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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숨길 수 없고, 역사는 진실을 말해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라와 백제를 논하거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조선시대때의 정보에는 사실상 많이들 모르고 있었다.
올린 이가 뉘인지는 모르나
인터넷에서 어떤 이가 몇가지를 추려내어 올린 것을 여기에 옮겨본다.
그때가 지금과 유사하고 100년 이래로 이와 유사한 일들이 빈번히 일어난 바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옮기는 것이다.
빈번한 일이란 역사적 왜곡과 현실적 사실을 파괴시키는 행위를 말함이다.
어느 한 지역을 두둔하고 미워하기보다 과거를 알고 뉘우치고 미래를 변화시켜야 할 세대들에게 전한다.
이것은 지역감정 유발도 아니거니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때문에 올린 이가 각 머릿말에 붙힌 글귀까지 일일히 수정하기가 힘들다.
이에 유념하고 글을 봐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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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왕조실록...토착왜구 유래
[연산군일기 49권, 연산 9년 3월 25일 1503년]
전한 정인인이 서계하기를,
"신이 직접 제포의 왜인을 검찰하여 보니 호의 총수 4백, 인구 2천여 명으로 출생이 날마다 불어나니, 염포·부산포 역시 반드시 이럴 것입니다
마치 종기가 뱃속에 맺히는 것과 같아 언젠가는 썩어 터질 것이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깁니다 또 본도(本島)의 남녀가 삼포에 혼인하여 와서 사는 자도 퍽 많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03025_003
2 아동 인신매매..웅천(진해)
[연산군일기 50권, 연산 9년 7월 29일 1503년]
예조에서 아뢰기를,
"웅천 사람 마동·철동...박강·배후동·우돌동 등이, 각 고을에 사는 백성을 삼포 왜인의 집에 비밀히 팔았습니다
왜인들이 우리 강토에 와서 산 지 오래인데, 금하는 법이 허소하므로 구애없이 출입하여 우리 백성들과 섞여 거처하기 때문에, 인근의 유민들이 부탁을 받아 자녀들을 팔아 넘기는데 지금 드러난 것이 이러하니, .."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07029_003
3 왜구랑 아비 형..삼포(울산 부산 창원)
[중종실록 8권, 중종 4년 4월 2일 1509년]
..김근사가 4조를 서계하여,
"..둘째, 웅천현 보평역은 제포 북쪽 3리쯤에 있는데, 그 곳 인민과 역리들이 왜인과 결호하여, 수양이라고 칭하여 서로 왕래하면서 아비라 부르고 형이라 일컬으니, 상고(商賈)로서 장사하는 자나 와서 파는 왜인들이 모두 역인(驛人)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피차 사이에 끼여 정을 통해 주고 물품을 무역하며, 국가의 사정을 누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모두 이런 사람들의 소위입니다.."
4 임난전 반역을 경계하는 이이의 상소
친일독재 한 뿌리 ?
[선조수정실록 12권, 선조 11년 5월 1일 신해 1번째기사 1578년]
"...영남에서 진을 치고 대장과 대치한 군졸들의 일로 보더라도 이는 나라를 반역하려는 조짐입니다
한 곳에서 진을 치고 대치했다가 다시 흩어진 정도는 전하께서 붙잡아다가 처벌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만일 곳곳에 진을 치고 대치하면서 흩어지지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http://sillok.history.go.kr/id/knb_11105001_001
5 임진왜란 4월 13일,
일베 토왜들 세뇌되서 반성을 모르지?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3일 1592년]
..상이 이르기를,
"윤두수가 어떻겠는가?"
하니, 괵이 이르기를,
"윤두수는 재주와 기량이 있으니 어찌 합당치 않겠습니까. "
..괵이 아뢰기를,
"서울의 시장 사람들은 태연하게 옮기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 사람들이 다 배반하였는데 사실인가?"
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5003_006
6 역사왜곡 정보화로 끝~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8일 1592년]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치계하였다..
