

(4) 솔로몬과 피비 그리고 선자

  구약의 솔로몬왕 때 이스라엘 문화가 활짝 피었듯이, 이 소설 속의 솔로몬도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의 장점을 물려받은 인물이다. 그는 콜럼비아대학에서 공부할 정도로 똑똑하고 주위 모든 사람들의 열망인 영어를 마스터했다. 솔로몬이  미국 유학시절에 만난 여자가 한국계 미국인 피비이다. 솔로몬은 4대째 일본서 살아도 일본 시민권을 딸 수 없어 한국 여권을 쓰는데, 피비는 미국 이민 이세로서 태어날 때 이미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피비는 솔로몬 가정의 따뜻한 분위기와 가족간의 끈끈한 연대를 호흡하며 즐기지만, 시댁 사람들의 기대를 맞추기보다는 우선 자기의 커리어를 우선한다. 남녀간의 사랑도 ‘공감과 존경’을 앞세운다. 그리고 자기 앞길은 자기가 개척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피비가 처음 솔로몬 집을 방문했을 때, 집안 여자들은 미국에서도 한식을 자주 먹느냐고 물었다.(p334)

    “저희 엄마는 요리를 안하세요.”

    “뭐라고?” 식구 모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조선 음식을 하나도 안 먹어?”

 

    “주말에는 먹었어요. 식당에 가서요.” 피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 집 식구들은 조선인 엄마가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지 않는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피비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 엄마와 이모들은 요리를 많이 하고 먹을 걸 챙겨주는 여자를 경시했다고도 말했다. 피비는 결혼보다는 자기의 커리어(Currier)를 앞세우는 현대 여성의 상징이다.

(5) 역사가 우리를 망쳐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 책 <파친코>는 이 말로 시작한다. 어찌 역사가 인간을 망쳐놓을 수가 있는가? 역사는 인간의 동향을 그냥 기록할 뿐이다. 이 나라를 망쳐놓은 자들은 바로 정치가들이었다. 조선이 망하기 전 대원군과 고종 그리고 사색당파의 그 행태는 그야말로 열국들에게 ‘날 통채로 잡아잡수’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라를 팔아먹은 재상들은 일본 황제에게서 작위를 받아 떵떵거리고 살다가 제 명에 죽었다. 이들의 눈에, 살길 찾아 일본에 건너간 국민, 위안부나 일본군으로 끌려간 조선의 젊은이들이 보일 리가 없다.

  함석헌 옹의 말이 생각난다. 한민족 4000년의 역사를 지탱해 온 것은 국가의 지도자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민중들이다. 그의 ‘풀뿌리’ 민중사상이 여기서 태어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 한민족은 어디를 가도 결코 죽지않는다. 잡초같이 보이지만 질기게 세계 방방곡곡에 퍼져나간다. 그래서 작가 이민진은 이렇게 말했나보다.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는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