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나비가 날면 꽃잎이 나는 것 같아. 나비와 꽃잎이 구별이 안 돼.”
훈이는 웅얼거리듯이 말한다. “어쩌면 나비가 피고 꽃잎이 나는 것 같아.” 그는 똑바른 바른 자세로 누워 눈을 감고 있다. 그의 얼굴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기운을 이기고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 만질 자신이 없다. 그가 다시 웅얼거리듯이 말한다. “그랬잖아요. 처음 그 주점에서 말예요. 계속 이 말만 반복해서 말했어요. 기억 안나요?” 기억이 없다. 눈을 감는다. 그가 몸을 돌려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입술을 깨물며 눈을 뜨지 않으려 애를 쓴다. 그가 더 이상 말하지 않기를……. 나는 처음으로 훈이가 침묵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가 다시 몸을 움직인다. 침대 매트리스가 흔들리는 정도만으로도 나는 그의 자세를 알 수 있다. 그는 바르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나비와 꽃잎의 질감이 감은 눈 안에서 그려지고 있다. 촉촉하고 연하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그러나 작은 충격으로도 쉬이 찢겨지거나 짓무를 것만 같은 그런 질감이 멈추지 않고 펼쳐진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뜬다. 눈이 열리자마자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소리도 없는 눈물이다.
대학 시절, 나비를 형상화 해보라는 기말시험과제를 받고 나는 내 첫사랑의 몸에 나비를 그린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순수한 열정, 창작의 열정이라기보다는 삶 자체가 주는 새롭고 낯선 경험들에게 홀려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분명 삶에 홀려 있었고, 지금 나는 그것을 순수한 열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그와 작업을 하기로 한 날, 화구들과 사진장비들을 메고 그의 자취방을 찾아 갔었다. 그날따라 무척이나 기온이 낮았고 그가 자취를 하던 옥탑방은 난방기구가 없는데다가 여름내 열어두었던 여닫이 나무테두리 창문틀이 빗물 등으로 어그려졌는지 닫히지 않아서 찬바람까지 숭숭 들어왔다. 하지만 달리 다른 공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있어야 했고, 장비들을 메고 오느라 지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더 이상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몸 전체에 나비를 그리고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서 편집을 해야 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다가 여러 가지 변수도 생각해야 했다. 그가 옷을 벗고 내 앞에서 한참을 우뚝 서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외로 숙이고 빠레트에 물감을 짜내었다. 무엇을 딱히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그의 투명하고 맑은 눈빛이 처음으로 내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듯 했다. 어린 시절부터 온도에 특히나 민감하게 반응했던 나의 몸은 춥기만 했다. 어쩌면 과제를 다 마치고 나서 좀 편안해진 마음으로 온전히 그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예민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결국 내가 빠레트에 짜낸 물감을 확인하고 붓을 들어 그를 말갛게 올려다보자 그는 순종하는 어린 복사처럼 은박 돗자리를 깐 바닥에 똑바로 누웠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고 유난히 길고 짙었던 그의 속눈썹이 내 무언의 거절로 인한 복받침으로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뚝한 콧날 아래 얇고 야무진 선을 가진 그의 입술마저 힘을 주어 굳게 다물었다.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몸에서도 파르르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음을 감지했었지만 나는 말로서는 그의 상한 마음을 풀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서둘러 유리병 속의 차갑고 투명한 물에 담가 두었던 붓을 들어 붉은색을 듬뿍 묻히었고 아무런 신호도 없이 그의 심장 부위부터 나비를 그려 넣기 시작했었다.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도 점점 오한이 들어 몸이 떨리면서 손끝마저 얼어붙는 듯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지가 않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고 입술이 파랗게 질려가는 그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고 그가 벌떡 일어나 화를 낼까 두려워 간신히 내일 난로를 사러가자는 말만을 그가 들릴 듯 말 듯 속으로 삼키듯이 말하며 속도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나비들은 그의 몸에서 한 마리 한 마리씩 피어나고 있었고, 정말이지 그가 간혹 숨을 크게 쉬거나 잠깐 몸을 비틀거나 할 때면 나비들은 날개를 움찔하며 곧 날아 오를 듯 생생한 색감으로 화려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장자의 「호접지몽」을 대지 않더라도 그가 나비인지 나비가 그인지 모를 만큼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으로 활짝 피어난 그는 아름다웠다. 동이 터오기 시작했고 나는 온통 나비로 피어 보다 강렬한 생존의 욕구로 유혹과 매혹의 상징처럼 빛나는 그의 몸을 환희에 차서 바라보았다. 설핏 잠이 든 것 같은 그를 깨웠다. 그가 꿈처럼 일어나 비틀거리며 거울 앞에 섰을 때 고장 난 창문을 뚫고 갑자기 햇살이 밀려들어 왔고 그의 몸에서 피어난 나비들은 그 황홀한 색채감으로 절정에 도달한 삶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눈이 부신 듯이 잠깐 눈을 찡그렸던 것도 같다. 그리고는 무서운 무엇을 보는 것처럼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리고는…… 그대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연이었다. 그것은 분명 우연이었다. 그가 거울을 보았던 그 순간, 느닷없이 달려들었던 햇빛만 아니었어도 아니, 나비들이 그 햇빛을 받아 그처럼 찬연하게 빛나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화려한 나비로 피어나 일순 찬연하게 빛나다가 훌쩍 나를 떠나갔다. 그가 떠나면서 남긴 찢겨나가고 뭉개져버린 몇 조각의 날개만이 그가 숨조차 아낀 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던 거울에 표적처럼 남았고 나는 그 거울을 그 해 겨우내 들여다보았었다.