"..왜국은 정수(征戍)나 요역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이미 그들을 좋아하고 있는데 왜적이 또 민간에 명을 내려 회유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모두 왜적의 말을 믿어 항복하면 반드시 살고 싸우면 반드시 죽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연해의 무지한 백성들이 모두 머리를 깎고 의복도 바꾸어 입고서 왜적을 따라 곳곳에서 도적질하는데 왜적은 몇 명 안되고 절반이 배반한 백성들이니 매우 한심합니다.."
7 영남조상 구해줬더니 뒤통수 ㅉㅉ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4월 21일 1593년]
안집사 김늑이 치계하기를,
"경상도에서 토적들이 일어나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대낮에도 재물을 빼앗고 인명을 살상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는데 처음 일어났을 적에 소탕하지 않으면 뒤에 도모할 대책이 없게 됩니다..
조정에서는 전라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이문하여 그들로 하여금 본도의 관곡을 급히 운반하여 경상도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소서"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4021_007
9 주인 도망간 진주성에 입성한 호남대장부들..정보화로 역사왜곡 끝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1593년]
..김천일이 최경회·고종후 등과 청당에 나란히 앉아서 말하기를,
"여기를 우리들이 죽을 장소로 합시다."
하고는 술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술을 지니고 있던 자도 이미 달아난 뒤였다
이에 불을 지르도록 명하고는 스스로 타 죽으려 하였는데 적이 바로 촉석루에 올라오자,
김천일이 그 아들 김상건 및 최경회·고종후·양산숙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10 조종?...왕조 근본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0일 1593년]
..이번에 가지고 오는 저들의 요구조건은 1년에 세 차례씩 조공을 바친다는 것과 전라도와 은 2만 냥을 준 뒤에야 왕자와 세 배신을 송환하겠다는 것이라 한다
경략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전라도는 곧 조선 조종(祖宗)의 땅이다
또 은 2만 냥을 어찌 줄 수가 있겠는가
만약 먼저 왕자를 송환하지 않는다면 조공을 허락할 수 없다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7010_002
11 임진왜란 때 왜구와 붙어먹은 동쪽..
일제가 같이 붙어먹은 동쪽 역사를 미화시킨 이유 알겠지?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8일 1593년]
‘8일에 소서비가 심유경과 함께 제독을 보니 제독이 꾸짖기를
「내가 평양을 공격할 때 차마 다 죽이지 않은 것은 너희들에게 재생의 은혜를 내린 것인데, 지금 약속을 저버리고 전라도를 치고자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니, 왜장이 말하기를
「전라도 사람들이 우리 군사를 매우 많이 죽였으므로 지금 전라도를 치는 것은 그 원수를 갚으려는 것뿐입니다..」
12 유성룡 보고
[선조실록 50권, 선조 27년 4월 17일 1594년]
..성룡이 아뢰기를,
"요즈음 듣건대 영남의 일들은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변장들이 흔히 우리 나라의 굶주린 백성들의 목을 베어 그것을 대전(大戰)에서 얻은 적의 수급이라고 한다니, 속이는 일들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지난날 중국군만 믿고 있다가 지금 와서는 또 김덕령에게 의지하고 병사 등 모든 장수들은 앉아서 날만 보내고 있으니 나랏일을 다시 어떻게.."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4017_002
13 왕의 말
[선조실록 54권, 선조 27년 8월 15일 1594년]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는 풍습이 잘못된 지가 오래이다
비록 친형제라도 천자문을 배우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면 높은 자리에 앉히고 대우를 하지만, 활과 화살을 가지고 무술을 익히면 뜰에 내려가게 하고 천대한다
그래서 변란을 당하기 전에 상주에는 궁수가 3인뿐이었다 한다..
또 신묘 연간에 조회오는 왜인이 연이어 2년을 오지 않자 영남사람들은 저들에게 자중지변이 있다 핑계하면서 적이 반드시 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깔보고서야 되겠는가.."
14 실화ㅜㅜ
[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9월 14일 1594년]
비변사가 아뢰기를,
"..대저 경상도는 인민들이 흩어져 3년 동안 다시 수습할 길이 없어 짐승과 새처럼 놀라고 흩어져 굶어죽은 자를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장수된 자들은 팔짱만 끼고 무사한 지역에서 그럭저럭 지내다가,
조정에서 그들을 시켜 싸우고 지키게 하면 반드시 ‘군사가 없는데 장차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하고,
적을 만나면 ‘중과부적이다.’하며, 싸우다 물러나다 하다가 이 몇마디 말로 죄를 면하고 책임만 때우려고 듭니다.."