손바닥으로 눈 옆으로 흐른 눈물을 지그시 누른다. 흐른 눈물은 이미 식어 손바닥으로 축축하게 흡수된다. 고개를 돌려 훈이를 바라본다. 촉촉하고 연하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그의 살결을 불안하게 바라본다. 괜찮아… 복숭아 빛이 나는 연한 스탠드 불빛이라면 안심이다. 숨을 크게 쉬어 공기를 들이 마신다. 아직 방안을 채우고 있는 훈이의 살 냄새와 그 속의 온도를 감지한다. 아직 시간이 안 되었다. 아직은 따뜻하다. 나는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훈이의 가슴에 귀를 대어본다. 그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다시는 삶에 홀리지 않으리라고, 나비의 날개 따위를 피우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편은 자상하고 가정적인 남자였고 무엇보다도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늘 먼저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은 언제나 따뜻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손보다는 나를 바라보아 주는 눈빛이 따뜻했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가 잡은 손을 놓지 않았고 그와 함께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시간들 속에서 그럭저럭 여느 여자들처럼 알뜰하게 살림을 하면서 익숙하고 그렇기 때문에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계절은 늘 바뀌었고 머무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처럼 나 역시 떠나간 첫사랑이 거울에 새겼던 나비의 찢겨진 날개는 일부러 애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득해졌고 애를 쓴다 했어도 더 이상 손톱 끝으로조차 만져지지 않았기에 나는 분명 그것을 잊었다고 확신했다. 그처럼 나 역시 떠나간 첫사랑이 거울에 새겼던 나비의 찢겨진 날개는 일부러 애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득해졌고 애를 쓴다 했어도 더 이상 손톱 끝으로조차 만져지지 않았기에 나는 분명 그것을 잊었다고 확신했다. 그 이후로 나는 우연은 모든 것을 일으키는 통속성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이 세상은 그래서 흔하고 닳아빠진 삼류 드라마 같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화려하고 찬란한 꿈을 꿀수록 생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서 나는 매순간 삶에 홀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게 살았다. 무엇보다도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다.
훈이를 만나게 된 것 역시 우연이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훈이와의 만남을 인연이라거나 운명이라고는 말하고 싶지는 않다. 우연이 곧 필연이고 필연이 곧 인연이고 운명이란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훈이는 특히나 더 그렇다. 그저 우연하게 만난 띠동갑 연하의 남자로 보름에 한번 정도 모텔에서 만나 체온을 나누는 사이일 뿐이다. 그 뿐인 것이다. 훈이도 나도 서로에 대한 신상을 알지도 못하지만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훈이를 만나게 된 것은 단지 몸살 때문이었다. 사실 그 몸살이란 것도 갑자기 찾아온 우연한 사건이 계기였다. 아파트 호수를 잘못 쓴 소포를 풀어본 이후로 남들이 들으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할 만한 사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몸살이 났던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작년 가을, 그러니까 내 나이가 서른아홉 살이었던 어느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아파트 앞 화단에서는 단풍이 특히나 예쁜 나도박달나무가 세상의 어떤 물감으로도 그리지 못할 고귀한 노랑의 잎으로 물들고 있었던, 그런 가을날이었다. 그날, 전날 밤 모처럼 남편과 함께 참석한 부부동반모임에서 술을 좀 과하게 마셨던 까닭에 집안일을 대충 해 놓고는 잠이 들었었다. 자면서도 속이 쓰리고 머리가 지근거려와, 아마도 그런 종류의 꿈을 꾸고 있던 찰나에 하필이면 경비실 벨이 끊이지도 않고 계속 울리었고 나는 일어서다가 뇌가 쏟아지는 느낌이 들어 거의 기다시피해서 인터폰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받자마자 막걸리 한 주전자는 마신 것 같으신 척척하고 가래가 끓는 경비아저씨의 목소리가 인터폰 속에서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요지는 다짜고짜 진경미씨, 어쩌구저쩌구 하시더니 어제 온 소포를 왜 여태 안 찾아 가냐고, 빨리 찾아가라며 계속 총알을 쏘시는 것이었다. 정말인지 기관총 사격이었다.
“진경미? 누구지? 저희 집 아닌 것 같아요.”
“202호 맞잖아요.”
“진경미… 내 이름이 진경미였나…”
두통으로 뇌수가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데다가 속까지 메슥거려와 수화기를 멀리 잡고 간신히 나머지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는 생각하는데 다시 경비아저씨의 쩌렁한 쉰 목소리가 왕왕대며 들려왔다. 아저씨는 화를 내듯이 내가 진경미가 아님 누구냐고 했다. 나는 내 이름을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도무지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어물어물하다가 어이없게도 경비아저씨가 내 이름이라고 우기고 있는 진경미라는 이름이 내 이름이 맞는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받아 든 소포상자엔 커다랗고 볼품없이 데생한, 채색도 안 되어 있는 한 마리의 나비 그림이 들어 있었다. 소포는 화실을 운영하는 옆집 여자에게 온 것이었다. 나는 상자 뚜껑을 닫아 현관 앞에 가져다 놓고 옆집여자의 이름과 내 이름이 비슷하지도 않은데 이런 실수를 한 내 자신이 기가 막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두통과 메슥거림 때문에 서둘러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말았다. 그런데 문득 아니, 느닷없이 무엇인가가 내 출렁거리는 뇌수 안쪽으로 덮치듯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 커다랗고 볼품없이 데생한 미완성 나비 그림! 얼핏 보고 상자 뚜껑을 덮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커다랗고 볼품없는 나비는 순식간에 망각에 맺히어 곧장 내 뇌수 안으로 파고 들어와 기괴하게 자란 것이다. 느낌은 어떤 신적인 존재가 우연을 가장해 내게 보낸 독액을 마신 것만 같았는데 그 소포, 그것도 나비가 그려진 그 소포는 분명 나를 겨냥한 독액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으로 사지가 달달 떨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금방이라도 피를 얼려버릴 것만 같은 한기를 몰아 와 나는 이까지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찰나에 일어났다. 잠은 사라지고 오들거리며 일어나 온 방마다 형광등을 켜고 창문을 닫아걸었지만 오한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계속 콧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투명한 콧물은 콧속이 다 헐도록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동안 차마 두려워 내놓지 않았던 눈물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만큼 몇 날 며칠을 티슈 통을 붙잡았고 그 집요함은 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몸살은 서서히 나의 영혼을 부수기 시작한 것만 같았다. 그렇게 계절이 또 한 번 바뀌고 있었다. 콧물은 멈추었지만 오한이 나는 몸은 어떠한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다. 그 커다랗고 볼품없는 나비 한 마리는 지치지도 않고 내 머릿속을 구르며 파닥대고 있었다.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안일을 마치고 베란다에 나가 햇볕을 쬐는 정도였다. 아무리 천천히 해도 오전 열 시면 집안일이 대충 끝이 났고, 잠시 식탁에 앉아 집안을 둘러보며 커피를 마셨다. 다 마시고 나면 전화기 코드를 빼고 느리게 옷을 벗었다. 뭔가 잊은 듯이, 아니 잃어버린 무엇인가가 있는 듯한 표정으로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했었다.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 라고 말하는 차갑고 건조한 몸만이 그 안에 오롯이 들어 있었고 이내 무릎을 껴안고 앉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오래오래 몸에 흘리었다. 욕실 안은 이내 뜨거운 수증기로 꽉 차올랐지만 나는 여전히 손발이 시리었고 아랫배에서는 얼음덩어리 같은 냉기가 만져졌다. 내 몸에서 뿜어지는 냉기는 죽어서도 없어질 것 같지 않았고 나는 천 년 만 년 영원히 이 지독한 냉기를 껴안고 살아 갈 것만 같았다. 샤워를 마치면 발소리가 안 나게 조심해서 베란다로 걸어 들어갔다. 그 당시 햇살이 기다리는 베란다는 무척이나 포근했었는데 마루는 이미 햇살의 따스함이 배여 있었고 하얀색 미니벤치에 장식해놓은 흰색과 보라색의 붓꽃 조화는 늘 깨끗하고 청초한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곤 했었다. 투명한 햇살이 얇게 퍼진 공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었고 잘 접혀있는 검은색 커다란 천을 펼쳐 몸에 감아 두르고는 보랏빛 장미꽃잎이 정갈하게 수놓아진 하얀 방석에 앉으면 그제서야 비로소 내 영혼은 평안하고도 편안한 긴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나는 해의 따뜻한 기운을 받기 위해 두 손바닥을 펴서 점차 스미어들어 스멀대는 햇살의 온도와 그 느낌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햇살은 온몸의 세포 속으로, 결코 서둘지 않는 기품으로 자상하게 스며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뼛속까지 점령해 버린 냉기는 그 기운으로 다스려지고 치료가 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햇빛의 온도는 알맞게 화안했고 꿈같은 몽롱함이 있었는데 간혹 햇빛 아래 눈을 감으면 그 맑고 빨간 색채로 인해 나는 잠시나마 커다랗고 볼품없는 머릿속 나비를 잊어버릴 수가 있어서 더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배고프지 않은 허기라고나 할까, 베란다에 있는 시간은 그런 거였다. 