15 왜구가 남이가?
[선조실록 61권, 선조 28년 3월 1일 1595년]
도원수 권율의 장계
"..왜적을 위하여 농사를 지어 조세를 바치고 그들의 노역에 이바지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세월이 갈수록 거의 그들과 동화하여 서로간의 관계를 잊고 있습니다.
전해 들으니,
동래·부산·김해 등지에는 밭가는 자들이 들녘에 가득한데 3분의 2가 모두 우리 나라 백성들이며 그들 중에는 이따금 머리를 깎고 이를 물들이는 등.."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803001_008
16 [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1월 17일 1596년]
도체찰사 이원익이 왜적의 방비책..대해 아뢰다
"..신이 영남의 인심을 오래 관찰했는데, 그들이 ‘임진년에는 뜻밖에 병란을 당하였으므로 그처럼 겁냈으나, 이제 다시 온다면 어찌 적과 함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있습니다만, 병란을 당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전라도는 임진년의 병란 이후로 국가에 공이 많거니와, 양반 중에서 근왕한 자는 다 호남 사람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11017_002
17 나당야합 시즌2
와~ 위기에 반역질 과학이냐?
[선조실록 96권, 선조 31년 1월 23일 1598년]
..이조판서 이덕형이 장계를 올렸다.
"오 총병이 왜적의 간첩을 사로잡았는데 경리가 잡아다가 직접 물으니,
그가 ‘지난날 왜적들이 도산의 왜병을 구원한 것은 진짜 왜인이 아니라, 이는 조선인 수천 명이 왜인 수백 명과 협동하여 기치를 많이 벌여 세우고 기세를 올린 것이다.
배에 타고 있던 왜적도 큰 배에 탑승한 왜적은 겨우 5∼6인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었다'.."
* 도산 : 울산 왜성
18 주력군 호남과 달리 전쟁터 영남은 왜 기록에 없을까?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번째기사 1598년]
좌의정 이덕형이 치계하였다..
이문욱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이 전파되자 호남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19 임난 후에도 기강해이 여전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39권, 광해 3년 3월 21일 신유 1번째기사 1611년]
경상도 관찰사 윤방이 조정에 하직 인사를 올리니, 왕이 봉서를 내려 이르기를,
"부산의 왜영(倭營)에 섬 오랑캐가 오래도록 머물러 있자, 우리 나라의 간사한 자들이 모든 대소 동정을 서로 상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시에 왜인이 계속 나와서 여러 달 머물러 있자, 우리 나라에서 이익을 꾀하는 자들이 출입하면서 서로 내통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
20 국가위기에 왕조기반 최후보루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 2월 11일 1624년]
제도(諸道)에 하유하였다
"국운이 매우 비색하여 역적 이괄이 군사를 일으켰는데, 제장이 좌시하여 경성이 함락되었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통곡할 만하다..
저 호남은 참으로 우리가 회복할 수 있는 터전이 될 것이니, 우리 각 고을의 대소 신민은 각자 창의하여 군사와 양식을 모아 혹은 진격도 하고 호위도 하여 함께 큰 공훈을 이루도록 하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11_005
21 일베 토착왜구들 눈 있으면 봐라
주류 비주류 바꿔치기 대단해 호남이 소외? ㅎㅎ
[현종개수실록 11권, 현종 5년 7월 19일 1664년]
영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양호에서 수재에 대해 아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호남이 가장 심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전주가 더욱 심합니다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며, 전주는 또 왕업이 일어났던 자리입니다
하늘이 다른 곳에 재앙을 내리지 않고 이곳에만 유독 혹독하게 내린 것은, 우리 전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깨워 주려는 것이 확실합니다.."