치료가 아닌 진통제 처방 같은 종류였던 것이다. 시간은 서둘러 갔고 해가 서쪽 하늘 쪽으로 내려서면 나는 다시 어깨를 움츠리며 집안으로 들어와야 했었다. 그리고 나면 다시 오한으로 떨기 시작했다. 따뜻했던 햇빛 속에도 가을의 숙살기는 있었던 탓일까? 부작용처럼 나는 양말을 덧신어도 동상이 걸릴 것만 같은 아픔을 느끼며 그대로 침대에 올라 매트 온도를 올리고 결혼할 때 혼수로 가져온 두터운 목화솜 이불을 꺼내 동굴을 만들고는 애벌레처럼 몸을 말고 누워 파르르 떨리는 두 눈을 감을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자주 가던 마트도 안 가게 되었고 필요한 식재료나 소모품들은 남편이 퇴근할 때 부탁하거나 딸내미가 심부름을 해주면 그만이었다. 이리저리 나돌아 다니거나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는 했지만 그렇게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살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불편하지 않았다. 집안일이 있었고 남는 시간엔 베란다에 있으면 되었다. 가끔 저녁을 먹으러 외출을 하긴 했지만 그건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외식일 뿐이었다. 아이들을 앞세우고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 목이 아파왔다. 아파트 현관문 하나를 열고 나왔을 뿐인데도 차원이 다른 세계로 순간 이동한 듯 했었고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는 듯한 밤공기는 곧장 목에 와 박히고 옷 속을 파고들며 아프게 살에 와 박히었다. 사차원의 다른 세계에서 발은 땅에 닿지 않았고 내 몸은 그 불편한 공간에서 커다랗고 볼품없이 뜬 채로 허우적거리며 아이들의 뒤를 따라 유영해 갔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추워지는 날씨처럼 나와의 거리에 놓인 차가운 기류를 어쩌지 못해 조심스러워했고 남편은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도 했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 보는 게 어떠냐고… 장난스런 손동작과는 다르게 사뭇 깊고 진중한 목소리였다. 아마도 크리스마스이브에 좋아하는 레드와인을 충분히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눈동자에 그 무엇도 담지 못하고 무릎 위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 않고 있던 내가 소름끼치게 답답했을 것이다. 흡사 고치에 들어가 웅크린 채로 동사당한 나비 애벌레처럼 말이다.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추워. 서서히 피가 식어가는 것 같아. 무엇도 어떻게도 못하겠어. 얼어 붙는 것만 같아. 끝도 없이.”
“몸이 차서 그런거야. 원래 몸이 좀 찬 편이기는 했잖아. 생각 안 나? 우리 맨 처음 살던 월셋방 말이야. 그 방 구들장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난 자주 잠이 깨서 널 안았잖아. 너무 뜨거워 땀이 날 것 같다가도 널 안으면 시원해졌거든… 언젠가 한 번은 네가 무섭게 화를 냈었지.”
그 작은 방은 우리의 신혼방이었다. 방은 절절 끓었고 남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남편은 자주 깨서 나를 안았다. 답답하고 숨이 막혔지만 나는 숨소리를 조심하며 그가 다시 잠들기만을 기다렸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다리던 그 시간들이 떠올랐다. 남편과 함께 여느 여자처럼 평범하고 평안하게 살고 싶었기에 무엇보다 인내심을 필요로 했던 그 신혼방의 뜨거운 방바닥! 생각이 났다. 남편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서야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풀고 윗목으로 굴러가서 긴 숨을 몰아 내쉬던 시절도 떠올랐다.
“처음에는 그냥 몸이 차려니 했는데, 한때는 많이 고민하기도 했어. 그건…… 뭐랄까… 단 한 번도 널 온전히 가졌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어서…… 뭐, 괜찮아. 익숙하니까. 병원 얘긴 잊어버려. 그냥 원하는 대로 해. 무엇도 상관 안 할게.”
“미안해.”
남편은 말없이 한동안 더 내 앞에 앉아 있어 주었다. 그는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아 주었지만 그의 눈빛은 그와 나 사이의 공간을 내달리다 툭 끊어져 허공으로 번지고 마는 헛헛하고 슬픈 빛이었다. 그 빛을 안아주고 싶었다.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날밤, 남편은 오랜만에 나와 함께 누워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가녀린 목에 오랫동안 키스해주었다.
“널 잃고 싶지 않아……”
메마른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남편이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꼭 좀처럼 열리지 않는 나를 질책하는 소리처럼 들려서 나는 손가락에 침을 묻혔다.
“내 이름이 뭔지 기억이 안나!”
남편이 간신히 내 안 깊숙이 그를 묻었을 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그가 잠깐 멀쑥한 표정이 되어 나를 내려다보다가 내 머릿속에 손가락을 넣어 커다랗고 볼품없는 파닥임으로 가득한 나비를 빼어내 보는 것만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
“너는 지수야. 우지수…… 지수…… 지수야!”
남편의 숨소리와 내 이름이…… 우지수…… 지수…… 지수야, 귓속으로 뭔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그 바람은 귓구멍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오래 회오리 치고 있었다. 간질간질, 기침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두 팔에 힘을 주어 있는 힘껏 남편의 등을 껴안았다. 남편은 내 목에 얼굴을 비비며 사정하였다. 참았던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남편의 등에서 흐르듯 미끄러지는 손바닥에 남편의 송글송글한 땀방울이 만져졌다.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비비며 온도를 느꼈다. 차가웠다. 식어버린 땀의 온도 같은 목소리로 간신히 사랑한다고 말했다. 남편은 움직이지 않은 채로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곧 서두르듯이 내손에 티슈를 쥐어주고는 화장실로 갔다. 기침이 마저 쏟아져 나왔고 가슴에 일던 회오리바람은 그 기침으로 쉬이 뱉어져 버렸다. 바람이 빠져나간 자리엔 이내 더 커다란 빈 공간이 남겨졌다. 춥고 외로운 공간이었다.
훈이를 만난 건 아마도 그쯤이었다. 나를 장악한 커다랗고 볼품없는 나비의 파닥임이 심해지고 있었고 스스로도 정신과를 찾아가야만 할 것 같은 강박증에 고민할 때 즈음, 훈이를 만났다. 말했듯이 우연하게 말이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직장생활을 오래 하는 지란지교 친구가 퇴근 후, 무슨 바람인지 집으로 쳐들어 왔다. 집에만 꼼짝 않고 있던 나에게 뜬금없이 분홍립스틱을 선물해 주더니 내 얼굴을 화판 삼아 한참을 화장놀이를 하고는 허락도 없이 옷장을 벌컥 열고는 나를 모델삼아 코디놀이를 실컷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귀찮아서 친구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친구는 모든 놀이를 마쳤는지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고는 흡족한 듯이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덥석 내 손을 잡아끌고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 것이었다. 배웅하는 남편에게 윙크를 하는 걸로 보아 남편과 모종의 음모를 꾸민 것임에 분명했다. 나는 모르는 체 친구의 손에 잡혀서 순순히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참 오랜만에 택시를 타고 근처 유흥가에 도착했고 택시에서 내린 나는 미아 같은 표정으로 친구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었다. 거리를 오가는 젊은이들의 활기 넘치는 표정들과 상가의 붉은 조명들이 눈에 와 맺혔고 나는 코트 깃을 여미면서도 제법 좋아지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 표정을 살피던 친구는 거 봐, 나오길 잘했지? 라며 팔짱을 꼈고 오랜만에 둘이 웃으며 그 거리를 걸었다. 여기 갈까? 여긴 어때? 라며 사춘기 소녀처럼 까르르 거리며 우리는 붉은 색종이 조명이 주렁주렁 달린 주점으로 들어섰다. 테이블마다 젊은이들이 꽉 차 있어서 중년의 여자 둘이 술을 마시기에는 좀 어색한 기운이 그곳에 배여 있었고 친구가 다른 데로 갈까, 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곳이 좋았다. 시끄러웠지만 테이블마다 테이블 바로 위에서 설치해 내려온 커다란 붉은 조명이 있었는데, 그 조명이 특히나 내 맘을 잡고 따뜻한 손길로 잡아끄는 듯하다. 주점 안을 꽉 메운 담배연기와 어떤 뜨거운 열감은 내 피부에 잘 맞는 볼터치처럼 얼굴에 밀착되어 볼을 빨갛게 달아오르게 했고, 왠지 모르게 설레는 마음이 들게도 하였다. 마침 창가 쪽에서 자리를 일어서는 팀이 있었고 그들 일행이 옷을 챙기네, 라이터를 챙기네, 하며 채 떠나지도 않은 자리에 가서 내 집인 양 쓰윽 앉아 천진하게 웃었다. 친구는 민망한 읏음 웃으며 내 옆에 선 채로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어색한 몸짓을 감추지 않았다.
“너 순 내숭이었구나. 나오니까 화색이 달라지네. 너 그동안 못놀아서 아팠던 거 아니야? 아유, 나는 당최 시끄럽고 정신 없구만, 굳이 여기가 좋다는 건 뭐냐고.”