23 반성없는 역사는 반복된다
[숙종실록 4권, 숙종 1년 윤5월 3일 1675년]
비변사에서 아내와 간통한 왜인을 죽인 동래부 사람을 석방해 줄 것을 청하다
이때는 변방의 금령이 해이해져서 관(館)에 있는 왜인들이 가만히 여염으로 다니면서 부녀자를 간음하였다
그래서 동래와 부산의 백성에는 왜인의 출산이 많았으며, 서북의 사람도 또한 그러하여 호인(胡人)의 귀와 눈이 되어 가만히 나라의 일을 일러 주므로 식자들이 이를 근심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sa_10105103_003
23 외길 학문에 맞는 곳...어디가 소외?
[숙종실록보궐정오 19권, 숙종 14년 6월 14일 1688년]
이조 판서 박세채가 올린 시무 12조
"..영남은 옛부터 인재의 부고로 일컬어 현유가 많이 나왔는데, 진실로 풍습이 다른 곳과 통하지 않아서 인물이 나지 않으므로,
마침내 청명한 조정에 발탁되어 나와서 세상에 드러난 이로서 장현광·정경세·정온과 같은 사람이 없는 지가 지금 4기를 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의논이 괴격한 소치이며, 조가(朝家)에서 포기한 데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1기 : 12년
24 반역으로 급제해도 보직 안주고 폐기되었단다
[영조실록 13권, 영조 3년 9월 14일 정묘 3번째기사 1727년]
부응교 조지빈이 상소하기를,
"영남 사람은 문과에 급제한 이가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경서를 연구하고 행실을 근신하는 선비가 또한 얼마인지 모를 정도인데도 다만 표방에 인연하여 전연 폐기되고 있으니, 각별히 수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전조(銓曹)에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표방 : 어떤 명목이나 주장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309014_003
25 반역은 차별
[영조실록 26권, 영조 6년 5월 17일 1730년]
..임금이 말하기를,
"...영남 사람으로써 말한다면...무신년 이후에는 차별 대우를 하였으므로 조정에 등용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 사람도 아니요 짐승도 아닌 어리어리한 지경에 빠져 하지 못할 짓이 없게 된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이 말하기를,
"당론은 좋지 않은 일이니, 좋지 않은 곳에서 폐단이 생기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605017_002
26 [영조실록 33권, 영조 9년 1월 13일 을미 3번째기사 1733년]
풍원군 조현명이 말하기를,
"영남 지방의 풍속은 다른 곳과 다릅니다..
영남 사람은 본래부터 고집이 많아서 자기의 소견을 한번 정하면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버려둔 지 어느덧 40년이 되었습니다.
비록 명현의 후손일지라도 농부가 되는 데 만족하여 모두가 말하기를,
‘치우친 의논을 하면 역적으로 여기고 과거를 보면 조정에서 버림받으니, 차라리 내가 농사를 짓고 내가 우물을 파서 먹고 사는 것이 낫겠다.’
고 합니다.."
27 왜 이렇게까지 차별받았을까? 반역질!
[영조실록 39권, 영조 10년 11월 11일 임오 3번째기사 1734년]
이조 판서 송인명이 영남인의 의망을 위해 현주의 규식을 회복시킬 것을 청하다
이조 판서 송인명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영남 사람은 비록 의망이 되더라도 낙점을 받지 못하는 자가 많으니, 청컨대 현주의 규식을 회복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의망 : 관리로 추천된 후보
* 현주 : 주석을 달아 표시
http://sillok.history.go.kr/id/kua_11011011_003
28 충절
[영조실록 66권, 영조 23년 10월 18일 1747년]
원경하가 말하기를,
"호남은 옛날에 명공(名公)·거경(巨卿)이 많았습니다 진주 3장사는 모두 호남 사람이고, 일신의 7충신 역시 모두 호남 사람입니다.."
..임금이 명하기를,
"고석 및 안황·정사협은 대정을 기다릴 수 없으니, 자리에 따라 녹용하고, 다른 사람들 중에 이미 녹용한 사람 이외는 일체를 조용할 것이며, 정유년에 순절한 사람 임박에게 증직하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310018_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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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 헤아릴 수 없이 그 기록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다 올릴 수도 없을 지경이다.
임진왜란 전후 지금으로부터 200~300 내외로 상당히 가까운 과거에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다.