친구는 주문 받으러 온 젊은 청년 들으라는 듯 일부러 한마디 하고는 주문을 대충 했다. 우리는 소주와 맥주를 시켰는데, 생각난 듯이 친구가 소맥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었다. 손안에 감싸 쥔 작은 소주잔을 홀짝이다가 두 손으로 감싸 쥐어야 하는 큰 맥주잔 안에 소주잔을 수장시킨 채로 마시는 소맥이라는 것이 참 별나게도 맛있었다. 뭔가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하고 그러면서도 속이 싸해지면서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연거푸 두어 잔을 마시고 나서부터는 계속 웃음이 나왔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에 까르르 웃어대며 친구가 걱정스런 눈빛을 함께 떨어뜨리며 만들어주는 소맥을 쭉쭉 맛있게 마시고는 잔을 머리위로 들어 올려 장난스럽게 딸그락딸그락, 흔들어 보이기도 하였다.
훈이는 언제 왔던 것일까? 훈이는 흡사 안개가 자욱한 숲길에서 날개짓을 하다가 불쑥 내 시야에 들어온 나비 같기도 했고, 책갈피를 넘기다 발견한 오래전에 내가 넣어 두었던 빛이 바랜 꽃잎 같기도 했다. 느닷없고 희미하지만 오랜 정인이었던 것처럼 나에게로 왔다. 그는 또래인 듯한 젊은 남자와 둘이었다.
“재미있어보여서요… 우린 너무 재미가 없어요. 함께 있어도 되죠?”
약간 빠른 템포로 말하는 훈이가 내 옆으로 머쓱하게 앉았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내 얼굴 바로 앞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더니 잊고 있었다는 듯이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속눈썹이 길고 짙은데다가 눈빛이 맑았고 얇지만 선이 야무진 입매를 가진 남자였다.
친구는 반지를 두어 개 낀 두툼한 손을 들어 흔들면서 우린 아줌마예요, 어쩌고저쩌고 하며 뭐라 하는 듯했지만 난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기이하게도 친숙한 느낌인 훈이 팔에 내 두 팔을 끼고는 그에게 안기듯 매달리는 자세가 되어버렸다. 내 손을 잡고 그가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내 귓불에 입술을 대듯 가까이에서 묻는 그의 입김이 너무 뜨거워 귓속이 데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이 남자가…
“내 이름은 지수야. 우지수.”
“지수… 이름 예쁘네요. 제 이름은 훈이예요. 정훈!”
친구와 훈이의 동행이었던 젊은 남자가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계속 훈이의 팔에 매달려 웃었던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웃었고 훈이가 나를 안고 그의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어 주었던 감촉만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난 알몸인 채로 훈이에게 안겨져 있었고,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그에게서 몸을 빼는 순간 미끄덕 하는 느낌이 들었다. 땀이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꿈이 아니었다. 환상도 아니었다. 그의 몸을 만졌다. 뜨거웠다. 70도는 됨직한 그의 온도가 방 가득 채워져 있었다. 덥다! 덥다니… 손으로 내 몸을 감싸듯 안아 보았다. 열이 났다! 열이 나다니…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얹어보았다. 열은 아니었다. 체온이라니… 그가 반짝 눈을 떴다. 놀라는 내 손을 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훈이는 조용히 잡아끌었다.
“전화 할게요.”
나오는데 내 등 뒤에 그의 목소리가 툭 와 닿는다. 척추를 타고 넘어와 심장을 탁 때리듯 단호하지만 가라앉고 젖은 목소리였다. 뭐라 말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머뭇머뭇하다가 소리가 안 나게 조심해서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닫으며 들여다본 그 방은 곧 수증기가 피어오를 듯 그의 체온으로 꽉 채워져 있는 뜨거운 온도가 있었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훈이와 내가 모텔방에 있는 동안 세상은 그렇게 변해버렸다. 새 세상을 열고 들어온 동화 속 주인공 앨리스처럼 나는 검은 공간에 하얗게 번지는 눈송이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춥지 않았다. 훈이의 체온이 내 안에 들어와 생명을 가진 듯 살아 있었고, 얼굴에 와 닿는 하얀 눈송이들은 오히려 포근하고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택시를 느리게 잡으며 나는 도로 위에서 오랫동안 눈을 맞고 서 있었다.
“예쁘고 어린 아가씨도 많은데 왜 나를 만나?”
“걔네들은 짜증나요.”
“짜증?”
“만나면 묻는 게 너무 많아요. 시끄러워. 결혼할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끝도 없이 물어봐요.”
“그렇게 만나다 좋아질 수도 있고 결혼하면 되잖아.”
“내가 좋아해도 그쪽 집에서 원하는 사람이 아님 아니죠. 결혼, 관심 없어요.”
사랑하는 여자를 조건의 문제로 떠나보낸 적이 있는 듯 한 농축된 설움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더 물어 본다면 나도 똑같이 시끄럽고 짜증나는 아줌마가 되는 거일 터였다. 말을 아껴야 했다. 그는 뜨거운 체온으로 내 위에 군림하는 왕과도 같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되고 싶었다.
시간은 조용하고 느리게 갔고 어느 정도 시간의 마법이 풀리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챙겨 입고 모텔을 빠져나와 아무런 기약도 없이 그렇게 각자의 세계로 걸어가면 되었다. 그러면 되었다. 그와의 첫 만남이 우연이듯이 나는 늘 우연처럼 훈이를 만났고 우연처럼 그가 떠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훈이와 여러 번 지속해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우연은 한 번으로도 족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응해주면서 나는 놀랍게도 어떻게 해도 낫지 않던 오한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더 이상 볼품없고 커다란 데생나비의 파닥임도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 역시 우연한 현상이었고 늘 그렇듯이 우연한 것들에게 자꾸만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았다. 훈이와의 만남 역시 우연하고 의미 없는 만남인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지만 어쨌거나 부적절한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은 때로는 구토가 나올 정도로 스스로 우스꽝스럽고 혐오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막상 훈이에게서 문자가 오면 나는 다시 화장을 하고 그와의 약속장소로 가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에 가까운 상실감을 주었는데 그동안 성실하게 살아왔던 나의 삶 전체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훈이와의 만남은 여러 달 지속되었고 결국은 스스로 어떤 제어장치를 찾아 낼 수밖에는 없었다. 구청 합창단원으로 들어갔고 서예를 배우기 위해 서예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얼핏 다시 무엇인가에 유혹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나는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묵묵히 흐르려고 노력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연인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훈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처럼 훈이와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말을 잃은 사람들처럼 있다가 작별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헤어질 때마다 정말 마지막이야, 라고 습관처럼 되뇌었지만 한두 주 후엔 어김없이 그에게서 예의 그 짤막한 문자가 들어왔고 나는 그때마다 마음과는 달리 그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체온은 식어갔고 우연을 빙자해 내가 생각했던 말로 표현 못할 의미도 사라지고 있었다. 그 흔한 전화 통화조차 안하는 사이! 물론 훈이가 아버지의 사진관 일을 돕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전화통화가 불편할 거라는 배려아닌 배려 같은 이유도 있었지만 역시 진실은 의미가 없기에 서로 간에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모해? 만날까? 몇 시? 이런 간결하고 짤막한 문자 정도면 충분했다. 아무튼 훈이와 만나면서 고집스럽게 나를 괴롭히던 냉기가 사라진 것만은 확실했다. 베란다에서 햇볕을 쬐며 시간을 보내던 차가웠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침을 떨었고 꽃샘추위에 빨개진 딸내미의 볼을 달래줄 수 있는 따뜻한 손, 그리고 더 이상은 목화솜 이불이 필요하지 않은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계절은 항상 그래 왔듯이 바뀌었고 아파트 정원에서는 훈훈한 봄바람에 개나리와 목련꽃이 그 소담한 꽃잎들을 노랗게 하얗게 터뜨리고 있었지만 베란다에 나가 청승을 떠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몸살의 기억이 배어 있는 그 황량한 공간을 내다보며 커다랗고 볼품없던 그 나비는 어쩌면 저 꽃잎들 사이로 날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더 이상은 내 머릿속을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밑도 끝도 없이 혼잣말을 할 뿐이었다.
아이가 막 손에 든 솜사탕처럼 기분 좋은 공기가 느껴지는 오후나절 문득, 훈이에게서 꽤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번 만났을 적에 그가 처음으로 내게 무언가를 물어보았을 때 대답을 못해주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늦었지만 대답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 처음으로 문자를 보내 보았다. 답장은 없었다. 나는 가만히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폴더를 열었다. 내친김에 훈이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까지 꾹 눌렀다. 처음 있는 일이다. 그리고 또한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신호음도 없이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훈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고객님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밝지만 건조하고 가식적인 목소리!
나는 막 잠에서 깨어나 전날의 숙취로 지근거리는 두통을 쥐어 집고 인터폰을 받았던, 그리고 자신이 진영미인지 우지수인지 모르고 택배를 받았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처럼 영문 모를 혼돈 상태에 빠져 텅텅 비어버린 우주에 망연히 떠있는 느낌이기도 했다. 오래 전에 꽁꽁 묶어서 수장시켜놓았던 찢겨진 나비날개가 새겨진 거울 속의 내 첫사랑이 혹시 훈이의 몸을 빌어서 내게로 온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찬란한 나비가 되어 저체온증으로 떠나가 버린 내 첫사랑의 이름은…… 훈이였다. 누가 진짜 훈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훈이였다. 천천히 일어나서 화장실로 들어가 오줌을 누었다. 그리고 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틀어 올렸던 머리를 내려 곱게 빗질을 하고 나서 다시 깔끔하게 틀어 올렸다. 머리카락 한 올의 그늘도 내리지 못하게 손에 물을 묻히어 다시 반듯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나서 현관에 나란히 정리된 신발에 양 발을 넣고 천천히 한 발 한 발 꾹꾹 눌러 밟으며 아파트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늘과 맞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햇살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촘촘한 빛의 그물을 헤치며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작은 횡단보도를 두 개 건너고 대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막 붉은 장미가 피어 있는 길모퉁이를 도는데 눈물이 났다. 그 담벼락에 멈춰 서서 울었다. 서러운 눈물이 아니다. 억울한 눈물도 아니다. 그냥 투명한 액체일 뿐이다. 눈물방울 속으로 바닥에 떨어진 붉은 장미꽃잎이 맺힐 때 더는 못 참고 주저앉았다. 촉촉하고 연하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그러나 작은 충격으로도 쉬이 찢겨지거나 짓무를 것만 같은 그런 기운이 나를 휘감을 적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 한 줄기가 몇 개의 꽃잎을 흔들고 간다. 간신히 담벼락을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섰을 때 여러 줄기의 바람이 등짝을 치면서 떨어져 간혹 뒹굴거나 뒤척이던 꽃잎들을 일제히 허공으로 부른다. 난다. 꽃잎이 난다. 한 손으로 담벼락을 짚고 서서 여러 갈래로 나는 꽃잎을 보았다. 우연한 일이다. “난 나비가 날면 꽃잎이 나는 것 같아. 나비와 꽃잎이 구별이 안…… ” 바람의 소리인지 ‘그’의 소리인지 분간 할 수 없는 목소리가 귓불을 간지럽힌다. 내가 마침내 천천히 대답했다.
“어쩌면 나비가 피어 꽃잎이 나는 것 같아…… 나는 이제 너의 말을 할 수 있어!”
<심사평>
소설이란 가끔은 진실을 담은 우리 영혼의 거울
시에 신인상 소설을 심사하며 가장 주목했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김호경의 「된장남녀」는 뉴욕에 디아스포라해온 한국인들의 심리와 문화적 허영을 세련된 구성과 직설적인 화법으로 풀어낸 흥미로운 작품이다. 특유의 이국적 배경이 흥미로울뿐 아니라, 혼종적 문화현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문제적 시각에도 공감한다. 다만 기성작가의 구성법(명언을 인용한다거나)이나 핍진성보다는 ‘정보’가 나열되는 서술방식은 아쉽기만 하다. 그리고 김희윤의 「단색 무지개」는 다문화 사회가 되어가는 우리나라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상과 타자로서의 외국인 여성노동자에 대한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 여성노동자의 이름을 원래의 이름으로 불러주지 못하고 ‘이화’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재현적 한계를 드러내고, 임금체불이나 사내 성폭행 등의 사건들은 그 선정성에 비해 진부하게 그려지고 있다.
수상작으로 뽑은 이연수의 「나비」는 중년 여성의 일상 속에서 나비처럼 날아든 연하남과의 짧은 사랑을 그리고 있다. 유부녀와 연하남의 사랑이라는 설정만으로는 어느 막장드라마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자칫 진부하거나 추해질 수 있는 소재를 다루면서, 주름진 감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표현하는 진지한 목소리가 돋보인다. 남편에 대한 연민과 새롭게 찾아든 사랑에 대한 설렘과 좌절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한없이 가볍고 섬세하다.
사람들은 소설에 대해 많은 꿈과 환상을 갖고 있다. 소설이란 가끔은 진실을 담은 우리 영혼의 거울이기도 하고, 가끔은 거짓투성이의 치졸한 요설이 꾸는 꿈이기도 하다. 욕망을 풀 듯 맘대로 써대는 소설이 있는 반면에 잔잔한 시선으로 영혼의 상처를 응시하는 그런 배려를 가진 소설도 있다. 이연수의 「나비」는 상처를 기억하며 그 아린 고통을 품에 안으려고 노력하는 소설이다. 앞으로도 영혼의 안식이 되는 좋은 소설을 쓰리라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김경복(문학평론가·경남대 교수)
오윤호(문학평론가·이화여대 HK교수)
이성천(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첫댓글 축하합니다. 사진방에서 익힌 얼굴~~~이렇게 당선소감과 글을 마주하니 더욱 정감이 갑니다.
소설가야말로 대중에게 사랑받는 신분이니 더욱 귀한 소설 많이 쓰시기를 바랄게요.^^
소설가로 거듭나는 노력 경주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설로 선생님의 숨은 기량과 기적을 많이 펼쳐주시길 바라요^^
축하드리구유 계속 좋은글 기대하겠습니다...........
기적을 만드는 문학, 문학이 만드는 기적, 그 뜨거움을 기다립니다.
이연수선생님의 당선소감 글에서 문학의 힘을 느낍니다^^ 특히 신예소설의 힘!! 다시 축하 드리며 문운이 함께 하시길요...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나비'를 접수했어요. 나비가 피어 꽃잎이 나는 그 기적이 펼쳐지기를 빕니다.
요즘 주말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시작할때
기적과도 같은, 글 많이 많이 쓰세요. 다정다감하신 분!
멋진 연수 샘~ 지금처럼 쭈욱~ 뜨겁게 가는 겁니다. ^^*
열심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